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활보활보] 여유롭게 직면하기


각자 할 일이 있다



겨울이 왔다


갑오년, 겨울이 되었다. 초여름 일을 구하려고 여러 이용자를 만났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G언니, H언니와 겨울을 같이 보내고 있다. 외출하려고 언니들의 옷을 갈아입을 때면 겨울을 더 확실하게 느낀다. 여러 겹 옷을 입혀주고 거기에 두꺼운 잠바까지 입혀주면 반팔 옷을 입는 여름이 그리워진다. 일한지 8개월이나 됐지만 옷을 두껍게 입혀주는 건 여전히 어렵다. ‘8개월이나 됐는데 옷 갈아입혀주는 게 왜 어렵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G언니의 근육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팔에 옷을 끼려면 노하우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 노하우는 타이밍인데, 언니가 팔을 살짝 돌릴 때 쑥 집어넣어야한다. 하지만 이 노하우가 옷을 두껍게 껴입을 때는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밖은 추우니 옷은 꼭꼭 껴입어야 한다. G언니는 휠체어를 이용해서 움직임이 없다보니 옷을 많이 껴입어도 춥기 때문이다.


겨울엔 많이 입어야 한다.



수술해야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언니의 손이 얼어서 운전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이번 겨울은 이상하게 허리와 목이 아파서 더 운전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이런 증상이 G언니에게 찾아온 건 올해 초여름이었다. 언니는 그때 쯤 물리치료를 받지 않기 시작했다.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물리치료를 하는 데서 오는 통증을 피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무튼 물리치료를 그만두면서 언니의 통증은 심해졌다. 통증이 심해진 언니는 병원에 찾아갔고 ‘척수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검사를 받으면서 다른 활동보조분이 내가 모르던 사실을 알려줬다. 그 사실은 언니가 아프기 시작하던 때가 바로 내가 언니 활동보조를 시작할 때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처음 일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노하우가 없었던 나는 언니를 몇 번 넘어지게 했다. 그 후로 언니는 나한테 의존하기보다는 최대한 자신이 움직이려고 했다. 오히려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언니의 말이 진심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언니는 혼자 움직이려면 많이 힘든데 내가 그렇게 만든 건 아닌가.’, ‘그러다가 허리 근육통이 더 심해진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단을 받고나서 다시 정밀검사를 했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언니의 나이가 제일 큰 원인이고 이 병은 원래 뇌성마비들에게 자주 찾아온다고 했다.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세로 있어서 척수에 있는 신경이 눌린 것이라고 한다. 의사의 말을 듣고 다행이다 싶었지만 앞으로 언니 이동보조를 할 때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술하기 정말 어렵다


진단을 받고나서 수술을 준비를 하고 있다. 수술준비에 필요한 서류들은 왜 이리 많은지. 인성 없는 내가 서류를 처리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나는 화요일, 목요일에만 일을 해서 무슨 서류를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해서 전해들어야한다. 그런데 G언니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언니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안 그래도 서류와 친하지 않은  나에게 위기가 닥쳤다.


서류... 서류... 어렵다.



한번은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서류들을 준비했냐고 물었다. 하지만 전혀 듣지 못한 얘기라 당황했다. 당황한 나에게 병원 사람이 동사무소에서 서류들을 준비해서 넘겨줘야한다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듣고 동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물으니 동사무소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병원과 동사무소, 둘 사이에서 서류를 전해 줘하는데 확실치 않으니 가운데에서 나는 또 당황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 G언니의 친언니분이 전화로 계속 물어보시는데… 결국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라고 G언니에게 말해버렸다. 옆에 있던 남편 분도 답답했던지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나와 남편분의 표정을 번갈아보더니 “천천히 해~”하고 웃었다.



여유롭게 직면하기


분위기가 풀리면서 묘했다. 남의 일인 마냥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언니가 신기했다. 평소 언니의 말투는 항상 느리고 여유로운데 그 모습은 수술을 앞에 두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술하는 건 언닌데, 어떻게 여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빨랐다. 일이 빨리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난 참지 못했다. 그래서 사건을 직면하지 못하고 휙 스쳐 보내는 게 대다수였다. 사건을 너무 빠르게 해결하려고 하면  그에 대한 압박감도 심해졌다. 사건이 터지면 해결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상황을 놓치고 정신줄도 함께 놓치는 것이다.


그러던 중 G언니의 학교(언니는 장애인 야간학교를 다닌다)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장애인 콜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언니가 “아프려나?”하고 조용히 말했다. 언니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여유로울 뿐이었다. 그 여유가 나에게도 전해졌다. 처음엔 활동보조에게 다 맡긴 것 같았고 무책임한 것 같았다. 자신의 일에 관심이 없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언니의 서류를 처리하는 것, 이게 나의 일 아닌가. 언니는 자신의 입장에서 수술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서를 처리하는 것과 수술을 받아들이는 것, 각자 따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수술은 아마 내년 초쯤에 할 것 같다. 그래서 추운 겨울을 언니와 함께 병원에서 보낼 예약이다.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이 될 때쯤이면 날씨도 같이 풀릴 것 같다. 날씨가 풀리면 언니한테 바깥바람 쐬러 나가자고 말해야겠다.


글_한라(나는 백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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