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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뉴욕과 허먼 멜빌② 콘크리트 심해에 숨겨진 고래 찾기

by 북드라망 2016. 7. 29.


콘크리트 심해, 그 신화를 찾아서 (2)
: 뉴욕과 허먼 멜빌





❙ 콘크리트 정글의 파(派)


뉴요커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뉴욕을 극도로 사랑하는 도시파, 뉴욕을 극도로 싫어하는 자연파. 도시파는 뉴욕의 돈이 만들어내는 자유를 좋아한다.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욕망이 숨 쉴 틈새공간이 생긴다. 뉴욕처럼 다양한 인종, 직업, 성별, 취미에 개의치 않는 곳은 없다! 그러나 자연파는 뉴욕에서 화폐를 얻기 위해 치러야하는 대가를 끔찍하게 여긴다. 그들의 목표는 돈을 모아서 뉴욕을 탈출하는 것이다. 여유로운 자연(교외) 생활이 목표다.


이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물을 수 있다. 나는 도시파인가, 자연파인가.


나는 어느 쪽도 아니다. 굳이 말하면 내 일상이 곧 뉴욕이라고 믿는 ‘생존파’다. 완벽한 일상이란 없고, 일상의 뉴욕은 늘 이 양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운동 속에 은근슬쩍 감춰진 모순이다. 이것은 무려 우주적인(!) 모순이다. 원래 자연 생태계는 다양할수록 살기 좋은 곳이다. 다양성은 생명의 원리다. 다양한 생명들 사이에서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다. 그런데 도시 생태계는 다양해질수록 거꾸로 삶의 진액을 바싹 말려버린다. 뉴욕이 번창할수록 물가는 비싸지고, 사람들은 다양성을 즐길 새도 없이 일을 한다. 이 운동은 말 그대로 형용모순이다. 왜 인간은 이렇게 전도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왜 자유를 찾아온 젊은이들은 뉴욕의 밑바닥 노동력으로 전락해야만 그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것일까?



❙ 뉴욕의 ‘대칭성’ 신화


지구의 입장에서는 도시파니 자연파니 싸우는 게 우스울 것이다. 결국 지구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생물학자 제렛 베르메이는 요즘 과학자들이 도시에만 살아서 자연에 대한 진짜 감각을 잃었다고 꼬집는다.


“그렇다, 우리는 아주 강력하고, 지구상의 다른 생물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주장해야겠다. 이런 거대한 힘과 범위 때문에 우리가 기타 생명체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규칙을 가지고 경제적인 삶을 운영하도록 허락 받은 적은 없다.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총합과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다.”[각주:1]


우주의 스케일에서 생각해보자. 인간의 경제와 자연의 경제는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노동 분할, 글로벌 무역, 정보 교환, 이런 활동도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게 아니다. “애벌레는 어른 인간이 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경제적 역할을 맡고 있”고, 세포 속 유전자는 어린 학생처럼 “환경과 직접 소통하고, 배우고, 응답하는 생명체의 능력 덕분에 풍성해진다.”[각주:2] 자동차나 핵폭탄도 자연의 물리 법칙을 벗어나서는 이용할 수 없다. 카메라 렌즈를 우주로 줌아웃 한다면 지구에서는 무엇이 보일까? 에너지의 흐름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상의 스케일에서는 이 연속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왜 지구-경제의 에너지가 ‘뉴욕(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구역)’에만 흘러들어오면 불연속성이 생길까?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것이 ‘문화와 자연 사이의 대칭성’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본디 모든 지구상 권력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에 생장소멸을 일으키는 힘은 자연 뿐이고, 생명체는 그 역능을 잠깐만 빌려올 뿐이다. 인간이 특별한 까닭은 이 관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물체와 물체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유동적 지성, 즉 마음이 있다.[각주:3] 자연은 모두가 모두를 먹고 또 먹힘으로써 연결되어 있는 세계다. 나는 홀로 나일 수 없다는 것. 마음은 이 연결을 직시하고, 세상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 문명’은 이 대칭성을 깨끗이 무시한다. 국가는 자연의 힘을 독점했다. 게다가 이것은 ‘국가(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힘을 둘러싼 의미와 관계까지 독점했다. 여기 포섭되면? 문명에서 권력이 나온다고 오해하게 된다. 자연과 접속하는 마음의 능력까지 잃는다.


