費(비)와 隱(은)의 모순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라고 했던 제논의 역설을 기억하시는지? 고대 그리스의 제논은 운동이 실재한다면 이런 어이없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려 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섯 번째 연재를 읽어보시면 되지만 모르셔도 상관없다. 이 문장이 어이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글을 계속 읽을 수 있는 출발점은 된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 아마 안 되실 것이다. 그럼 됐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이 중용(中庸)에 있다. 중용 12장, 첫 구절로 자왈(子曰)이 없으니, 중용의 지은이인 자사(子思)의 말이다.
군자의 도는 남김없이 드러나되, 은미하다.
君子之道(군자지도) 費而隱(비이은)
한자를 보면, 남김없이 드러난다는 의미의 “費(비)”자는 ‘남김없이 쓴다’, ‘널리 쓰이다’, ‘빛나다’라는 뜻이 있다. 주자(朱子)는 費(비)자를 “널리 쓰이다(用之廣也)”로 주석하고 있는데, 널리 쓰인다는 것도 결국은 모두 드러나는 것이니 費(비)는 남김없이 모두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사는 費(비)에다 ‘숨다’는 뜻의 隱(은)을 바로 연결시켜서 費而隱(비이은), 즉 “남김없이 드러나되 은미하다(費而隱)”고 말하고 있다.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 어떻게 은미할 수 있는가? 제논의 역설 같은 모순이다. 하지만 자사는 말한다. “군자의 도는 費(비)하되 隱(은)하다.” 이번 연재에서는 이 모순적인 문장에 대해 탐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군자의 도는 남김없이 드러난다(費)”는 측면을 살펴보자. 도(道)가 무언가? 중용1장에서 도(道)는 성(性)을 따르는 것(率性,솔성)이라고 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라. 자사는 성(性)을 따르는 도(道)의 비(費)한 측면을 다음의 시로 설명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詩云(시운)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오른다 했으니
鳶飛戾天 魚躍于淵(연비여천 어약우연)
그 상하에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言其上下察也(언기상하찰야)
이 시는 너무 유명해서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이다.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오르는 것은, 솔개는 솔개의 성(性)을 따라 살기 때문이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성(性)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개는 솔개의 도(道)를 드러내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도(道)를 드러낸다. 이렇게 도가 드러나는 것이 어디 솔개와 물고기가 사는 것뿐이랴? 도(道)는 세상을 초월한 저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유가(儒家)의 진리개념의 한 축이다. 자사는 이를 군자의 도는 비(費)하다고 표현했다. 진리는 이처럼 일상적인 것 속에 있는 것이기에 공자는 은벽(隱僻)한 것을 찾고 괴상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이상한 것만 찾아다니고 괴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후세에 칭송되기도 한다.
素(索)隱行怪 後世 有述焉(색은행괴 후세 유술언)
하지만 나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
吾弗爲之矣(오불위지의).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는 것에서 솔개의 도가 드러나듯, 도는 일상의 모든 일을 통해 드러난다.
진리가 세상을 초월한 저 어딘가에 숨어있어서 아무나 접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알고 행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권력효과를
가질 것이다. 진리의 담지자 행세를 하게 되니까 말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고귀한 진리의 담지자로 칭송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은 도(道)가 아니기에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는 누군가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일상적인 것 속 어디에나 있다고 하는 유가(儒家)의
진리개념은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구도는 진리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진리이고, 어디에나 있는 것이 진리라면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생겨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구도는 “진리는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자나,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자를 특권화 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그래서 군자의 도(道)는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자사의 말은,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으로, 진리의 권력효과를 해체하는 말이기도 하다. 독점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그것의 권력효과를 누리던 자들에게, 진리는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주장은 진리의 독점성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7세기 유럽의 자연학자들은 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지식권력에 중대한 도전을 한 자들이다. 갈릴레이를 위시한 자연학자들은 진리는 이데아로 있거나 교황청의 해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낙하하는 돌의 운동 속에서도 흔들리는 시계추의 운동 속에도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릴레이는 인간이 쓴 성경보다 오히려 자연의 운행이 드러내는 규칙성이 신의 말씀에 더욱 가까울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즉 진리란 어디에나 드러나는 것이기에 사제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학자들이 주장한 진리의 편재성(遍在性)은 교회가 독점하던 지식권력을 해체하는 효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 지식권력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했다. 진리는 편재(遍在)한 다는 이들의 주장은 지식권력의 해체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신학권력을 과학권력으로 대체 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보편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 있었을까? 자연의 모든 현상은 그 자체로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형식으로만 표현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적합한 테크놀로지를 경유해야 했는데, 수학적 논증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런 테크놀로지를 익히는 것은 국가적인 시스템이 제공하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자연의 모든 현상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특정한 테크놀로지를 익힌 자들만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테크놀로지를 익히고 있는 과학자들은 신학자들 대체하는 지식권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자사가 말하는 군자의 도 역시 남김없이 드러나는 편재성(遍在性)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사는 군자의 도는 남김없이 드러나는 동시에 은미하다고 말한다. 일견 17세기의 유럽의 자연학자들이 말하는 구도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도는 어디에나 드러나지만 또한 은미한 것이기 때문에 높은 학식을 갖춘 자들만 알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자사는 17세기 유럽의 자연학자들과 다른 길을 간다. 자사는 다음의 문장에서 “君子之道(군자지도) 費而隱(비이은)”을 이렇게 부연한다.
