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의 초상 : 정치란 무엇인가? ②
<낯설기만 한, 고구려 왕들에 관한 이야기>
❙ 어린 왕자, 무휼의 지혜
유리왕의 셋째 아들, 동명성왕의 손자인 무휼은 6살부터 국정에 참여한다. 아니 이럴 수가! 그리고 11살에 왕위에 올랐다. 바로 대무신왕(4-44년)이다. 김부식은 무휼을 이렇게 평가한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뛰어나게 큰 지략이 있었다.” 겨우 6살 때 무휼은 강대국의 압박을 물리칠 정도로 지혜로웠다.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작은 나라인 고구려가 큰 나라 부여를 섬겨야 한다고 협박했다. 왕을 비롯하여 신하들은 부여에 굴복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무휼이 나서서 사신에게 말한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도 재주가 많았던 바,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여 부왕에게 참소하여 말을 먹이게 하였다. 이 모욕 때문에 불안해서 부여를 탈출하셨다. 이제 대왕이 전날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어 우리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청컨대 사자는 돌아가서 대왕에게 보고하되 ‘이제 여기 포개 쌓은 알이 있으니 만일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전하라” 하였다.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던진 무휼 왕자. 대소왕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노파가 불려와 이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포개 쌓은 알은 위태한 것이니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가 편안할 것이다.” 이 말인즉슨 위태로운 너희 나라나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지금 대소왕의 형국이 자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남의 나라를 넘보는 꼴인 것이다. 내정을 탄탄하게 하여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나라로 만든다면 부여를 섬길 수 있다고 말하는 무휼은 참으로 대범하기 그지없다.
대소왕은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불과 6살의 어린 왕자는 이토록 지혜로웠다. 상대의 약점을 꿰뚫어보는 예리함.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기지.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6살 아이가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다니 놀랍기 짝이 없다. 우리가 아이들을 너무 아기 취급하는 것인가? ‘기지와 관찰력’은 나이와 상관없이 이미 출중할 수 있는데, 6살이라고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연륜은 살아낸 햇수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필요하니까 길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을 경악시킨,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지혜로운 어린이 무휼은 10살 때에는 부여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뛰어난 계책으로 고구려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젠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능력에 따라 일을 하기도 하지만, 인연 조건에 따라 사람의 잠재된 능력이 개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무휼 왕자는 뛰어난 지혜로 왕위를 계숭한다. 대무신왕, 무휼의 지혜는 통치할 때도 빛을 발한다.
3년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시켜서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냈다.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말하기를 “까마귀는 원래 검은 것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고,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는 두 개인 것은 두 나라를 병합할 징조이니 왕께서 고구려를 병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었다. 대무신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대답했다. “검은 것은 원래 북방의 빛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빛으로 되었으며 그리고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이를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구나.” 대소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대소왕 시절 부여는 고구려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왕자 시절의 무휼에게 이미 한 차례 망신당했던 대소는 왕이 된 무휼에게 또다시 여지없이 박살난다. 대소는 참으로 가볍다. 길한 징조의 까마귀를 봤으면 고구려를 칠 준비를 하면 될 텐데, 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 너희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떠벌린다. 자고로 징조만 믿고 까부는 자가 승리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무휼은 대소왕의 이 경솔함을 비웃는다. 까마귀의 징조 따위에 기죽지 않고, 해석을 바꿔 버린다. 병탄의 징조가 될 까마귀를 고구려로 보냈기 때문에 앞으로의 흥망은 까마귀가 있는 쪽에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상황의 전복. 이 역설적인 해석으로 오히려 부여왕을 쫄게 만드는 대담함. 약소국이라도 이 정도의 당당함은 있어야 밀리지 않는다.
얕보지 마라!
❙ 통치자의 요건, 잘못을 아는 자!
대무신왕의 당당함과 대담함은 행운을 불러온다. 대무신왕은 4년 12월 비류수에서 저절로 밥을 짓는 솥을 얻는다. 상당히 신화적이지만 천지기운도 대무신왕을 도왔던 것이다. 대무신왕은 솥과 함께 힘센 사람까지 얻는다. 솥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자청하는 한 남자를 얻은 것이다. 이 남자는 솥 주인이었던 여인의 남동생이었다. 왕은 이 남자에게 솥을 짊어졌다는 의미로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내려준다. 신비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왕은 이물림에 이르러 금으로 된 옥새와 병기를 얻고, 키가 9척이며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나는 북명의 괴유, 그리고 긴 창을 지닌 적곡의 마로라는 인재까지 얻는다.
