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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보 활보(闊步)

[활보활보] 당당히 ‘비켜주세요’ 라고 할 수 있기 위하여

by 북드라망 2016. 8. 5.


첫 알바가 활동보조, 다행스럽게도




❚ 세상에 나오니 돈이 필요하네


작년 10월, 그때가 큰 여행가방에 이삿짐을 구겨 ‘옇고’ 서울로 올라온 날이다. 극단 공동체 생활은 했지만, 그것이 나의 일도 나의 아르바이트도 아니었던 어중간한 생활을 해온 나. 몸을 너무 안 움직였던 탓일까. 그렇게 몸이 무거워지다 보니 마음도 둔해져버린 탓일까. 단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문제야’라고만 생각했던 음악일도,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던 때가 있었다. 2014년, 연초에는 ‘청마의 해’라며 기분 좋게 연하장을 썼었는데. 나를 태우고 달려주리라 생각했던 그 청마한테 뒷발로 한 대 걷어차인 것 같은 해였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지금까지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의 ‘가치와 필요성’의 요구대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내 욕망의 목소리를 따라가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너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냐?’ 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세상에 그리 많지가 않다. 하지만 그 답이 빈약하면 결국 창작도 잘 안 된다는 경험을 숱하게 한 바다. 내 속에 욕망은 없고 이유만 잔뜩인데, 창작을 하는 일을 하겠다고 덤볐으니 나도 참 많이 힘들었다 싶었다. 그 생각을 하고나서 내가 하던 공부도 일도 전부 놓아버리고 농땡이를 피우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의 다른 생활을 상상했다. 그리고 나름의 돌파구-음악산업에 속한 다른 대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 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암묵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하던 일도 놔두고 서울로 올라오려면 뭔가 이유라도 있는 게 좋을 테니까. 근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맨 처음 소개를 받아서 인턴직원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녹음실에는 화재가 났고, 기다리다 못해 소개시켜 주신 분을 직접 찾아가니 웬걸, 처음과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결국 인맥 없이 이력서를 몇 군데 넣었지만 나를 써준다는 곳은 없었다. 현장경험이 좀 있다고 해서 비인가 대안학교 출신 초졸(!)을 허용해주는 곳은 역시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엉키고 엉킨 매듭을 풀어내지 못 한 나는, 결국 옛날 어떤 유명한 사람마냥 칼로 매듭을 찍어 버렸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마땅히 정해진 일도 없이 그냥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나의 알바전선이 시작되었다. 감이당의 귀인, 장금쌤과 관식, 준오형님이 소개해 주신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그러니까 ‘활보’일로 나의 첫 알바 스타트를 끊었다.



❚ 당당히 ‘비켜주세요’ 라고 할 수 있기 위하여


활동보조 중개센터의 문은 자동문이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일 여유도 없이 알아서 열려버렸다. 누군가가 약간 어눌한 목소리로 어서오세요- 인사를 했다. 사무실의 절반이 장애인이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밑으로 내리느라 나는 더욱 조신해졌다. 지금은 서로 농담 따먹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는 사이지만.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두 가지 극단을 넘나들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동정심과, 근데 다가가면 병이 옮을 것 같다는 께름칙함. 그래서 되도록 그들이 내 눈에 들지 못하도록 멀리 피해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저들은 센터에 정식으로 채용되어 매달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인데 나는 돈도 없고 학벌도 없는 팔다리만 멀쩡한(!) 그냥 알바생일 뿐이었다. 나는 일자리가 꼭 필요했다. 제발이 저렸던 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내 학력을 실토하고 눈치를 봤다. 그러자 직원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요. 오히려 선생님 같은 젊은 남성분이 모자라서 저희는 더 좋지요.

 초졸 구직자한테 선생님이라니.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어 힘이 났다.


호, 혹시 천사이신가요?



바로 며칠 뒤 나의 첫 활보가 시작되었다. 내가 맡게 된 이용자는 그 센터에서 일하고 계시는 직원 J쌤. 뇌병변 1급에 언어장애가 있는 J쌤은 혼자서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말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딘가를 단단히 잡으면 잠깐 동안은 일어설 수 있고 전동칫솔을 손에 쥐어 드리면 양치 정도는 하실 수 있으시지만, 혼자서 출근을 하거나 스스로 식사를 하실 수는 없다. 한마디로 생각과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말을 안 듣는 몸’의 소유자이신 것이다. 대신 전동휠체어가 그의 발이 되고 나 같은 활동보조인의 손이 그의 출근과 식사를 돕는다. 


