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뉴욕과 올리버 색스 ② : 나는 감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웃픈' 이야기로 세상의 구멍을 메워라 (2)

- 뉴욕과 올리버 색스 -




❙ 무(無), 기력


올해 초, 내 몸이 파국을 맞았다. 수면 부족, 열꽃, 생리 불순, 무엇보다 온 몸에 기력이 없었다. 지하철에 몸을 던져놓고 무기력하게 되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바쁘게 살아야 하나? 그러나 질문을 더 밀고 나가지는 않았다. ‘바빠서 힘들다’는 말은 뉴욕에서 금기어다. 이 도시에는 파트타임 직업 세 개, 학교, 육아까지 동시에 해내는 ‘슈퍼휴먼’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고작 한 개 하는 학생 주제에, 피곤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저질 체력과 의지박약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게 뻔하다. 그래서 질문은 맥없는 넋두리로 변질된다. 아, 내 몸이 스마트폰이라면 배터리 충전하듯이 간단히 기력을 얻을 텐데……. 왜 뉴욕 한복판에만 나오면 기력이 방전만 되나…….



생각해보면 이 넋두리는 뉴욕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했었던 것 같다. 언제 어디서든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인은 다양할 수 있다. 경쟁 구조 사회이기 때문에, 공동체는 일거리가 많기 때문에, 혹은 재성(일 욕심)을 깔고 앉은 내 팔자 때문에……. 여하튼, 이제는 확실해졌다. 이건 몸의 문제다. 이거야말로 요즘 청년들이 무-기력하다고 구박 받는 진짜 이유인지 모른다. 말 그대로, 기력이, 없다.


하지만 나는 정말 기력을 빼앗긴 걸까? 얼마 전,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단순히 타고 싶은 게 아니라 당장 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곧바로 매장에 가서 자전거를 샀다. 그리고 아무데로나 자전거를 몰았다. 퀸즈보로우다리 위에 도착하자 옆으로는 차가 쌩쌩 달리고, 강 너머로 맨해튼과 고층빌딩이 보였다. 그 순간, 항상 내 기운을 빼앗아가는 뉴욕이 압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피곤했지만 적어도 내 몸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 타는 데 온 힘을 다 썼을 것 같은데 또 그게 아니었다. 몸 어딘가에서 기력이 솟아났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신경에도 ‘구멍’이 뚫린다


기력을 유무(有無)의 문제로 말하기는 쉽다. 청년이 노인보다 몸에 기력이 ‘더 있고,’ 아르바이트를 세 탕 뛰면 한 탕 뛸 때보다 기력이 ‘더 없다’고. 혹은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하고 싶은 일보다 기력을 ‘더 써야’ 한다고. 이렇게 표현하면 기력을 정말 내 몸의 배터리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내 몸 상태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기력 80% 남음, 50% 남음, 30% 남음……. 10% 미만일 때는 경고등이 깜빡깜빡.......


그렇다면 무기력의 상태는 기력 배터리 0% 일까? 아니다. 그렇게 단순히 양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자전거 탈 때 갑자기 기력이 솟았던 것을 생각해보자.) 무기력은 객관적인 몸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즉, 기력 없는 상태가 ‘무기력증’으로 업그레이드되려면 내가 내 몸을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도 함께 불확실해져야 한다. 몸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이 좀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몸은 늘 여기 있는데 어떻게 존재감이 없어진단 말인가? 하지만 물체의 차원이 아니라 감각의 차원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늘 똑같은 강도로 ‘살아있음’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느 때는 내 몸이 어디에 구겨져 있어도 상관없는 극도의 무관심에 빠지기도 하고, 내 의지와 내 몸이 삐거덕 어긋나면서 ‘유체이탈’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때에는 기력이 얼마나 남았느냐와 상관없이 기력을 느끼고 싶은 의지부터 없다.


그런데 감각도 과학과 실증의 영역이다. ‘무기력한 느낌’이나 ‘살아있는 느낌’은 한낱 기분이 아니라 신경이 작동한 결과다. 즉, 우리를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영혼이나 심장이 아니다. 신경이다. 신경은 뇌에서 사지말단까지, 사지에서 세상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연결 체계다. 따라서, 신경이 이상해지면 곧바로 정신적 차원에서 문제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일상을 좀먹고 있는 좀비 상태(?)도 신경 상태와 연관이 되어있지 않을까?


