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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의 광개토대왕의 모습은?!

by 북드라망 2016. 6. 21.

통치자들의 초상
: 정치란 무엇인가?



그저 담담한 광개토대왕의 기록

『삼국사기』를 읽으려 할 때 무엇이 가장 궁금할까? 나는 「고구려본기」의 광개토왕 기사를 먼저 펼쳐보았다. 흠모해 바라마지 않던 왕이자, 고구려에서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왕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의 영향도 지대했다. 한반도의 지리적 위상 때문인지, 대제국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요동 저 너머까지 영토를 확장한 왕에 대해 ‘기묘한’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광활한 영토에 발을 디디는 상상만으로도 광개토대왕은 너무나 멋진 왕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영토의 넓이와 국민의 행복지수가 어떤 함수관계를 갖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으면서 괜히 땅이 넓으면 잘 사는 것 같은 아니 잘 살 것 같은 착각이랄까, 그런 요상한 심리가 작동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름은 담덕이니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 허우대가 크고 활달한 뜻을 가졌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고, 9년에 왕이 죽으매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개 성을 함락시켰다.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쳐서 남녀 5백여 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잡혀갔던 백성 1만 명을 불러서 타일러 가지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요, 바다가 둘러져 있기 때문에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던 것이다. 2년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노하므로 장수에게 명령하여 막게 하였다. (중략)

17년 봄 3월에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보계로서의 인사를 차려 말했더니 북연왕 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했다. 운의 조부 고화는 고구려의 가닥 존속인데 고양씨의 후손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고를 성으로 한 것이다. 모용보가 태자로 되었을 때 운이 무예로써 동궁을 시종하게 되었더니 시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고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18년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거련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여섯 개 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옮겼다. 8월에 왕이 남쪽 지방으로 순행했다.

22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광개토왕조, 「고구려본기」, 『삼국사기』

그런데 보시다시피 『삼국사기』에 기술된 광개토왕의 사적은 예상외로 초라하다. 담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광개토왕의 위용이 드라마틱한 서사를 통해 전개될 줄 기대했는데, 그저 밋밋하고 간략할 뿐이다. 연나라로부터 요동 일대를 지켜내고, 백제에 맞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뼈대만 간추려 앙상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정복 전쟁의 기사는 위대함이나 훌륭함이라는 어떤 외피도 입히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고 단순한 문체로 쓰여 있다. 담덕을 영웅화하는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부식의 어조는 지극히 객관적이고 지극히 건조하다. 「고구려본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심지어 이름도 생소한 왕들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서사화되어 있다. 그에 비한다면 광개토왕의 기사는 얼마나 빈약한지. 사실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김부식에 대한 실망인지, 광개토왕을 영웅으로 굳게 믿었던 나에 대한 실망인지 알 수 없는 그 진한 아쉬움을 뭐라 표현할지.


영웅 광대토왕이라는 이미지의 기원은?

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린(길림)성 집안시에 약 1600여 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6미터 남짓 크기로 위용을 떨치며 서있는 비가 있다. 문제의 바로 그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묘사된 광개토왕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보았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사방 천리가 부족했던 정복왕이자 사방을 위무했던 성웅이었다. 내가 배운 광개토왕은 이 비문에 의거한 것이었다. 중국, 일본에 눌려 살고 있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단 한 방에 씻어주는 통쾌함이랄까? 실체로 존재하는 광개토대왕비는 반도 안에 갇혀 대륙이라고는 본 적도 없는 우리들에게 ‘대륙’이 우리 땅이었고 앞으로 우리 땅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게 만드는 광개토왕의 위용을 나는 이 비문에서 배웠던 것이다.

