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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실수는 저지른 직원만의 잘못일까? - 조직 내에서 함께 산다는 것

by 북드라망 2016. 6. 28.


공생, 감각을 공유하는 공동체


❙ 강한 규율, 강한 조직?

온몸에 받은 봄햇살로 머리도 가뿐하다. 그러나 방심하는 사이에 곡우(穀雨)를 지나 벌써 입하(立夏)가 돌아왔다. 봄에는 몸 이곳저곳이 간질간질하고, 아지랑이에 눈도 맵다던데, 이번엔 꽃향기는커녕 풀내음도 제대로 못 즐기고 떨어져 누운 꽃잎만 바라보고 눈만 껌벅거린다. 집근처 좁다란 도랑에는 벌써 여름을 알리는 개구리들이 밤새 울어대고, 늦은 봄비가 내리자 양기 가득한 지렁이가 보도블록 사이로 머리를 들이 민다.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_내 마음도 벌써 물 속에 첨벙~☆

이런 때면 은행일도 손에 안 잡힌다. 안 그래도 팀원들에게 이런 저런 업무 착오가 많아졌다. 새해에 전입한 팀원들은 여전히 업무에 익숙하지 않고, 기존 팀원들은 너무 익숙해져 자신을 경계하지 않은 탓이다. 실수는 방심하는 후방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일상을 헝클어트린다. 오늘도 업무착오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하루 종일 수정하느라 팀 전체가 쩔쩔맨다. 나도 본능적으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실수한 직원을 불러다 몇 가지 주의를 주면서 약간은 강하게 질책을 해본다. 실수들이 우정을 나누면 걷잡을 수 없이 강성해지는 법이다. 그것들과 싸우는 팀원들의 정신도 강하게 깨워 세우는 수밖에 없다.

로마인들은 ‘팔랑크스’(Phalanx)라는 밀집대형으로 전투를 했다. 100명씩 모여 대형을 이룬다고 해서 흔히 백인대(百人隊)라고 불리는 ‘켄투리아’(centuria)로 뭉쳐 싸운다. 앞줄에 있는 병사가 어느 정도 싸운 뒤 물러나면, 다음 줄 병사가 교대해 나가서 차례차례 싸우는 식이다. 총과 폭탄이 없던 시대에 상대에게는 팔팔한 병사와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중압감을 주었다. 이런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튀는 행동을 하면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나는 오랜 은행 생활을 통해 규율과 기풍이 무척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이런 규율과 기풍이 무너지면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럴 조짐만 보이면 안절부절못한다.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도 이런 규율과 기풍 덕분 아닌가. 로마의 공화정을 ‘공화정 군국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다. 기껏 팀 하나 관리하면서 로마까지 거론하는 게 귀에 거슬릴 것도 같다. 그러나 한 개인의 실수는 분명하게 다루어져야 다시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게 속한 조직과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길일 것이다.


❙ 공생하다, 감각을 공유하다

그러나 곧 뒤 돌아서서 잠시 다른 기분과 함께 몇몇 질문들이 생겼다. 과연 실수가 그 직원만의 잘못인 걸까? 또 그런 실수들이 그 직원만의 힘으로 없어지고 해결될 수 있는 걸까? 물론 일어난 사건만 바라보면 그 특정 직원이 잘못한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달이 난 과정 전체를 살펴보면 잘못의 조짐과 흔적들이 그 직원 말고도 앞뒤 과정 곳곳에 배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하다. 어떤 업무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언제나 동료들의 보이지 않는 협조 속에서라야 무난히 처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처리한 사람이 실수한 직원에게 한번쯤은 특이사항을 환기시켜주고, 뒤에 이어 받은 사람이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그 주의 사항을 되새겨보았더라면 그런 잘못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꼭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앞, 뒤의 사람들이 뭔가 강한 주의를 하고 있다는 느낌만이라도 전달되었다면, 그 직원도 좀 더 주의해서 일처리 했을지 모른다. 일의 과정에는 그 과정에 달라붙은 사람들의 주의력도 달라붙는다. 실수는 과정에 달라붙어 있는 주의력들의 크기가 작아졌을 때 터지는 것이다.

그렇게 큰 눈으로 살펴보면 사소한 업무조차도 한 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팀 전체가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업무는 아무리 개인별 역할로 쪼개어 관리한다고 해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과 함께 팀원들 전체가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일 게다.

이건 생명의 문제이기도 하다. 4억 5000만 년 전 식물의 기원을 살펴보면 놀라운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우리가 흔히 보는 식물은 물속에 있던 조류(藻類, 김, 미역 등)와 곰팡이가 같이 공생하면서 진화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초창기 지구에서 물속에 살던 조류는 여러 자연변화 때문에 물 밖으로 내던져 졌다. 난데없는 변화에 조류는 정신이 얼마나 혼미해졌을까. 당연히 많은 조류가 소리 소문도 없이 소멸해버린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어떤 조류는 가파른 바위에 달라붙어 있던 곰팡이를 보호 덮개 삼아, 자신의 서식지인 물을 떠나 땅 위로 올라올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조류는 내부로 들어온 곰팡이에게 수액을 제공했고, 곰팡이의 균사는 튼튼한 가지와 뿌리로 발달한다. 사전에 길이 정해지지 않은 채 뜻밖에 결합된 정말 놀라운 경우이다. 조류와 곰팡이는 서로 장기간 관계를 맺다가 ‘식물’이란 단일 개체가 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식물이란 물 속 조류와 곰팡이가 한 살림을 하다가 몸까지 붙어 버린 ‘조류-곰팡이 복합체’이고 ‘위계 없이 구성된 공동체’였다.


