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로 자립하기 - 20세기적 공부를 넘어서
보통, 대부분의 사람은 ‘저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이렇게 상상한다.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쌓아 놓고 책을 읽고, 정리하고, 외우고, 또 글을 쓰는 생활을 반복할 거라고. 실제로 고시를 공부하거나 입시 준비를 할 때 온종일 앉아서 책만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한 때 편입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온종일 공부하느라 말을 안 해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경험을 한 적도 있고, 공부하느라 끼니를 거른 적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백수들의 공부 방법은 매우 역동적이다. 목소리가 쉴 때까지 뜻도 모르는 책을 고래고래 낭송하는가 하면, 책을 무작정 베끼기도 한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공부’를 하고 있지만, 책상 앞에 않아 있는 시간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류시성·송혜경 외 13명의 청년백수, 『청년백수 자립에 관한 한 보고서』, 132쪽
‘공부’, 라고 한번 말해보고 눈을 감으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지……. 나는 어두운 방, 스탠드가 켜진 책상 앞에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고 메모하는 누군가가 떠오른다. 이렇게 ‘공부’의 이미지에는 어둠, 책과 책상, 열중이 결합되어 있다. 거기에 하나만 더 하자면,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거기에는 항상 어떤 ‘목표’가 깃들어 있다. 바라는 무언가를 이루려면 ‘공부’해야 한다. 나는 이게 ‘공부’에 관한 전형적인 20세기적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공부’와 ‘학력’과 ‘출세’가 등치되어 있는 입신(立身)과 출세(出世)의 길 말이다.
공부로 입신하고, 출세하고!…, 하던 시절이 있었지
재미있게도(?) 요즘 TV에서는 그런 전형적인 이미지의 몰락이 자주 나온다. 친구에게 돈을 받고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다가 걸린 고관(高官)들의 이야기나,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출세는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희망으로 가득 찬 판타지가 막을 내리자, 다크 판타지가 득세하는 건가 싶다.
안타깝게도 공부와 출세가 등치되는 시대, 아닌 말로 가방끈의 길이에 비례해서 삶의 안정성이 높아지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솔직히 그런 시대가 과연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여하간, 그런 세상이 저무는 것과 동시에 ‘공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동시에 떠오르던 이미지도 박살나고 말았다. 혼자 가만히 앉아 말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들을 머릿속에 우겨넣는 공부를 지탱하던 ‘목표’가 박살나버렸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생각하건데, 어떤 삶이건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더 절망적인 것은 무엇을 하면 무엇을 얻는다 하는 인과마저도 사라진 듯 하다.
정리하자면, 엎어치나 매치나 20세기적으로 잘 사는 길이 막혀버린 시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때보다 공부하기 좋은 시절이 없다. 아, 말을 좀 바꿔야겠다. 아무 목표없이 공부하기에 좋은 시절이 없다. ‘실컷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쯤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점점 더 좋아지리라 믿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그 바람을 마음껏 펼칠 기회다.
이얍!
거기엔, ‘목표’는 아니지만, 많은 부수효과들이 따른다. ‘고래고래’ 낭송해야 하는 관계로 어디든 머리를 디밀 수 있는 멘탈과 피지컬이 강화된다. 즉, ‘생존력’이 높아진다. ‘무작정 책을 베껴’야 하기 때문에 나름 끈기도 기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21세기형 공부는 ‘역동적’이다. 이 역동성이야 말로 ‘살아갈 힘’ 또는 ‘살아남을 힘’이 된다. 백수가 ‘공부’로 자립한다는 것은 읽고 쓰는 고전(古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이와 같은 역동성을 기른다는 말이 아닐까. 언제는 고전이 없어서 못 읽었나, 문제는 그걸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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