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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가장 낮은 곳’부터 마비시키는 시대 : 뉴욕과 이반 일리히 ①

by 북드라망 2016. 10. 28.

'가장 낮은 곳'부터 마비시키는 시대 ①
: 뉴욕과 이반 일리히




삼 년 전, 계획에도 없었던 뉴욕행을 떠나 팔자에도 없는 대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일차적인 까닭은 비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심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세계 각국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과 공부해 보겠느냐는 기대도 있었다. 그 기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중졸 백수에서 뉴욕 유학생으로 신분 상승(?)하기 위한 댓가를 치를 수 없었을 것이다. 무려 미국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으니 말이다. 슬프게도,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교는 검정고시 준비보다 더 재미없었다. 수업은 수동적이었고, 교과서는 건조했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우정을 쌓을 시간조차 없었다. 


바람처럼 사라지자!


학교는 국적과 상관 없이 문제인 것일까? 아니, 정말 문제는 나였다. 고등학교를 자퇴했었으면서도 여전히 학교에 헛된 기대를 걸고 또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다니, 나는 참으로 오만하고도 멍청했던 것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이었다. ‘나의 모교’는 그들이 애초에 약속했던 교육 철학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미국 사회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는 것. 그렇다. 우리 학생들은 인종과 전공과 수업을 불문하고 ‘평등하게’ ‘아메리칸 드림’을 교육받는다. 내가 지난 이 년 간 모든 수업시간마다 익혔던 소리 없는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그대는 여기 미국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이 수업에서 A+만 받는다면.”



생계형 학교의 비전: 스마트한 생존법


학교에서는 지성을 배우지 않는다. ‘생존법’을 배운다. 이 세상에서 권력과 자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그 장(場)에 진입할 팁을 얻는 곳이 학교다. 요즘은 학교에서 A+를 받아도 경쟁하기 힘들다는 말이 많아졌다. (사실 일자리가 A급 학생의 숫자보다 적어진 것 뿐이지만.) 그렇다면 학교는 이제 신뢰를 잃었을까? 아니다. 이제 학교는 ‘A+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수업내용으로 삼는다. 그리고 ‘A+ 이외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공부하여 A+ 성적을 받으라고 한다.


이런 교육을 처절하게 펼치고 있는 곳이 바로 나의 학교다. 이곳 라과디아 대학교는 뉴욕 시립대(CUNY)에 속해 있는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다. 쉽게 말하면 ‘생계형 대학교’다. 뉴욕에서 등록금이 가장 싸고 입학도 가장 쉽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애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왜일까? 이곳은 그냥 학교가 아니다. 법의 보호와 사회의 인정을 받는 영역 중에서 가장 ‘밑바닥’이다. 맨 몸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뉴욕에서, 커뮤니티 칼리지란 사회에서 밑바닥으로 추락한 자와 그래도 신분 상승이 가능한 자를 가르는 마지노선이다. 이 얄팍한 보호막 아래에 뉴욕의 온갖 이민자가 모인다. 어떤 네트워크도 없이 막 미국 사회에 떨어진 사람, 돈이 없어서 4년제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었던 사람, 뒤늦게라도 단순노동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야간 수업을 들으러 오는 사람 등등. 이 중 많은 사람들은 ‘학생’이라는 신원이 없다면 뉴욕에서 일회용 노동력으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


흙수저는커녕, 물려받을 수저조차 없는 자들. 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나 같은 불평분자는 온실 속 화초 취급당한다. 이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학교에 오는 것이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는 공자님 말씀을 따르러 오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다. 이 요구가 그 어느 곳보다 간절하기에, 우리 학교는 (고작 커뮤니티 칼리지 주제에!) 발 빠르게 최신 트랜드와 교육 과정을 접목시키고 있다. A+학점을 받을 기회, 그리고 시장에서 나를 잘 포장하는 +a(플러스 알파)의 요령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 아래에서 말이다.


오라! 미국으로!


요새 우리 학교가 ‘+a’로 부르짖고 있는 슬로건은 바로 ‘스마트한 생존’이다. 전공을 불문하고 이 시대에 먹고 살 길은 테크놀로지와 어떻게든 연관되는 길 뿐이라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최신 경향을 공부하는 수업은 의무 교양이 되었다. 각 전공도 테크놀로지와의 관계에서 재정의되었다. 이런 노력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학교가 ‘생존법’이라고 제시한 동아줄이 정말 튼튼한지 썩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학생, 선생 모두가 믿고 있다. 교육의 ‘신분 상승’ 효과는 천천히 나타날 것이다. 가령, 멕시코 이민 가족이 있다고 해보자. 할아버지는 스페인어 밖에 못하고 컴퓨터도 쓸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부정확한 영어를 구사하고 구시대적 가치관에 매여있다. 아들은 대학에 가서 영어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스마트폰으로 사업을 구상한다. 교육자는 말할 것이다. 세대가 거듭될 수록 ‘발전’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 가족 전체가 ‘아메리칸 드림’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두고 상승은커녕 타락이라고 일찍이 말했던 사제가 있었다. ‘생존’이라는 단어조차 ‘생(生)’을 누리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뉴욕이었다.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다가, 나중에는 학교를 비롯하여 근대의 모든 ‘테크놀로지’를 공격했던 신부. 이반 일리히다.