기대한 광개토왕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삼국사기』는 이 광개토왕의 사적을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일까? 아니면 김부식은 이 비문을 알지 못했는가? 기실 광개토대왕비가 주목받은 것은 근대 이후이다. 근대 이후 한국, 일본, 중국 삼국이 광개토대왕비에 쏟은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은 고대 일본의 대륙 진출의 추이를 자세히 알게 하고, 러일 전쟁 후의 정세에 국민적 규모로 대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환기하는 데 유용하게 하고자 하는 나름의 현실적 목적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조선 인민의 투쟁과 창조의 역사를 보여주는 조선 중앙박물관에, 우리는 민족 정기를 선양하기 위한 독립기념관 제1전시실 입구 정면에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35-36쪽)    

광개토왕의 시대와 98세까지 살았던 아들 장수왕의 시대는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묘 옆에 비석을 세웠다. 이 광개토왕 비문은 『삼국사기』에 언급되지 않는다.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를 위해 건립했는데, 장수왕조에도 이와 관련한 기사는 없다. 광개토대왕비는 건립 이래 드러난 적이 없다가 19세기 말에 홀연히 발견되어 역사의 중심에 그리고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의 사료로 영유하게 된다.

일본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백제·신라·임나에 진출해 조공을 받았고 혹은 이들을 속민으로 삼았고, 고구려까지 넘보았다는 사실에 격동했다. 우리는 고구려가 중국·일본·중국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여 영토를 넓혀가면서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확고히 가졌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20세기 역사학자들은 광개토왕의 비문을 각기 자기 나라에 유리하게 해석하며 동북아지역에 대한 정복욕을 불살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비문은 그저 고구려 왕에 대한 5부 공동체의 경의와 복종을 거두기 위해 고구려의 입장에서 광개토왕의 대외적 업적을 천명하고, 백제와 신라는 일본의 속민이었으며 백제는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그렇게 대서특필할 정도로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영토 확장이 안 중요해서가 아니라, 왕의 많고 많은 치적 중 하나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광개토왕에 대한 기대치를 『삼국사기』에서 충족하기는 매우 어렵다. 광개토왕은 여느 왕보다 훌륭한 왕은 아니었다. 특별히 나쁜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훌륭한 일을 한 왕도 아니었다. 대외적 방어와 정복이 광개토왕 시대의 주요한 사건 일 뿐, 그걸 통해 어떤 특이점을 전하려 하지 않았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왕 중 한 명일 뿐....

『삼국사기』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그들의 대외 역학관계가 객관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즉 삼국이 중국과 일본, 기타 주변의 둥북아 국가들과 맞물려 어떻게 침략과 방어를 하며 땅을 빼앗고 뺏기는지가 왕조사의 중심으로 기술되지만, 이것 자체를 중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삼국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는 한반도의 영토를 확장해야만 한다는 욕망 아래 기술되거나 계열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당대까지는 광개토왕의 이런 업적이 특별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았고, 이렇게 읽어내려 했던 것은 우리의(나의) 시각(욕망)으로 광개토왕을 예단한 것일 뿐이다. 

문헌학의 이율배반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실 문제로써 사람은 항상 현대를 통해서만 고대를 이해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대로부터 현대를 이해하라는 것일까? 더 정확하게는 다음과 같은 점이다. 사람은 자기 체험으로 고대를 설명하고,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고대에 의해 자기 체험을 평가하고 짐작해왔다. 따라서 체험은 문헌학자에게 당연히 절대 전제이다.

- 니체, 『우리 문헌학자들』,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19쪽, 재인용)


치란(治亂)의 역사 : 지극히 정치적인 징험들

『삼국사기』에서 중요한 사건은 무엇인가? 왕조사를 기술하는 역사책들이 그러하듯 당연히 나라가 다스려지고 있는지, 어지러워지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동양에서 역사는 한마디로 하면 치란의 역사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졌는가, 혼란스러웠는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원인을 파헤치고, 이를 통해 후세를 경계하는 것. 사회와 정치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유학자들이라면 역사는 치란에 대한 기억이자 기록인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명적인 발전이나 전쟁의 승리나 부강함은 치란에 부가적으로 오는 효과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의 중심은 ‘그 시대의 훌륭한 공과는 무엇인가? 통치자의 업적은 무엇인가?’보다는 ‘어떤 통치 자질을 지니고 어떻게 백성을 다스렸는가’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시각으로 과거의 역사를 조직했던 것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사실만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정치가 잘 되고 못되는 것, 국가의 안정과 위기, 흥성과 존폐, 존립과 멸망 등의 원인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의 고조의 본기를 읽을 때는 한나라 왕조 사백 년 전체의 정치가 어떠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 역시 공부가 된다.