이제야 뉴욕의 모순이 이해된다. 뉴욕은 대칭성이 가장 극도로 무너진 도시이며, 또 자연의 권력을 가장 극도로 독점한 공간이다. 그렇다. 다른 도시에 비하면 뉴욕에 다양한 욕망이 서식한다. 하지만 실제로 다양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은 자본의 활동이다. 인간은 이 활동을 위한 원재료일 뿐이다. 자본에 삼켜진 인간은 정체성조차 갖지 못한다. (소비자니 노동자니 하는 이름표도 자본을 유통시키는 두 개의 스위치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자본에 팔지 않으면 ‘다양성’이라는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기 어렵다. 이 서글픈 사실 앞에서는 도시파니 자연파니 하는 구별이 무색해진다. 자연을 모방한 자본-자연의 감옥! <총, 균, 쇠>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서는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이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당신네 백인들이 만든 그런 물건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뉴욕 백수가 다큐멘터리 <뉴욕>을 찍는다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 근대인들은 지구상에 이처럼 괴상망측한 생태계를 창조한 겁니까?”


멜빌은 누구보다도 일찍 이 질문을 던졌다. 『모비딕』은 19세기 신화라고 불리는 항해 모험소설이다. 하지만 멜빌이 맨 땅에 헤딩하듯이 오직 상상력만으로 이 ‘신화’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뉴욕은 멜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현장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부터 자신의 출판 실패까지, 뉴욕은 항상 멜빌을 삶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당시 뉴욕은 금융 도시로 눈부시게 비상하고 있었다. 『모비딕』은 이 순류(順流)에 대한 조용한 반기다. 포경선 피쿼드 호는 뉴욕을 떠난다. 하지만 배가 망망대해에서 자연의 무소불위 폭력에 노출될수록, 주인공 이스마엘의 시선은 떠나온 뉴욕으로 늘 되돌아간다. 피쿼드 호가 멀리 떠날수록, 뉴욕은 더 먼 바다와 연결된다. 이 여정 속에서 뉴욕이 어떤 힘을 자연에서 빌려왔는지 명백히 드러난다. 그래서 『모비딕』은 ‘신화’다. 신화의 역할은 문화와 자연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니까.


그렇게 바다에서 뉴욕은 어떻게 보일까? 주인공 이스마엘이 화끈하게 답한다. “어느 누가 벌레처럼 육지를 향해 기어가고 싶어 하겠는가! 무시무시한 것들의 공포! 이 모든 고통이 그렇게 헛된 것인가?”[각주:4] 자, 이 정도면 『모비딕』의 출발점은 아주 명백하다. 무너진 뉴욕의 대칭성을 회복시켜줄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림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가 그린 <포경선>.



❙ 노예, 우주의 티끌이 되다


책의 첫 장에서 이스마엘은 이렇게 고백한다. 자살충동이 들 때마다 바다에 나간다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마다 항해를 “권총과 총알 대신”으로 삼는다니, 그 우울함의 깊이를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자살충동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뉴욕이다. 뉴욕 내에서도 아주 구체적인 장소다.


“꿈꾸는 듯한 안식일 오후의 도시를 거닐어보라. 콜리어스 곶에서 코엔티스 선창까지 걸어간 다음, 그곳에서 화이트홀을 지나 북쪽으로 걸어가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시내 곳곳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말없는 보초병처럼 서서 바다에 대한 몽상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5]


콜리어스 곶, 코엔티스 선창, 화이트 홀. 여기는 월가다. 이 주변에는 뉴욕이 항구 도시였던 시절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러나 월가가 금융 도시로 변모한 당시, 여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바다와 아무 관계도 없다. “이들은 모두 뭍의 인간이다. 평일에는 욋가지 지붕과 회반죽 벽 안에 갇힌 채 계산대에 묶여 있거나 의자에 박혀 있거나 책상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다.”[각주:6] 그런데 이들이 할 일도 없는 일요일 오후에 거리로 나와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왜일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뭍의 가장자리에서 멍하니 물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이들이 원하는 건 둘 중 하나다.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거나, 혹은 (바다로 항해해) 떠나거나. 이 한 줄로 월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 상태가 요약된다. 다들 죽지도 떠나지도 못 한 채 “모든 사람이 돌아가면서 때리고 맞는”[각주:7]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 돈 한 푼 없는 이스마엘조차 이런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스마엘은 뉴욕을 떠나 포경선에 취직한다. 그렇지만 ‘뭍의 노예 생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배의 인간관계는 인간 사회가 연장된 것이다. 게다가 배는 고립된 환경이기 때문에, 선장의 독재와 폭설이 더 심각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마엘은 행복하다. 이 우주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느냐고 쿨하게 넘기기까지 한다. 도대체 왜일까? 장소와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고 또 피할 필요도 없는 새로운 굴레를 이스마엘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굴레란 바로 이 바다 위에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한낱 인간’ 자체다.