뉴욕의 가장 낮은 데 임하소서


1951년, 25살의 청년 일리치가 로마에서 뉴욕에 왔을 때 그는 사제가 아니었다. 연구자였다. 중세 신학자인 대성인 알베르투스(Albert the Great)의 연금술을 박사학위 주제로 삼고 싶어했는데, 프린스턴 대학에 좋은 자료가 많다고 하여 대서양을 건너온 것이다.


이반 일리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사실 그는 로마 바티칸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게임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사제가 되자마자 사제의 둥지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떠나면 된다. '도주'는 일리히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략이자 학교를 이용해온 방식이었다. 일리히는 파시스트 정권이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유대인의 피가 섞인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났다.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가짜 신원을 만드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중반까지 신원을 바꿔가며 네 군대의 대학을 전전했다. 플로랜스에서는 분자학을, 로마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찰스부르그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진짜 신원을 되찾기 위해 또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위장 취업이 아니라 위장 학업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이렇게 긴박한 와중에도 몇 개의 외국어를 익히고 또 자신의 공부 분야를 깊게 팠으니, 일리히는 확실히 천재다. 『이반 일리히와의 대담』을 쓴 데이비드 카일레이도 그 당시의 일리히를 앞길 창창한 “교회의 왕자” (David Cayley, 『Ivan Illich in Conversation』, Anansi, p.5, 2007) 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바티칸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이 천재적인 젊은 신학자는 ‘전문 홈리스’이기도 했다. 7년 간 파시스트의 감시를 피해 유럽을 각지를 떠돌아다닌 경력이 있는데, 수 틀리면 또 어디로든 못 떠나겠는가? 일리히가 뉴욕의 학교로 온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행보였다. 뉴욕은 원래 도주자가 모이는 땅이다. 그리고 새 땅에서 가장 안전하고 또 안정적으로 자리잡는 법은 학교의 그늘로 숨는 것이다. (오늘날도 학생비자는 가장 편리한 신분 유지 수단이다.)


그런데 뉴욕에 도착한 첫날,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그날 일리히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함께 했다. 그때 지인은 곧 이사를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왜인고 하니, 남미 푸에르토리코에서 새 이민자가 끝없이 들어와서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흑인 가정부도 끼어들었다. “그들이 들어와서 우리도 할렘을 떠나야 할 판이에요.” (같은 책, p.84)


뭔가에 홀린 것일까? 바로 그 다음날 일리히는 이틀 동안 푸에르토리코인의 재래시장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가톨릭 사무실에 연락하여 푸에르토리코 교구에 사제로 임명해달라고 청한다. 프린스턴 대학에 가기도 전에 박사과정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는 도대체 왜 이렇게 즉흥적인 결정을 내린 것일까? 40년이 흐른 후, 카일레이와 인터뷰 할 때 일리히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스페인어로 대답한다. “Porqué me da la gana(그것이 내게 욕망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덧붙인다. “이건 [영어로] 번역할 수가 없어요. (...) 영어는 가슴으로부터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하질 않아요. 배꼽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낌조차도요.”(같은 책, p.85)


 영어로는 포착할 수조차 없는 열망. 누구는 이것을 종교적인 영성으로 해석할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윤리 구절이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이렇게 예수는 누군가의 헌신에 따라서 가장 낮은 곳이 가장 높은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전복을 보여주었다.


뉴욕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가장 늦게 도착한 자다. 일찍 온 이민자가 그 다음 이민자를 착취하는 것이 미국의 생리이고, 모든 이민자가 뉴욕은 그 생리가 가장 노골화되는 땅이다. 미국에서 몇 백 년간 핍박받았던 그룹 중 한 명인 흑인 가정부마저 독한 말을 내뱉었을 때, 일리히는 “배꼽 아래에서부터” 기독교인의 사명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1950년 대 뉴욕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자는 푸에르토리코인이라는 것을.



