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그 불가능성의 힘
공자는 순임금을 위대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 칭송했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하찮은 말도 살피기를 좋아했으며, 악은 억누르고, 선은 드러내어 그 중 최선의 것을 백성에게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임금의 정치는 중용의 정치이고, 이런 정치적 장에서는 군주와 백성이 더 이상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관계로 만나지 않는다. 중용은 서로 이질적이어서 적대가 되기 쉬운 힘들을 함께 살 수 있는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적대를 적당히 무마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나는 힘들을 질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낳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중용(中庸)은 중화(中和)에 다름 아니다.
중용의 정치 속에서 순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자가 아니다. 지휘자의 역할은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들 사이의 조화를 최대한 이끌어내어서 하모니를 조직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없이 지휘자를 생각할 수 없고 지휘자 없이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수 없으니 존재론적으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평등하다. 순임금의 정치가 보여주는 것 역시 군주와 백성과의 존재론적 평등성이다. 군주와 백성은 능력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위계화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순임금의 중용의 정치는 이러한 다름이 위계가 되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 되게 한 것이다. 1
그러나 중용은 어렵다. 공자는 그 어려움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공자가 말했다.(子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人皆曰予知)
그물이나 함정에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而莫之知辟也)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人皆曰予知)
중용을 행하겠다고 하면서도 한 달도 지켜내지 못한다.”(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반중용(反中庸)의 함정에 끌려들어가기 일쑤이지만, 그것이 중용의 길인지 반중용(反中庸)의 길인지 분간조차 못한다. 저마다 중용을 행하겠다고 호언하지만 한 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기에 한 달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일까?
“천하와 나라를 평안히 잘 다스릴 수도 있다. (天下國家 可均也)
높은 벼슬을 사양할 수도 있다. (爵祿 可辭也)
심지어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다. (白刃 可蹈也)
그러나 중용은 불가능하다. (中庸 不可能也)”
균천하(均天下)하는 일이나 높은 벼슬을 사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퍼런 칼날위에 올라서는 것 또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것은 신내림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용기다. 그러나 공자는, 이런 일들은 마음먹고 하려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중용은 이런 일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순임금 정도 되는 성인(聖人)이라야 넘볼 수 있는 경지가 중용이라면, 보통사람들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 셈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끊임없이 중용할 것을 권한다. 이 역설의 의미는 무엇일까?
중용의 불가능성과 유사해 보이는 언급이 스피노자의 『윤리학』 5부에서도 발견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유일 실체를 존재론적 근거로 출발해서 정신의 인식능력을 연역해내고, 어떻게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자유인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는 길인가를 제시한다. 『윤리학』 5부는 바로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인식의 방법을 말하고 있는 챕터이고, 스피노자는 그 길을 자세히 제시하지만 마지막을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 (B.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 42) 라는 김새는 말로 끝을 맺는다.
공자가 말하는 중용이, 그리고 스피노자가 말하는 최고의 인식이 그렇게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 세상이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중용을 행하기가 비교적 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일단 적대가 사라질 것 같다. 지금 한참 우리사회에서 “여성혐오”라는 문제로 표출되고 있는 여성과 남성의 적대나 유럽을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이민자와 토착민의 적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적대, 인간과 비인간의 적대 등 세상의 온갖 적대는 많은 사람들이 중용을 행한다면, 순임금의 정치처럼 공존의 지점들을 계속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생각 만 해도 정말 좋은 세상이지만,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세상이다. 공자와 스피노자는,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중용은 이상적(理想的)이다.
이상적(理想的)인 것에는 구체적인 조건이 고려되어 있지 않다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 사변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중용의 삶을 전제한다면, 현실의 적대는 모두 해결 가능한 것이 되고, 스피노자처럼 모든 일들을 자연의 필연성으로 파악해서 지복을 누릴 수 있다면, 세상에 합치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이론적으로야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 대한 설명논리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될 때 오히려 현실적인 불합치를 은폐하는 논리로 사용되기 십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 혁명 시에 작성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인권선언’이라 불리는 이 선언에 따라서 각국의 헌법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시민은 공적인 영역에서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말하자면 인권선언의 내용이 법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적인 영역 혹은 경제적인 영역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주장되는 평등이 사적인 영역에서의 착취구조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최근에 불거진 ‘개, 돼지 논란’은 이 은폐구조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논란이 된 그 사람은 인간은 전혀 평등하지 않은데 왜 공적인 공간은 그것을 은폐하면서 평등한 척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그 사람이 제기한 대로 현실에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법조항은 평등성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비대칭성은 구체적 현실에서는 구조적으로 야기되는 불평등문제를 개인적인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권선언이 이상적(理想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일까? 『평등자유명제』에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인권선언을 새롭게 독해하면서, 선언의 내용은 마르크스가 비판하듯이 권리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분할이라든지, 근대의 자연권사상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권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시민의 완전한 동일성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인권선언은 인간이면 모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보편적인 선언이고, 이때 보편성은 무제한(無制限)을 의미하므로 이상적이다. 그래서 인권선언의 보편성(普遍性)은 법적인 평등성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계속 추구하기를 고무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고 발리바르는 주장한다. ‘개, 돼지 논란’의 주인공이 드러내어 보인 것처럼, 법적인 평등성이 현실적인 불평등성을 해소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인권선언의 이상성(理想性)이 아니라, 법적인 규정을 통해서 그 이상성(理想性)을 이미 실현된 것으로 간주해 버리려는 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성(理想性)은 현실에서 완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의 실현은 그것을 향한 중단 없는 노력, 그 현재진행형의 시제 속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중용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중용을 실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우리에게 환기시켜주려고, 공자가 그렇게 여러 번 그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살펴야 할 것은 왜 그토록 그 불가능성을 강조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불가능성의 의미는 중용은 현재진행형 속에서만 실현된다는데 있다, 그것은 실현이기도 하고 동시에 다시 시작이기도 하기에 언제나 불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순임금의 정치가 시중(時中)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묻기를 즐기고 하찮은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순임금이 묻기를 그만두고 하찮은 말을 살피기를 그만둔다면, 그의 정치는 더 이상 시중(時中)의 정치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순임금의 시중(時中)의 정치는 그것을 이루려는 현재진행형의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 때에만 중용이 될 수 있다.
이상적(理想性)인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상상인 것은 더욱 아니다. 중용은 원리적으로는 가능한 것이다. 만물이 생장하는 원리인 천도(天道)에 합치하고자 하는 것이 중용이기 때문에 그것은 만물이 나고 자라는 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용을 행한다는 것은 완결된 형태를 취할 수는 없다. 만물은 변화를 멈추지 않기에 한번 적중함을 찾았다고 그것이 계속 유지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중용을 행하겠다고 하면서도 한 달도 지켜내지 못”하는 이유는 마치 부르주아들이 인권선언의 내용을 법조항으로 퉁 치려했던 것처럼, 제도나 규칙의 형태, 즉 완료형의 시제로 만들어버리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가 군자의 신독(愼獨)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도 중용의 불가능성에 있을 것 같다. 신독(愼獨)은 그 불가능성을 계속 확인하는 일이다. 순임금이 신독(愼獨)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묻지 않고 더 이상 하찮은 말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중용의 도는 완결이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용을 도(道) 답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불가능성에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중용은 이상성을 향한 멈추지 않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상적인 것 일반에 모두 해당되는 것일 터이다. 이상성(理想性)의 힘은 그 완결 불가능성에 있다.
글_최유미
- 각주 1)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비유는 질베르 시몽동이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에서 발명가와 발명의 대상인 기술적 대상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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