올리버 색스의 책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는 이 가정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때 벌어질 법한 이야기다. 사건의 전개는 이러하다. (실제 이야기다.) 색스는 산에서 야생 황소를 맞닥뜨리고서 달아나다가 무릎의 네갈래근이 파열되었다. 런던으로 실려와 수술까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다리가 회복되었는데도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이것은 다리 기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리와 다리를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사라진 것이었다. 다리를 만져봐도 아무 느낌이 없었고, 다리를 움직였던 (너무 자연스러워서 기억할 필요조차 없었던) 노하우는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아니, 다리가 아예 존재한다는 느낌 자체가 사라졌다. “다리가 사라지면서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도 가져가 버렸다.[각주:1] 의사는 다리를 움직이지 않는 색스에게 왜 이토록 무기력하냐고 물었다. 하지만 다리 전체가 ‘구멍 나고’ 말았는데, 어떻게 기력을 느낀단 말인가?


“다리가 사라지면서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도 가져가 버렸다.


신경학자인 색스는 스스로 진단했다. 이것은 자기수용감각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자기수용감각은 신경의 일종으로, 어떤 공간 내에서 몸의 위치와 자세를 인식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래서 근육감각이나 육감(肉感)이라고도 불린다. 색스는 이 자기수용감각을 일차적 인식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온몸에 뻗어서 ‘이 몸’이 ‘내 몸’이라는 확실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확실성 위에서만 행동하고, 느끼고, 사유할 수 있다. 평소에는 이 육감이 우리의 자아와 혼연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따로 자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색스 같은 병례(病例)는 숨어 있는 진실을 드러낸다. 내 몸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도,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다리 한 쪽의 자기수용감각을 잃었을 뿐인데, 색스는 덩달아 많은 것을 잃었다. 다리를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기억, 다리에 대해 가졌던 정서, ‘오른쪽 다리’라는 논리적 표상까지 몽땅 사라졌다. (다리가 건강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안 될까? 안 된다. 기억도 결국 몸이 하는 일이다. 몸이 ‘그때 그 상황’을 실감해야만 기억은 작동한다.) 한마디로, 일차적인 의식에 구멍이 나자 이를 바탕으로 쌓아올렸던 정신적 자산까지도 무너진 것이다. “고등한 의식은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모든 개념과 언어를 이용해서 이것[구멍]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쳤다. (...) [하지만] 고등한 의식은 일차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송하고 반영할 수밖에 없다.”[각주:2]


이로써 의식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몸이라는 하드웨어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억, 감정, 표상 등등의 정신활동은 ‘몸뚱이’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놀랍지 않은가? 몸은 뇌를 담는 용기가 아니다. 뇌와 마음과 지성이 통째로 녹아 있는 신비로운 통합체다. 몸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이 모든 것과 연결이 끊어진다는 뜻이다.


느낀다는 것은 신경이 작동한다는 것이고, 신경이 작동한다는 것은 몸이 스스로를 재구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살아있는 몸, 그 몸의 위치, 그리고 개인적인 공간의 상정”[각주:3]을 통합해야 하나의 몸이 느껴진다. 즉, 이 ‘몸뚱이’가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몸 스스로 매번 좌표설정을 한다. 이 과정이 나의 감각이 된다. 나의 고등한 의식이 온갖 미사여구를 끌어다가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느낌’의 실체다.


만약 감각에 문제가 생겼다면 실제로 신경에도 구멍이 뚫린 것이다. 뇌에는 신경의 흐름을 따라 그려지는 신체 지도가 있다. 색스에 따르면, 한 연구팀이 손의 감각 정보를 차단한 후 이 지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해 보았다. 그러자 뇌에서 손에 해당하는 부위가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최소한의 흔적이나 잔해도 남지 않”은 채, 손의 자리를 “신체의 다른 부위들이 급속히 차지해버린”[각주:4]것이다. 구멍이 뚫렸다. 여기가 바로 ‘손의 무기력’이 발생하는 자리다.


내 몸이 스스로 좌표설정을 할 수 없을때 '구멍'이 뚫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육체적 피로와 존재적 무기력은 확연히 구분된다. 피곤함도 하나의 느낌이다. 누구나 피곤함을 싫어하지만, 이는 최소한 신경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반대로, 무기력은 몸의 통합이 와해되고 있다는 신호다. 신경의 연결이 느슨해지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피로 때문에 무기력에 빠질 수는 있다. 하지만 잘 먹고 잘 쉬어서 육체적 피로에서 회복되었다고 해서 무기력도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건강은 배터리 충전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기계가 아니다.



❙ 조증은 건강이 아니다


신경증은 왜 발생할까? 색스도 모른다. 각자의 인생에 고난이 닥치는 방식이 다 다르듯, 그의 환자들이 병이 걸리게 된 과정에는 도무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그가 경험상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도시가 신경증환자를 배출하는 최적의 환경이라는 것이다. “뉴욕과 같은 거대도시의 이름도 모르는 길거리만큼 환자를 관찰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없다.”[각주:5]


길거리에서 보이는 뉴욕 사람들은 대부분 환자가 아니다. 나도 환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경증환자와 똑같은 생태계를 공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살인적인 삶의 조건을 초인적인 ‘몸의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다. 색스의 인식불능증 환자처럼 몸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은 없지만, 피곤함과 무기력의 문턱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증상은 이미 발현했는데 자각을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경증은 원래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감각에 장애가 있는”[각주:6]상태니까. 이것이 색스가 병례사로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일 것이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희귀병임에도 그 병이 마치 내 상태인 것처럼 느껴지고, 환자의 심정에 절절히 공감되는 것이다.


