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시중의 시간성 : 선한 것 중에서 적중한 것을 택하는 새로운 리듬


시중(時中)의 시간




지난 연재에서 나는 중용(中庸)을, 가차 없이 흐르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잡아채는 시간인 카이로스 시간의 공존으로 읽었다. 두 시간은 서로 상관적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없다면 시간이 흐른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고, 카이로스의 시간 역시 크로노스의 시간이 없다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가차 없이 흐르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잡아채는 시간인 카이로스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논리란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자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후자의 시간은 흐르는 시간을 멈춰 세워야 비로소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두 시간은 서로 모순적이다. 나는 논리적으로는 공존할 수 없지만 구체적 삶에서 두 시간은 공존하는 것이고, 그 공존 가능성을 포착하는 것이 시중(時中)이라 읽었다.(보러가기) 이번 연재에서는 시중(時中)의 시간성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겠다.


이번에는 시중(時中)의 시간성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이 두 시간의 논리적인 양립불가능성은 어느 한쪽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의 제논이 운동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면, 고대 중국의 노자계열의 지식인들은 카이로스의 무용함에 초점을 두었다. 노자계열의 지식인들이 보기에 천지만물 중에서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는 존재는 오직 인간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연 인간만 시간을 붙잡으려 하는 것일까? 시간을 포착한다는 것은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변화를 포착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변화를 포착하지 않는다면, 개구리는 날아다니는 파리를 어떻게 잡을 수 있으며, 진드기는 지나가는 포유류에게 어떻게 뛰어내려서 새로운 동지를 틀 수 있을까? 움직이는 것들만이 아니다. 식물들은 향기로, 혹은 화려한 모습으로 벌, 나비를 유혹해서 수정을 한다.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게다가 소위 살아있다고 하는 것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포화 용액은 아주 약간의 진동을 포착해서 결정을 이룬다. 인간만 시간을 포착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다. 천지 만물이 변화를 포착함으로써만 다른 것으로 화(化)할 수 있고, 시간을 포착함으로써만 지금의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수 없는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사유한 베르그손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뉴튼의 시간개념을 비판했다. 뉴튼은 시간을 양(量)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통념적인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어진다. 베르그손은 이 시간의 분할을 비판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너무나 당연한 이 시간의 개념을 비판한다면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일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이 두 시간의 모순적인 관계는 현실에서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크로노스의 시간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카이로스가 붙잡으려는 순간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불일치 때문에 카이로스의 시간을 주관적인 시간이라고 하기도 한다. 포착의 순간이 저마다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뉴튼이 한 일은 이 불일치를 해소 한 것이다. 이른바 ‘절대시간’이라는 기준이 그것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뉴튼의 절대시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포착할 수 없는 시간의 화살이지만 뉴튼의 절대시간은 하나의 척도다. 뉴튼의 과학에서 모든 존재는 절대시간이라는 공통의 시계를 장착하고 있다고 가정된다. 모든 존재는 동일한 절대시간의 척도를 가지고 있기에 굳이 시간을 포착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언제나 일치하기 때문이다. 


뉴튼의 이 대담한 가설덕분에, 근대 과학이 가능해 졌다. 이제 제논의 역설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뉴튼은 제논처럼 변화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뉴튼은 절대시간이라는 척도를 도입함으로써, 날아가는 화살의 변화를 좌표상의 점들로 고정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공간상에 죽 펼쳐진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지는 양적인 시간이다. 신화 속에서 카이로스 신은 머리의 뒷부분이 대머리다. 이는 붙잡으려 해도 붙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시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시간의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지만, 뉴튼의 물리학에서 카이로스는 뒷머리가 대머리일 필요가 없다.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을 일치시키려는 기획은 뉴튼이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다. 중세의 교황청은 달력을 만들어서 공표했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이 그것이다. 고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중국에서는 오직 천자만이 달력을 만들 수 있었고, 제후국들은 매년 달력을 받으러 정식 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냈다. 뉴튼의 절대시간은 척도라는 면에서는 달력과 같은 것이다. 최소 단위가 하루가 아니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시계나 달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베르그손은 뉴튼의 시간을 비판하면서도 그 불가피성은 인정했다.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시계나 달력처럼 시간을 그렇게 공간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뉴튼의 오류는, 절대시간을 불가피한 실용적인 척도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절대시간의 척도 덕분에 뉴튼은 변화를 잴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변화량들 사이의 관계를 도출함으로써 시간에 무관한 운동법칙을 만들 수 있었다. 양적인 것은 관리 가능한 것이다. 변화는 물리법칙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관리 가능한 것이 되었다. 뉴튼의 공헌은 시간을 순치(順治)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천자의 달력이나 교황청의 달력이 의미하는 바도 뉴튼의 절대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달력 또한 시간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교황청이나 천자가 달력을 배포한다는 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사가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기준점으로서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의 흐름 하에서만 법과 제도는 작동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달력의 시간, 즉 공간화된 시간은 법과 제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용이 포착하는 시간은 달력의 시간이 아니다. 만일 달력의 시간이라면, 공자가 시중(時中)의 어려움을 그토록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중(時中)이 어려운 것은 카이로스의 벗겨진 뒷머리처럼, 시(時)의 적중함을 찾았다고 한 순간 시(時)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중(時中)의 시(時)는 달력으로 균질화해서 관리 할 수 없는 시(時)다. 공자는 천자인 순임금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셨다!
순임금께서는 묻기를 즐기셨고,
하찮은 이야기도 자세히 살피기를 좋아하셨다.
악한 것은 억누르고, 선한 것은 드러내시고,
선한 것 중에서 적중한 것을 택해서 백성을 다스리는데 쓰셨다.
이 때문에 지혜로운 순임금이 되신 것이다.”