- 이명학 역주, 여조겸·주희 편, 『근사록』 서울대출판부, 219쪽

선생은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중간 정도에 이르면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그 성공과 실패를 헤아려본 이후에 다시 읽었다. 자신의 생각과 사실이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정밀하게 생각하였다. 역사책을 읽는 가운데에는 다행히 성공하는 사례도 있고 불행히 실패하는 사례도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지 성공한 사례만을 옳은 것으로 여기며 실패한 사례는 그른 것으로 보는데, 이는 성공한 경우에도 옳지 않은 것이 있고 실패한 경우에도 옳은 것이 있다는 점을 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근사록』, 220쪽

역사책을 볼 때는 성현이 경전을 통해 보존해 준 바의 정치가 잘되고 못되는 단서와 원인, 그리고 군자가 때에 맞추어 관직에 취임하고 물러나는 자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격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근사록』, 220쪽

우리가 보는 역사는 어떠한가? 정치의 성공과 실패, 정치적 시시비비를 찾아내기보다는 지극히 문명적이고 지극히 근대적이다. 어떻게 원시, 고대, 중세의 탈을 벗고 근대 문명사회로 진입하는가? 얼마나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이 존재했는가? 그리고 그런 비합리적인 방식이 어떻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는가? 혹은 인간 이성 능력이 어떻게 확장되어 나아가는가?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우리는 『삼국사기』에서도 문명화의 과정을 찾는다. 근대로 이어지는 일직전상의 궤도!


그러나 『삼국사기』 특히 「고구려본기」는 통치자의 업적보다는 통치자의 자질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인지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서 보기 힘든 왕에 대한 ‘서사’가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특정 왕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는 드라마틱한 서사는 『삼국사기』 읽는 사람들이 얻는 의외의 수확물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통치자인 왕들이 입체적으로 들어올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에 애정과 연민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왕의 공적은 부차적이다. 우선은 왕이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하다. 통치자로서 어떤 정치적 자질과 비전을 보여주는가? 민생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가? 굶주림, 핍박이 없는 사회, 다스려진 정치를 위해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고구려본기」의 중요 쟁점이다.

고구려의 왕위는 반드시 장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는 않았다. 주위의 신임을 받는 왕족이 왕위를 계승했다. 왕자 중의 한 명이 왕위를 계승하거나, 왕자가 어리면 왕의 동생이 계승하거나. 3세기 무렵 고구려의 지배층은 족제적 색채가 농후한 다섯 정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왕도에 모여살며 일체가 되어 외방의 여러 읍락이나 이민족들을 지배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5부 지배 공동체라 불린 이유이다. 이 5부는 계루부, 순노부, 절노부, 관노부, 소노부라 불린다. 왕은 계루부에서 주로 나왔고, 왕비는 절노부에서 나왔으며, 소노부는 구왕족 세력이었다고 하니, 5부 상호간에는 세력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력한 부의 수장인 고추가는 원래 왕만이 할 수 있는 종묘나 사직의 제사를 지내며 왕과 마찬가지로 가신단과 같은 것을 거느렸다. 5부의 세력 판도는 소노부→계루부→순노부 순으로 변화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3세기 이래 일관되게 계루부가 왕족으로 고구려왕을 배출했다. 이러한 5부 사이의 팽팽한 역학 관계 속에서 왕이 어떻게 초월성을 획득하는가가 고구려 왕권의 과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왕은 중앙 전제를 획득하지 못한 채, 아니 족성적 질서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렇듯 고구려는 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정치체였다. 그래서인지 「고구려본기」는 왕과 왕자들, 왕과 동생들, 왕과 왕후, 왕과 신하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기사를 많이 싣고 있다. 야사처럼 느껴지는 이런 이야기들이 왕의 통치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에 흡수되어 정치권력 안에서 인척관계, 군신 관계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정치성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고구려본기」는 맹자의 정치학의 실험대처럼 느껴진다. 「고구려본기」에 구현된 정치학의 원리,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다다음주에 이어집니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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