뉴욕은 신경증과 잘 어울리는 도시다. 영원히 과로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면 누구든 ‘신경질’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일의 절대량뿐만 아니라 일의 방향성이다. 색스는 각각의 몸이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고유성은 몸이 생활을 이끄는 방향에서 나온다. 건강한 몸이라면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 있든 그 속에서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연속성일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건강한 신경이다. 나의 속도로 세상을 감각하고 반응하는 힘이다. 즉, 내가 ‘나’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건 나만의 신경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욕은 좀처럼 이렇게 능동적으로 움직일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빠르다. 정보, 유행, 신제품, 주식, 집값, 유동인구 등등,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일반 사람의 감각과 사유의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게 회전한다. 이렇게 삶의 동선이 완전히 도시의 운동에 흡수되어 버리면? 신경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살아있다는 느낌도 옅어진다.


문제는 건강과 병을 논할 때 이런 ‘방향성’이 화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은 늘 양적인 수치로 환산된다. 왜 아픈가? 하는 일에 비해 몸의 기운이 부족해서다. 어떻게 치료하는가? 기운을 충전하면 된다. 무엇이 건강인가? 더 많은 일을 해내는 신체다. 이런 식의 논지는 몸이 마치 아이폰이라도 된 것처럼 취급한다. 아이폰은 대단한 제품이지만 배터리가 빨리 닳는 것으로 악명 높다. 마찬가지로, 건강해지려는 노력은 ‘보조배터리 구매’로 쉽게 오해받는다. 일에 지쳐서 남자친구에게 짜증을 낼 때, 오랜만에 본 친구가 놀자고 하는데 파김치가 되었을 때, 마침내 자유시간이 생겼는데 갑자기 남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때. 그때 기력을 급속 충전할 보조배터리가 있다면! (인간의 기계화가 곧 인간의 진화라고 믿는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나 할 법한 상상이다.) 하지만 만능의 몸이 정말 건강한 몸일까? 아니다. 에너지를 무한히 내뿜는 몸 상태는 ‘조증’이자 ‘항진,’ 혹은 ‘자발적 노예 상태’다. 일에 고유한 방향성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에너지라도 생기(生氣)는 아니다.


밤낮없이 계속해서 에너지를 내뿜는 도시, 이 안에서 사는 사람 역시 그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제일 웃긴 부분은 환자들이 기발한 해결을 찾아낼 때다. 가령, 자기수용감각의 일부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항상 기울어진 할아버지가 수평수 안경을 개발한다던지, 자기수용감각을 몽땅 잃어버린 여자가 오로지 시각으로 몸을 움직이는 훈련을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건강해지려면 이런 창의성과 독기가 필요하다. 신경-지도에 구멍이 났다면 원래대로 복구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게 늘 가능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구멍을 포함한 채 새로운 신경 지도를 그리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게 좀 어색하기는 하겠지만, 건강의 핵심은 생활을 계속 내 힘으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누구는 이를 불치병을 향한 발악이라고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색스는 니체의 말을 빌려서 이를 오히려 ‘위대한 건강’으로 격상시킨다. 이 건강은 그냥 주어진 몸의 자연 상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싸워서 매 순간 만들어내야 하는 균형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몸은 약간 덜 떨어지게 보일지 몰라도, 고유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우리도 약간씩 병든 뉴요커로서 모두 나름의 전략을 체득하고 있다. 이 살 떨리는 도시에서도 몸을 계속 움직이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경 조직이 환경에 굴하지 않고 별별 편법을 쓰면서 어떻게든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이 보기엔 약간씩 미친 짓(?)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 위대한 신경이여!