천자인 순임금은 이미 세상의 기준이기에 굳이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고 하찮은 이야기를 살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순 임금은 법과 제도를 절대시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달력의 시간은 불가피하지만, 절대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군주란 그가 만든 달력으로 변화를 관장하고, 그가 만든 법으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다. 그런데 그런 자가 법과 제도를 절대시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 일까? 법과 제도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잘 만들었어도, 그것은 본성상 고정된 것이기에 변화를 다 담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순임금은 법과 제도를 절대시 하지 않은 것이다. 순임금의 중용은 법과 제도를 절대시 하지 않고, 매번 살피고 또 살핀 연 후에 그 적중(適中)함 찾아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고, 공자는 그것을 '순임금다음'이라고 칭송한다. 


해가 뜨면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해가지면 집에 돌아가 쉬는 것처럼, 자연의 리듬을 타는 것이 시중(時中)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에 마냥 몸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자연이 주는 열매를 그냥 따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은 리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이라 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고 해도, 농부가 밭을 갈고 퇴비를 주면 비로소 무언가가 자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땅과 식물과 농부의 노동이 하나로 엮여 들어가서 새로운 리듬이 형성되는 것이다. 순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하찮은 말도 살피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은 백성들의 삶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그냥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악한 것은 억누르고, 선한 것은 드러내시고, 선한 것 중에서 적중한 것을 택해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었다. 새로운 리듬을 만듦으로서 순임금과 백성들은 합일하게 되는 것이고, 합일로서만 지배자의 힘과 피지배자의 힘은 서로 대립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임금의 시간은 리듬으로서의 시간이다. 




이를 이해하기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이 유용하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복합물체를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크기가 같거나 다른 몇 개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로부터 압력을 받아 서로 접합할 때, 혹은 몇 개의 물체들이 같거나 또는 다른 속도로 운동하면서 자신의 운동을 서로 어떤 일정한 비율로 전달할 때, 우리는 그러한 물체들이 서로 합일되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모든 것들이 다함께 하나의 물체 또는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물체 또는 개체는 물체들의 이러한 합일에 의해 다른 물체들과 구별된다.”

-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자연학소론의 정의


스피노자는 개체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무엇으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합일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의 세포만 해도, 인간의 게놈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진 세포는 수적인 면에서 10%밖에 되질 않는다. 90%의 세포들은 모두 비인간의 세포들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이다. 이렇게 잡종적인 나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과 구별되는 개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세포들이 공통의 리듬으로 합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세포들의 시간은 리듬의 템포이외에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유기체라고 생각되는 개체도 이처럼 군체와 다름이 아니라면, 그 개체가 다른 개체와 합일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중용』 1장에서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자란다는 의미 또한 중(中)과 화(和)가 지극해지면 천지가 하나의 개체를 이루게 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순임금과 백성들을 역시 공통의 리듬을 구성함으로서 하나의 개체가 된 것이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는 군주의 통치란 오직 백성과 한 몸이 되어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군주가 백성들에게 무기력하게 휩쓸려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개체화를 이루어 낼 때, 비로소 군주는 중용의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때는 백성들의 삶도 이전의 삶이 아니고, 군주의 삶도 이전의 삶이 더 이상 아니다. 그래서 시중(時中)의 시간은 하나의 개체에 이르기 위해 함께 리듬을 맞추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리듬으로서의 시간은 의식이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시간을 멈춰 세우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신체가 다른 신체들과 함께 리듬을 형성함으로서, 그 합일을 통해 비로소 포착되는 것이다.  공통의 리듬으로 합일하는 것이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라면 이를 서로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일치시키는 공통관념(common notion)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땅과 식물은 농사짓기와 공통관념을 이룬 것이고, 순임금은 백성들과 그의 정치로 공통관념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공통관념이란 어떤 관념의 공통성이 아니다. 그것은 시중(時中)의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인식은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합일의 감응을 느끼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중(時中)의 시간은 공간에 펼쳐진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분할 불가능한 리듬의 시간이자 구체적인 삶의 시간이다. 


글_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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