“지금 그대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란 부드럽게 흔들리는 배가 나누어준 그 흔들리는 생명뿐이다. 배는 그 생명을 바다에서 빌려 왔고, 바다는 그 생명을 신이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한 조류에서 빌려 왔다. 하지만 이 잠이 계속 되는 동안, 이 꿈이 그대에게 머물러 있는 동안, 그대의 발이나 손을 조금만 움직여보라. 모든 것을 움켜잡았던 손을 슬쩍 놓아보라. 그러면 그대의 정체성이 무서운 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대는 (...) 그 투명한 공기를 가르며 여름 바다로 떨어져, 다시는 영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각주:8]


2015년에 개봉한 영화『하트 오브 더 씨』 중의 한 장면. 『모비딕』을 탄생시킨 에식스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깨달음은 이스마엘을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강하게 만든다. 뉴욕에서나 바다에서나, 그는 여전히 세파에 휩쓸리는 약한 개인이다. 자본주의의 급류에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 배를 덮친 태풍에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 (누가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최소한 망망대해 우주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 직업, 스펙, 상품만 가지면 삶은 안전하다,’ ‘이런 상품을 제공받으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식으로 시간이 지나면 들통 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의 힘을 빌려 태어났다. 그러니 그 힘으로 고통 받고, 휘청대고, 스러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항상 배부르고 즐거울 수 없는 것도 당연하며,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바다에서 고래를 잡고 있을 때나 집에서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각주:9]때나 우주적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위험을 가로지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이 대견하지 않은가. 죽을 뻔한 일이 닥치더라도 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아닌가. 이 자신감이 ‘뭍의 노예’와 ‘우주의 티끌’의 차이다.


필연과 우연은 우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두 가지 리듬이다. 그렇지만 이 리듬을 가지고 실제로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개인의 힘이다. 이것이 자유의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각주:10] ‘티끌’은 ‘노예’가 갖지 못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살아 있는 한, 자살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 역사, 해저에 가라앉다


이스마엘은 망대에서 망을 볼 때 자주 몽상에 빠진다. 밥값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다가 불러일으키는 영감을 거부하지 못한다. (보라는 고래는 안 보고!) 그도 그럴 것이, 바다는 무의식을 닮았다. 방향 없이 출렁이는 파도, 심해에서 헤엄치는 괴물, 시공간 제약 없이 온 지구를 휘젓는 조류. 바다는 뭍의 물리 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무의식이 의식의 당위성을 거부한 채 세상과의 연결을 갈구하는 것처럼.