결국 식물의 잎과 뿌리는 서로 다른 개체였다가 공생(共生, symbiosis)을 통해 하나가 된 경우다. 물론 둘이 함께 살다가 하나의 개체가 된 것도 신기하지만, 내가 더 흥미로워 한 것은 다른 것이다. 어떻게 하나가 되어 상대가 느끼는 감각을 함께 느끼게 되었을까? 사실 식물들에게 감각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하는 통념이 있으므로 이런 질문이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도 서로 다른 개체가 합쳐져서 하나의 개체가 된 경우라고 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렇다. 사람도 공생의 결과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공생 발생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도 두 생물이 융합하여 나온 산물의 후손이다.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가 가득했던 초창기 지구에서 초기 생명체에게 산소는 독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초기 생명체는 탄소를 먹고 유기물과 에너지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세균은 다양하다! 그중에 햇빛과 이산화탄소로부터 유기물과 에너지를 얻고, 부산물로 산소를 배출하는 광합성 세균도 등장한다. 당시로 보면 이례적인 존재인 셈이다.

이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대기에 이들이 배출하는 산소로 급격히 가득 차게 된다. 그렇게 되자 그때까지 지구를 장악하고 있던 원핵 세균들이 산소에 노출되며 치명타를 입고 만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넓고 세균은 다양하다! 그중에도 산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얻고 물을 합성할 수 있는 세균들이 일부 있었다. 이제 다른 생명체들은 너도 나도 이 세균을 삼켜서 이 세균들이 산소를 통해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이렇게 산소 이용능력을 가진 세균이 바로 우리 몸에도 존재하고 있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세포내 소기관이다. 그야말로 ‘내 안에 너 있다’의 생물학적 실현 아닌가. 이게 린 마굴리스가 이야기하는 인류버전 공생 이야기이다.

결국 내 안의 세포들도 코나 입과는 다른 개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나 입은 미토콘드리아의 에너지 생성을 위해 자연스럽게 코와 입을 열어주고 산소를 들이밀어 준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하나인 듯이 함께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호흡 그 자체가 바로 공생의 결과라니,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심전심’의 감각을 터득했을 것이다. 한 순간도 호흡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낯설고 놀라운 일이다.

미토콘드리아라는 '다른 개체'는 인류 최초의 공생의 증거이기도 하다.


❙ 공생하다, 세상을 창조하다

하지만 함께-살기에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를 잘 설명한 철학자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이다. 그는 ‘리좀’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와는 달리,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장군>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리좀은 나무 형태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48쪽. (인용문 중 일부는 생략)

‘리좀’(Rhyzome)은 뿌리처럼 줄기가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가리키는 식물학 개념이다. 들뢰즈는 하늘로 솟구쳐 자라는 통상적인 ‘나무 형태’(arborescent)가 갖는 위계적인 질서와 대비하기 위해 즐겨 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리좀과 나무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리좀이 땅속을 기면서 사전에 정해진 길이 없이 다양하게 뻗어 나가는 반면, 나무는 사전에 정해진 길에 따라서만 위로 자란다. 리좀이 위계 없이 함께 사는 반면, 나무는 위계가 정해진 대로 지시하고 지시받는 관계로 구성되어 굴러간다. 우리가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공생의 방식도 달라지는 것이다.

애초에 식물과 동물은 리좀 체계로 서로 엮이면서 생성된 창조물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자체가 세균들이 예기치 않게 만나면서 결합된 무리들, 다양체들이다. 아마도 이렇게 우글거리며 무리 짓고 창조되지 않았다면 지구라는 곳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들뢰즈는 이 무리 속에서 끊임없이 상대방 속으로 변형되어 들어가고, 서로 상대방 속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리를 이룬 우리들이 상대의 감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생명 그 자체가 굴러가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한시도 쉬지 않고 숨을 쉬고 에너지를 몸에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코와 입을 이룬 신경조직과 고대로부터 세균이었던 미토콘드리아 간에 감각의 공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 순간이라도 서로 감각을 공유하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은 끝장이다. 그것은 지시하고 지시받는 나무 체계로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경지인 것이다.

서로의 감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뻗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뒤엉키는 것!

이 의미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감각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함께 살지 못할 뿐 아니라, 각자의 생명조차 위급해지는 그런 일이다. 함께 산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각자의 감각을 서로에게 전달하고, 서로의 감각을 이해하는 일에 예민해야 한다. 그럴 때 그 공생체계는 차질 없이 작동한다. 그것은 밀집대형과는 완전히 다른 체계이다. 매 순간 사전에 정해지지 않은 연결, 위계 없이 서로를 감각하며 자기 할 일을 해내는 움직임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 수조차 없는 리좀적인 공동체이다. 공생은 언제나 매 순간 감각을 공유하여 창조하는 일인 것이다.

해조류를 먹고 사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해조요리를 해먹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마나 미역, 김이 없는 식탁을 상상하지 못하는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조금 놀라기도 했다. 특히 제주가 고향인 내겐 꼬들꼬들한 톳의 감각은 워낙 깊은 것이다. 팀원들을 불러다 해조요리에다 소주를 한잔 나눠 마시며 우리들의 ‘공생체’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우리들의 놀라운 기원과 함께 우리들의 실수를 반추하면 감각도 새로워지지 않을까. 밀집대형적인 위계를 버리고 리좀적인 공생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실수들을 줄여줄 것이다. 언제나 매뉴얼보다 감각이 문제인 것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 이 글은 월간금융 5월호에 소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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