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지극히 성실한 사람만이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곡능유성(曲能有誠) 성즉형(誠則形) 형즉저(形則著) 저즉명(著則明) 명즉동(明則動) 동즉변(動則變) 변즉화(變則化)라.
어때요, ‘형(形)―저(著)―명(明)―동(動)―변(變)―화(化)’의 단계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곡’(曲)을 능히 ‘성실’하게 하면 자신이 하는 일 혹은 자신의 내면에 ‘형’(形)이 생긴대요. ‘형’이란 뭔가 형체가 잡히기 시작하는 거예요. 형체가 없는 데에서는 일이 뭐가 어떻게 될지 감이 전혀 안 잡히죠? 그런데 마음속에서부터 지극정성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추구하다 보면 뭔가 일이 될 것 같은 감이 잡힙니다. 막막하다가 뭔가 길이 보여요. (……) 한마디로 ‘형’은 무형에서 유형으로 된다는 거예요. (……) 어쨌든 이 ‘성’(誠)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드는 위대한 에너지입니다. 기억하세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건 성실함입니다!
그렇게 뭔가 형체가 잡히면 ‘저’(著)가 됩니다. 나타난다 혹은 점점 뚜렷해진다는 뜻이에요. ‘현저하다’ 할 때 ‘저’ 자죠. 뭔가 가닥이 잡히면 일이 되어 갑니다. 그렇죠? 사람도 모이고, 일도 굴러가고요. (……)
그리고 ‘저’(著) 하면 ‘명’(明)해진대요. 점점 더 내면에 쌓인 것이 밖으로 나타나면서 분명해진대요. (……) 자, 그러면 ‘동’(動) 한답니다. 주석에는 ‘동’을 “誠能動物”(성능동물)이라고 하네요.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동’의 의미는 꼭 기억해 두세요. 이건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거예요. 주변 모든 것의 배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 역시 또 ‘성’(誠), 성실함입니다. ‘성’ 하면 만물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죠. 인간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성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른 방법은 없어요. (……)
이렇게 ‘성’에서부터 ‘동’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이 움직이고 내 주변의 배치가 달라지면 비로소 ‘변’(變)이 되는 거예요. 주석을 보면 ‘변’이 “物從而變”(물종이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만물이 따라서[從] 달라져요. 그러면 ‘변즉화’예요. ‘변’과 ‘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바로 앞장에서 말씀드렸었죠? (……) 그런데 지금까지 말씀드린 단계들을 차근차근 밟아야 ‘화’가 가능하지 ‘형’에서 바로 ‘화’로 가는 건 없어요.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변’한즉 ‘화’하니, 유천하지성(唯天下至誠) 위능화(爲能化)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한 사람이라야 능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네요. 말씀드렸죠? ‘지성’이면 다 된다고 말이에요.
― 우응순 강의, 「제23장」, 『친절한 강의 중용』, 북드라망, 2016, 276~278쪽.
위 문장 처음 부분에 나오는 ‘곡’(曲)은 이 대목 바로 앞에 나온 ‘치곡’(致曲)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소소한 일부터 해나간다는 뜻이다. 아무리 평범하고 혹은 심지어 평범 이하로 모자란 면이 많은 나라도 지금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바로 그 작은 일, 너무 하찮고 소소해서 뭘 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그런 작은 일을 지극정성으로 해나가면 무언가 ‘형’(形)―형체가 잡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형체가 잡히면 그 다음에는 ‘저’(著)―뭔가 더 가닥이 잡히며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뚜렷해지게 되면 ‘명’(明)―내면에 쌓인 것이 밖으로 나타나 분명해지고, 그렇게 밝아지면 그 다음에 ‘동’(動)―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며, 그렇게 움직이게 되면 그때 ‘변’과 ‘화’―‘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터 진심으로 지극하게 ‘성’(誠)―성실함, 지극정성을 다한 것이라는 말이다.
‘치곡’(致曲).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최선을 다하기, 마음을 다해 노력하기. 이것은 나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가 특별한 누군가에게만이 아니라 갑남을녀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감동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왜냐하면 무언가 대단하고 폼 나는 일은 누구나 열심히 해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작은 일에는 그런 발심을 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출판사의 ‘편집’일만 해도 여러 가지 분야가 있다. 통칭 ‘편집’으로 이야기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기획’ 분야이다. 어떤 책을 만들지 아이디어를 내고, 저자를 섭외하고, 목차를 짜보고 하는 일은 출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해보고 싶어하는 일이다. 하지만, ‘편집’ 중에서도 ‘교정‧교열’만 본다고 하면 편집일 중에서 가장 하찮은 일을 하는 것처럼 여기고, 또 필자가 편집자가 교정 본 문장을 컴퓨터의 편집프로그램 상에서 수정하는 등의 단순 수정 작업 등은 편집일도 아니고 ‘오퍼레이팅’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할 정도로 사소한 일로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수정작업은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고, 어떤 책을 (출간 가능한 형태로) 온전히 기획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연륜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경험이라는 말 속에 있는 시간과 시행착오는 건너뛰고, 당장 그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그걸 하면 잘할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작고 하찮기 때문에 눈길도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 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나중에 이 일을 어느 정도 마스터하고, 그러니까 자신이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나갈 수 있고, 그걸 즐기면서 하며, 그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반응과 영향을 주는 사람은, 그 일에 있어 정말로 하찮고 중요하고 없어 보이고 있어 보이는 걸 따지지 않고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서부터 성실하게 해나간 사람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단순 수정업무를 하는 사람’보다는 ‘책을 기획하는 사람’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책의 형태를 잡아가고,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될지 확신할 수 있고 드러나게 할 수 있으려면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막연히 동경하며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쏟아 집중하며 커나가는 시간 말이다. 작은 일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은 늘 큰 것을 좇느라 허공을 떠돌고만 있다면 결국 나에게는 어떤 형체도, 드러남도, 밝아짐도, 마음을 움직임도, 변화도 없을 수밖에 없다.
아마 공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책 한권을 꼼꼼하게 읽고 독해해 보는 것부터, 혹은 한 구절 한 구절 소리 내어 읽으며 필사해 보는 것부터, 공부와 글쓰기도 시작되는 게 아닐까. 훌륭한 글, 독창적인 해석, 촌철살인의 문제제기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질 수 없다. 지극정성으로 최선을 다해 읽고 또 읽어 보는 것, 거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 23장의 대목을 가지고 쓴 영화 <역린>의 대사 중에서)
친절한 강의 중용 - 우응순 강의/북드라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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