뉴욕에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세뇌당하는 ‘상식’이 있다. 바로 백인의 자부심이다. 뉴욕은 세상의 모든 테크놀로지가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고,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문명을 세운 곳이며, 미국 내부로 뻗어나가는 길이 출발한 시작점이라고. 이 자부심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위계가 세세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백인과 비백인, 근대와 비근대, 산업화와 개발도상. 뉴욕은 다양성의 도시라고 자랑하지만, ‘다양성’을 축적한 권력은 이 위계를 발 딛고 서 있다. (이제는 뉴욕이 옛날만큼 최첨단에 서 있지 않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른 ‘뉴욕’이 다른 장소에 상정된다. 서울이나 도쿄, 혹은 상해가 21세기 아시아인의 ‘뉴욕’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스마엘은 망대 위에서 이 위계를 시원하게 부정한다. ‘백인의 승리의 기억’을 노예 만들기의 기억이라고 뒤집어버린다. “노예의 발꿈치와 말발굽이 남긴 자국으로 뒤덮인 그 평범한 도로를, 온통 도로로 뒤덮인 육지를 나는 얼마나 경멸했던가!”[각주:11] 그의 경멸은 바다와 만나면서 우주적 지지를 얻는다. 이 세상에는 ‘뭍’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3분의 2는 여전히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굴러가는 바다다.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젖먹이나 다름없는 인류가 제아무리 자신의 과학과 기술을 자랑하고 장차 그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진보한다 해도, 바다는 최후의 심판일까지 영원히 인간을 모욕하고 살해하며,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당당하고 견고한 군함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릴 것이다. (...) 오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노아의 홍수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세계의 3분의 2는 아직도 홍수에 뒤덮여 있다. (...) 바다의 모든 생물이 가진 서로 먹고 먹히는 살상 습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모든 바다 생물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영원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각주:12]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땅과 땅 사이에 바다가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땅을 압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세다. 대륙도 궁극적으로 큰 섬인 셈이다! 이 섬 밖에서는 경계선을 그어 나와 타자를 분별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바다에서는 여전히 태초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먹고 먹혀,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끊임없이 섞이는 과정 속에는 위계가 없다. 이것이 ‘야만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문명인’인 인간은 이 바다를 오늘날까지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고로, 바다의 힘은 야만이 아니라 ‘야생’이다. 우리도 원래는 바다에서 왔다. 지구의 생명의 역사는 물에서 시작되었다. 그 중 몇몇 종이 진화하여 뭍으로 나와, 뭍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 자본, 고래에 무너지다


뭐니 뭐니 해도 『모비딕』의 진수는 ‘모비딕’과 에이허브 선장의 콤비다. 모비딕은 악랄하기로 유명한 향유고래다. 포경선을 계획적으로(?) 들이받아서 침몰시키기로 유명하다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허브는 이 범죄의 희생자였다. 과거에 포경선을 몰다가 모비딕에게 다리 한 쪽을 잃은 것이다. 그 후로 에이허브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오직 모비딕을 죽이기 위해서 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성격 나쁜 할아버지가 고래에게 앙심을 품은 이야기 같다. 그런데 이 정도의 앙심은 근대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에이허브는 포경업자로서 모비딕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비딕’이라는 고래를 죽이기 위해서 포경업을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 순간, 에이허브는 자기 의사와 상관 없이 졸지에 ‘반자본주의적’ 인간이 된다.


포경업의 논리는 모든 고래를 죽여서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 당시 뉴욕을 비롯한 뉴잉글랜드는 포경업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고래는 곧 기름이었다. 백열전구가 활발히 상업화되지 않던 시절, 기름은 밤에 불빛을 키는 유일한 원천이었다. 선원들은 도시의 불빛을 키기 위해 전 세계 바다를 헤집고 다녀야 했다. 고래는 보기 드문 동물이었고, 또 가장 거대한 동물이었다. 그래서 포경업은 목숨 걸어야 하는 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포경업의 자본에는 고래와 인간의 피가 양쪽 다 묻어 있었다. 그런데 에이해브는 이 배치에서 갑자기 벗어나 버린다. 이제부터는 돈이 아니라 무형의 가치를 쫓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비딕이라는 고래는 갑자기 ‘기름’이 아니라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각주:13]이 된다. 고로, 피쿼드 호의 출항은 아주 특이하다. 자본의 물욕과 자연의 광기가 서로 뒤섞이면서 경쟁하는, 기가 막힌 질주가 시작된다!


도대체 모비딕이 뭐기에? 에이허브는 모비딕의 행동을 ‘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의 고백에 귀기울여보면 뭔가 이상하다. ‘악’에 대비되는 ‘선’이 따로 없는 데다가, 왠지 에이허브 자신도 그 ‘악’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자네는 좀 더 낮은 층을 볼 필요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야. 하지만 어떤 경우든, 특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정한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그 엉터리 같은 가면 뒤에서 뭔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그러나 합리적인 무엇이 얼굴을 내미는 법이야.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각주:14]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뒤쫓는 이유는 위 인용문 마지막 줄에 나와 있다. 모비딕은 그냥 고래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 즉 자연이다. 이 힘은 한낱 인간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무한하며, 인간의 삶을 얼마든지 망가뜨릴 수 있다. 에이허브는 이 힘을 ‘악’이라고 지칭하지만, 또한 이 힘을 따라가려면 인간 사회가 설계한 ‘엉터리 가면’과 ‘죄수의 감방벽’을 뚫고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묘하게도, 모비딕을 향한 추적은 해방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어쩌면 에이허브에게 악이란 모비딕이 가시화한 ‘벽’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뭍의 삶, 혹은, 뉴욕의 삶이 자본으로 꽁꽁 묶어버린 존재의 초라함. 이것처럼 악한 게 또 있을까.