밑바닥, 이중으로 마비되다


그러나 사회의 밑바닥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 ‘피해자’를 무조건 ‘돕겠다는’ 의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곳의 문제는 이중의 덫이다. 첫 번째 덫은 현실적인 가난이다. 영어를 못하는 빈털터리 푸에르코리토인이 뉴욕에 떨어졌을 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그는 ‘비참한 삶’의 코스를 차근차근 밟게 될 것이다. 이 고생길을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내 자식이라도 메이저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싹튼다. 그런데 이것이 두 번째 덫이 된다.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모두가 말하는 때, 정작 이 드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가장 강렬하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것이다. 이민자들은 아무것도 가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정이 조금만 나아져도 훨씬 더 크게 체감한다. 미국이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지언정, 이민자 1세대에게는 자기가 떠나온 본국보다는 더 견딜만 하다. 취업이 잘 안 될지언정, 이민자 2세대에게는 최소한 자기 부모님보다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 같다. 


세대를 거듭한, '이민'에 기원한 뉴욕의 역사


여기서 뉴욕과 이민자는 기묘한 착취 관계에 동의하게 된다. 뉴욕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민자의 문화와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유일무이한 도시’라는 명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착취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거꾸로 ‘유일무이한 도시’의 명성을 열렬히 믿는 이민자들이다. 더 희망 때문에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자발적으로 뉴욕의 밑바닥 노동시장에 걸어 들어온다. 이처럼, 변두리 혹은 밑바닥에는 극도의 착취와 자발적 복종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사제가 해야할 역할은 무엇일까. 이들을 사회의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 아래 운영되는 ‘커뮤니티 칼리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방법일까? 이들을 정말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일리히는 교회를 중심으로 푸에르토리코인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오 년 후, 푸에르토리코 본토에 있는 기독교 대학 부총장 자리 제안을 받아들인다.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인을 도와주려고 하는 종교인과 사회봉사자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 푸에르토리코에 가서 일리히가 교육한 것은 선교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학교를 지휘하는 ‘부총장’으로서, 그는 제1세계와 제3세계, 그리고 학교 사이의 역학관계를 똑똑히 목격한다. 학교야말로 이중 마비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지였던 것이다!


일리히는 이제 모든 상식을 뒤집는다. 학교에 가지 못해서 가난한 게 아니라, 학교에 가야한다고 믿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학교는 생존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생존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경제학자들이 퍼뜨린 ‘필요와 공급’의 신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세상의 물자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만인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경쟁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이것은 만들어진 현실이다. 실제 현실에서 사람들은 ‘필요’를 강매당하고 있다. 근대 제도의 목적은 인간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신체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필요’를 느낀다. 무능력해지면 무능력해질수록 필요한 것도 늘어난다.


[우리는]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현대의 이 새로운 무력함은 너무나도 깊이 경험되는 것이라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개인의 재능과 공동체의 풍요, 그리고 환경 자원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의 특이한 무능이, (...) 전문가가 고안한 상품들이 문화적으로 형성된 사용가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이반 일리히, 허택 역,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느린걸음, 6~7쪽, 2014


푸에르토리코인이 뉴욕에 올 때, 그들은 ‘착취의 장’ 뿐만 아니라 이 ‘무능의 장’에 들어오는 것이다. 학교는 이 무능의 입구다. 이들이 이곳에 안착하여 세대를 늘리면 늘릴수록, 아래 세대가 학교에 가면 갈수록,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지기는커녕 푸에르토리코의 문화만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려고 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최선을 다해 ‘아래’에 남아서 새 삶을 꾸려야 하지 않을까. 학교가 가르쳐주지 않는 방식대로 말이다.



근대인 그리고 시그널인(人)


언젠가 일리히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독특한지 깨달았다고. 일상에 철학을 녹여냈던 문화는 사라지고, 인간의 사지능력은 마비되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독특한가? 우리는 오늘날 일리히가 비판했던 무능한 근대인이 무감각한 시그널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신호에만 반응하는 신체가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공통점이 있다. 시그널인을 재생산하는 곳은 여전히 학교다. 학교가 내세우는 레퍼토리도 똑같다. 과거에는 졸업장이 있어야 ‘필요’를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면, 지금은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고 말한다. 학교와 존재의 빈곤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듯하다. 60년 전 일리히가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인과 살면서 목격했던 삶 역시, 오늘날 그 이민자의 후손에게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이 년간의 학교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세미나는커녕 북클럽 하나 없는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도대체 왜 여기 있는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 있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어느 시대를 어떤 몸으로 통과하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었을까? 역시 진실은 낮은 곳에, 변두리에 있는 모양이다. 테크놀로지와 일리히의 사상, 그리고 뉴욕 학생들의 교차로는 다음편에서 계속 이야기하겠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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