❙ 뉴욕의 병, 음악중독증


그렇다면 이제 신경의사의 눈으로 뉴욕을 바라보는 연습을 간단히 해보자. 감각을 극도로 파편화시키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병과 전략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이번에 색스의 환자들에게 영감을 얻어서 발견한 병증은 이것이다. 음악중독증.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첫 장을 장식하는 환자는 음악 선생이다. 그의 시력은 완벽했지만, 시각은 인식불능증에 걸렸다. 그래서 눈 앞의 물체를 보고도 그게 무엇인지 판별하지 못했다. 아내의 머리를 실제로 모자로 착각하기도 했다. 장미꽃를 눈 앞에서 보고도 향기를 맡기 전까지는 그게 ‘장미’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그는 이런 엄청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일상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법은 음악이었다. 음악을 틀어놓을 때마다, 이 음악 선생은 제대로 판별할 수 없는 사물들 사이에서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이 내부에서 잃어버린 연속성을 음악이 바깥에서 대체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색스 자신도 음악과 관련하여 놀라운 경험을 했다. 다리 재활운동을 하면서 멘델스존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이 음악이 머릿속에서 울려퍼질 때마다 다리에 자기수용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뻣뻣했던 다리가 앞으로 움직였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다. 삶은 계속된다. 세상은 계속된다. 음악에는 이 연속성이 구현된다. 음악에 푹 빠지면, 나는 굳이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선율과 멜로디를 통해 리듬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뉴욕 사람들이 음악 듣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음악이 들리지 않는 장소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음악은 귀 옆 이어폰에서 레스토랑 스피커까지 어디서나 울려퍼진다. 게다가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르는 EDM이다. 똑같은 리듬이 끝없이 반복되지만, 그 위에서 멜로디가 묘하게 바뀌는 장르. 쳇바퀴처럼 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그 속에서 꿈을 찾아내야 하는 뉴욕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에서 음악중독증은 병이자 살아가기 위한 전략이다.



❙ 창작은 몸-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노력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뉴욕이 예술의 도시가 된 것은 생리적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뉴욕은 망각의 힘으로 움직이는 도시다. 뉴욕의 이주민은 과거와 단절하고 새 삶을 시작할 각오로 본국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새 삶’의 순간에 자본이 개입한다. 자본주의는 과거를 지우는 운동이다. 소비 말고는 어떤 전통에도 가치를 두지 않을뿐더러, 어제의 상품을 오늘의 신상품으로 갈아치우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다. 이로써 망각은 비정상적으로 가속화된다.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새 상품을 구입하는 행동으로 빨려 들어간다. 뭔가를 기억하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말했듯이 뉴욕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 여유가 있으면 쇼핑에 다 소모된다. 과거와 결별하라, 상품으로 리셋 하라! 이 속에서 몸 자신이 ‘상품’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은 색스가 묘사했던 자기수용감각의 소멸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구멍(hole)’이라는 단어와 아마도 어원이 같을 것이다. 사실 암점이라는 구멍은 일종의 지옥으로 존재론적인 상태, 또는 형이상학적인 상태를 말하지만, 그 바탕과 결정요인은 틀림없이 유기적이다. ‘현실’의 유기적 기초가 제거되면 그만큼 사람은 구멍 속으로 떨어진다. 아니 지옥구덩이라고 할까. 사람이 이런 것을 의식하는 걸 견딜 수 있다면 말이다. (...) 암점은 현실 그 자체에 난 구멍이며, 공간 못지않게 시간에도 난 구멍이다. 따라서 정해진 기한이나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는 ‘기억의 구멍’, 기억상실 같은 성격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한 듯한 감각, 끝이 없는 듯한 기분이 든다.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2015년, 126쪽


창작은 이 존재(신경)의 구멍을 메우려는 욕망이 아닐까? 그래서 뉴욕에는 그림, 음악, 춤, 이야기마저 풍부한 것일 테다. 인간은 통합적으로 살아야 한다. 추상적인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부터가 그렇게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 이 통합성을 해친다고 느낄 때, 내 힘으로는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기분이 들 때 우리는 무기력에 빠진다.


무기력을 벗어나기로 결심하는 것은 단순히 기력을 충전시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삶에서 방향성을 실천하겠다는 뜻이다. 자본의 운동에 흡수되지 않고 삶의 방향을 틀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쉽지 않다. 차라리 무기력하게 지내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색스는 반문한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신경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지 않느냐고. 인간의 신경은 ‘자유’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다. 무기력이라는 고통이냐, 고통스러운 생기냐.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를 패러디하면서 이렇게 강조하고 싶다. 나는 감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니 힘껏 몸을 써라!)



덧, 왜 자전거를 탔을 때 나는 기력이 났을까? 색스가 말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자기수용성감각을 쓸 수 밖에 없다고. 갑자기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일리히의 구절이 생각났다. 그렇다. 자전거는 내가 만들어내는 속도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행복이 온다. 진공청소기처럼 생기를 빨아들이는 이 뉴욕에서 행복해지는 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_김해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 10점
올리버 색스 지음, 김승욱 옮김/알마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 10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알마


  1. 각주 1) 올리버 색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알마, 2012년, 97쪽 [본문으로]
  2. 각주 2) 같은 책, 283쪽 [본문으로]
  3. 각주 3) 같은 책, 282쪽 [본문으로]
  4. 각주 4) 같은 책, 274쪽 [본문으로]
  5. 각주 5)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2015년, 235쪽 [본문으로]
  6. 각주 6) 같은 책, 10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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