에이허브의 최고의 공적은 선원들 모두를 감화시켰다는 것이다. 선원들의 동기는 간단하다. 돈을 버는 것이다. 이들은 작살 하나로 고래와 대면하는 전사들이지만, 그 용기를 돈 버는 데에만 활용해왔다. 그러나 이들도 에이허브의 뜨거운 광기에 마음을 바꾼다. 결국 피쿼드 호에서 야생의 감각이 자본을 이겼다. 그 순간 피쿼드 호는 더 이상 포경선이 아니다. 뭍 사람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대칭성의 세계, 자연의 힘을 쫓는 탐사선이 된다. 설사 그 힘에 의해 최후에 파괴되더라도 이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어떤 월가 노동자의 일상보다 생생한 죽음이다.




❙ 핏기 없는 종족의 몰락


이십대 청년 멜빌은 포경선에 올라탔다. 그러나 그의 항해는 바다에서 계속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뭍’으로 돌아왔다. 평생 혐오했던 뉴욕의 월가에 머무르면서 멜빌은 글을 쓰고, 출판을 거절당하고, 돈을 벌었다. 멜빌이 삼십대 때 쓴 『모비딕』은 출판 후 수산물 분야에 전시되는 치욕을 겪었다. 멜빌은 죽을 때까지 글쓰기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바다를 계속 항해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가 행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그가 일찍이 예견했고 명민하게 비판했던 불행 속에 갇혔다고 봐야 한다. 마치 멜빌의 또 다른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바틀비처럼! 바틀비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투쟁꾼(?)이다. 상사가 무엇을 요구하든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만 대꾸하면서, 죽어라 베껴 쓰는 일만 고집했던 필경사. 그는 결국 베껴쓰는 일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구치소에서는 음식까지 거부하다가 죽는다.


멜빌은 자신을 포함하여 문명인들을 “핏기 없는 종족”이라고 부른다. 그 종족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균질화된 재료로 전락하지 않고, 어떻게 ? 멜빌이 열어준 비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대꾸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이스마엘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콘크리트 심해에 숨겨진 고래 찾기. 아마도 멜빌은 이를 애타게 바라며 『모비딕』을 썼을 것이다.


“앞으로 고도의 문화를 가진 어느 시적인 민족이 타고난 권리를 되찾아 옛날의 쾌활한 오월제 신들을 되살려, 오늘날의 이기적인 하늘 아래, 신들이 사라진 언덕에 그 신들을 다시 앉힌다면, 거대한 향유고래는 반드시 제우스처럼 높은 자리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각주:15]


글_김해완

모비딕 - 10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작가정신



  1. 각주 1) Geerat J. Vermeij, 〈Nature: An Economic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p.39 [본문으로]
  2. 각주 2) 같은 책, p.46,48 [본문으로]
  3. 각주 3)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005, 91~92쪽 [본문으로]
  4. 각주 4) 허먼 멜빌, 김석희 역, 작가정신, 『모비딕』, 2016, 152쪽 [본문으로]
  5. 각주 5) 같은 책, 31~32쪽 [본문으로]
  6. 각주 6) 같은 책, 32쪽 [본문으로]
  7. 각주 7) 같은 책, 35쪽 [본문으로]
  8. 각주 8) 같은 책, 211쪽 [본문으로]
  9. 각주 9) 같은 책, 354쪽 [본문으로]
  10. 각주 10)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북드라망, 2013, 31쪽 [본문으로]
  11. 각주 11) 허먼 멜빌, 김석희 역, 작가정신, 『모비딕』, 2016, 99쪽 [본문으로]
  12. 각주 12) 같은 책, 346~347 [본문으로]
  13. 각주 12) 같은 책, 243쪽 [본문으로]
  14. 각주 13) 같은 책, 217쪽 [본문으로]
  15. 각주 14) 같은 책, 42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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