어리석은 부부라도 군자의 도를 아는 것에 참여할 수 있다.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부부지우 가이예지언)
하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知焉 (급기지야 수성인 역유소부지언)
어리석은 부부라도 군자의 도를 행할 수 있다.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부부지불초 가이능행언)
하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及其之也 雖聖人 亦有所不能焉 (급기지야 수성인 역유소불능언)
일단, 도(道)눈 비(費)하기에 어리석은 부부도 알 수 있다는 의미를 살펴보자. 자사는 단지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 않고 ‘어리석은 부부’도 도를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자식을 낳는 것이다. 그래야 무리를 이루고 살 수
있다.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솔개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오른다는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남녀 한
쌍인 부부는 인간이 생존하는 제1의 조건인 셈이다. 어리석은 부부라도 알 수 있는 도(道)는 과학적인 진리처럼 그것을 알기위해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사는 군자의 도는 비(費)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군자의 도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다 알지 못하고 다 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유가에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이 성인(聖人)인데, 그런 성인조차 알 수 없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도달 불가능한 경지를 말하는 셈이다. 이는 진리의 특권적인 담지자는 있을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유가(儒家)의 존립기반을 생각해 보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이다. 공자는 책을 읽는 지식인 계층인 사(士)의 존재를 역사의 무대에 부각시킨 사람이다. 사(士)들
은 귀족이 아닌 지식인 그룹이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앎을 자신들의 차별적인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유럽의 자연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내세우는 진리는 인식론적인 진리가 아니고, 삶으로부터 직접 체득하는
진리이기에, 솔개와 물고기 그리고 어리석은 부부도 알 수 있는 것이고, 지식인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사는 이
문장으로 지식인이 주장할 법한 지식권력을 완전히 해체해 버린다. 하지만 여전히 費而隱(비이은)의 모순은 이해되지 않는다. 자사는 어떻게 비(費)한 것이 어떻게 동시에 은(隱)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해결책은 도(道)의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솔개나 물고기 그리고 부부가 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도가 있고 성인조차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높은 수준의 도(道)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이 보인다. 도(道)가 난이도 차이에 따라 어떤 것은 드러나고 또 어떤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면, 비(費)라는 의미는 이미 남김없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아니게 되고, 은(隱) 역시도 그 경계를 어떻게 정할지가 애매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자(朱子)는 비(費)와 은(隱)을 도의 용(用)과 체(體)로 층위를 나누어서 이 모순을 해결했다. 도(道)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은 작용(用)의 측면이고, 은(隱)한 것은 그런 작용이 생기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도(道)의 체(體)라는 것이다. 도(道)의 용(用)이 현행화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면, 체(體)는 그러한 현행화를 가능하게 하는 잠재성의 지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재성의 지대는 실재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隱)할 수밖에 없고, 도(道)의 작용은 언제나 현행화 되는 것이니 비(費)할 수밖에 없다. 이는 대단히 깔끔하고도 설득력 있는 해결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사는 도를 체(體)와 용(用)을 명시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사가 남긴 문장만으로 비(費)하되 은(隱)하 다는 모순적인 문장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 모순적인 문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나는 공자가 순임금을 평가하는 말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았다. 공자는 순임금이 백성에게 정치를 폄에 늘 묻기를 좋아하고 하찮은 말도 살피기를 좋아했다고 평하면서 그 때문에 순임금이 성인이 되신 것이라고 말했다. 순임금은 왜 묻기를 좋아했을까? 스스로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했다면 묻기를 좋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찮은 말은 더구나 살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순임금은 자신이 다 알 수 있고, 다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슷한 구절이 『논어』 옹야편에도 있는데, 공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은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지 못함을 늘 걱정으로 여겼다”고 요순(堯舜)을 평한다. 그들이 이미 다 베풀고 있다고 여겼으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순(堯舜)의 시대는 대단한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알려진 시대이다. 하지만 유가의 가장 대표적 성인들인 요순(堯舜)은 늘 자신들이 하지 못한 것을 걱정했다. 그들 스스로 다 알지 못하고 다 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너무 고차원적인 문제여서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모든 문제가 일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계속 새로운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군자의 도가 은(隱)하다는 의미는 끝없이 이어지는 문제의 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요컨대 군자의 도는 무한정하기에 은(隱)하다.
자사는 이 무한정한 도(道)를 이렇게 표현한다.
군자의 도는 크다고 말하면 천하가 다 실을 수 없고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작다고 말하면 천하가 다 쪼개지 못한다.
語小 天下莫能破焉 (어소 천하막능파언)
무한정하다는 것은 한계가 없는 것이기에 도를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도(道)를
따른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성인이라고 다른 것이 아니다. 성인이 성인일 수 있는 것은 도를
다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도를 알려고 하고, 도를 행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도(道)는 무한정하기에 천하라는 거대한 틀로도 다 가둘 수 없어서 은미하고, 무한정하기에 어떤 미세함보다도 더 미세하기에 또한 은미하다. “費(비)와 隱(은)” 이 모순적이 두 단어는 군자가 도(道)를 이루려는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는 방식으로 그 모순이 해결되는 것 같다.
글_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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