대무신왕이 병기와 인재를 구했으니, 전쟁에서 이길 것은 자명한 일. 5년 2월 부여의 1만 군졸을 물리치고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그러나 부여의 백성들은 왕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부여백성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고 끝까지 항전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구체적인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무신왕이 부여 백성들에게 잔인하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부여 백성들에게 대무신왕은 결코 대소왕보다 좋은 왕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무신왕이 힘으로는 이겼지만 부여의 민심을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이다. 행운도 이어서 오지만 불운도 이어서 온다. 대무신왕은 부여 백성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골구천의 신기한 말과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솥까지 잃어버린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으니, 천지기운도 대무신왕 편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늘의 도움도 효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무신왕 본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무신왕의 왕다움은 패배의 끝에서 찾아온다. 승리했다고 다 좋은 왕은 아니다. 패배 속에서도 통치자의 비전을 터득한다면 기회는 다시 찾아온다. 대무신왕은 이 모든 결과를 자신의 허물로 돌린다. “덕이 없는 사람으로 경솔하게 부여를 쳐서 비록 그 나라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했으며, 군사와 물자들을 많이 잃었으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민심이 중요함을 안 것이다. 이에 왕은 죽은 자를 조상하고, 다친 자들을 문병함으로써 백성들을 위로했다.
"덕이 없는 사람으로,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대무신왕은 신하들을 탓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혜롭고 용맹하며 천지기운이 도와주더라도 사람이 교만에 빠지면 대세는 달라진다.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한다. 그러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와 달처럼 밝게 드러내고 고친다면 기회는 다시 온다. 그러니 조심조심, 자신을 밝게 성찰하면서 일에 임해야 한다. 대무신왕의 미덕은 잘못을 돌아본 데 있는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한 자만에 빠지기도 쉽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게 어렵다. 잘못을 인정하고 겸허히 백성들의 뜻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통치자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백성들은 왕의 성덕과 정의에 감동하여 국가사업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왕의 솔직함이 백성을 움직인 것이다. 잘못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인정하는 일, 통치자의 중심 자질임에 틀림없다. 이뿐이랴? 다음해 3월 신기한 말 거루가 부여의 말 1백 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 차희곡까지 저절로 이른다. ‘하늘도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 고치는 자를 돕는다.’ 인간에게 늘 기회는 있다. 자신을 바꿀 기회. 이 자명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민심을 헤아리는 통치자가 될 수 있다. 쉬우면서도 이 어려운 진실을 깨우친 대무신왕은, 달라진다. 9년 겨울 개마국을 쳐서 왕을 죽이되, 그 나라 백성들의 목숨을 해치거나 재물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영토를 넓혀서 대무신왕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대무신왕은 지혜와 용기와 자성의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영토를 늘릴 수 있었고 백성을 늘릴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서 진단한, 통치자가 갖춰야 할 최우선의 미덕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 그 왕에 그 신하!
이런 시대, 대무신왕만 훌륭했던 것은 아니다. 그 왕에 그 신하라는 말이 딱 맞는다. 15년 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5년 봄, 3위 대신 구도, 일구, 분구 등 세 사람을 쫓아내어 상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세 사람이 비류부장으로 되었을 때에 탐욕스럽고 야비한 짓을 일삼아 남의 처첩과 우마와 재물을 함부로 빼앗으며 만일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매를 치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 원망하였다. 왕이 그들을 죽여 버리려고 하다가 동명왕의 엣 신하들을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하여 내쫓고 말았다.
남부자사 추발소(鄒㪍素)로 하여금 세 사람을 대신하여 부장이 되게 했다. 발소가 부임한 뒤 따로 큰 집을 짓고 살면서 구도, 일구, 분구를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와서 말했다. “우리들은 소인이라 짐짓 왕의 법을 위반하였으니 부끄럽고 뉘우침을 금할 수 없다. 공은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자신을 갱신케 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발소가 불러올려 한 자리에 앉아서 말하기를 “사람이란 허물이 없을 수 없으나 잘못하여도 능히 고치게 되면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더불어 벗을 삼으니 구도 등이 감동되고 부끄러워 다시는 고약한 짓을 하지 않았다. 발소에게 대실(大室)씨라는 성을 주었다.
"추발소야, 참으로 잘하였구나"
선대왕의 공신들이 후임 왕의 시대에도 청렴하고 유능하면 좋으련만 보통 그렇게 이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공적만 믿고 권세를 휘두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 번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낮은 자리로 내려와 고결하고 소박하게 살기가 결단코 쉽지 않은 듯하다. 자만 때문에도 욕심에 사로잡혀서도 끝내 사고를 친다. 대무신왕 시대에도 할아버지 동명왕 때의 신하들이 권세를 믿고 설쳤다. 대무신왕은 이들을 죽이지는 못하고 내쫓아 버렸다.
왕은 구도, 일구, 분구 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여 추발소를 비류지역 부장으로 임용한다. 비류부장이 된 추발소는 이들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왕이 내쫓았더라도 전임자이자 선배이니 인정상 가까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추발소는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대무신왕은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도 출중하다. 추발소는 큰 집을 지어놓고 이들을 마루에도 오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게 하였다. 추발소는 이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갱신하겠다고 하자, 서슴없이 벗으로 대우해주었다.
처벌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이 잘못인지 스스로 알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똑같은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공자님도 맹자님도 실수는 할 수 있지만 똑같은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무신왕 시대,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자격 요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혜와 당당함도 미덕이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칫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욕심과 망령’을 성찰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희망은 있는 것이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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