활보 첫 날, 어제 실습참관을 하면서 해야 할 일을 순서까지 매겨 자세히 적어놓기는 했다. 근데 막상 실전으로 들어가니 순서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J쌤은 하고 싶은 말 한마디 하는데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그래서 그날 정시에 출근하는 것은 나나 J쌤이나 둘 다 포기했다. 대신 J쌤의 요구를 천천히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일단 세면대에 온수를 받아주세요, 웃옷을 벗길 때는 오른 팔부터 빼주세요, 머리를 말릴 때는 두피까지 바짝 말려주세요...... 


나는 내가, 나름대로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하고 싶은 말을 쉽사리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자니, 처음엔 무지 안쓰러웠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점점 거부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목젖이며 이빨이 너무 잘 보였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일까? 보기 싫고 듣기 힘드니까 그냥 말을 하지 말라는 감정이었을까? 인간사회에서 말은 곧 힘이자 권력이고, 예부터 사회적 약자들은 말할 권리를 빼앗긴 자들이었다는 구절이 생각났다. 나도 역시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 인간관계에서 느꼈던 불이익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런 내가 J쌤에게 그냥 조용히 하고 있을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마음속으로 ‘갑질’을 했던 것이다.


말과 관련된 나의 무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활보 첫날, 휠체어를 운전하며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제가 굳이 외출을 해서 여러분들에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J쌤 앞으로 대신해 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왜 죄송해야 했을까. J쌤이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비장애인 한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에 비해 휠체어가 더 크기 때문에 그랬을까? 휠체어는 그의 다리와 같은 것인데? 아마도, 나는 J쌤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 말하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을 컨트롤하기 위해 온갖 용을 다 쓰는 모습이 ‘정상인’들에게 폐를 끼치므로 그것에 대해 지레 내가 먼저 사과를 했을 테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같은 헛소리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아, 저 말을 했던 내 입을 막아버렸으면...


그 다음 주에 받았던 활동보조인 교육이 끝나고,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남았던 것은 바로 그때 내가 했던 말실수였다. 그 뒤로 나는 활보를 하면서 되도록 당당하게 다니려고 노력한다. 장애인을 장애인 보듯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먼저 그를 쳐다본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는 ‘잠시만요, 좀 비켜주세요’로 바꾸었다.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죄송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의 무지로 인한 것이라면 꾸준히 참을성 있게 가르쳐 주어야 할 테고, 만일 그것이 그들의 못된 마음이라면 그에 맞서서 싸워야 할 테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레 먼저 죄송해 버리는’ 내 안의 무지를 아는 마음이 아닐까. 우리가 진짜 죄송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인간극장은 TV 속에만 있다


장애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무지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장애인을 인간극장의 등장인물로 바라보는 순간, 그러니까 역경을 딛고 살아가는 순수하고 착한, 고정적인 캐릭터로 그들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을 진정으로 대하기는 어려워진다. 나도 활보 초기엔 그런 식의 사명감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서로의 컨디션이 좋다면야 그런 방식으로도 별일이 없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인지라 가끔 짜증을 낼 수도 있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활보의 컨디션이 나쁘면 어느 날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는 이용자의 입모양이 이상하게 짜증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역시 장애인을 TV나 영화로 ‘소비’만 했지 실제 옆집에 살고 있는 장애인 이웃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리라.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 일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단지 몸이 좀 달라서 일상생활이 불편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 일이다. 이용자와 활보 간에 트러블이 생긴다면, 상대방을 살펴서 대화로 풀어야 하는 일이다.


장애인들을 TV나 영화로, 이미지로 '소비'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손가락을 못 쓰는 분이 마우스 하나만 가지고 글자를 일일이 찍어가며 보고서를 만드는 모습이라거나, 머리 말고는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안경에 장치를 달아서 머리를 까딱거려가며 PPT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만든 문서가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아파트 진입로를 경사로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는 모습도 보고, 그러다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다시 그냥 옆집 아저씨로 돌아오는 모습도 본다.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들은 불편한 몸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수행을 하면서 산다. 그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때가 많다면, 그만큼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을 힘들어하므로, 그만큼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두터운 下心(하심)을 가질 수 있겠지? 녹음실 일이 꼬여버린 것도, 어쩌면 전부 나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나의 첫 활보날, 전동휠체어를 조종하다 자꾸 바퀴로 내 발을 깔아뭉개는 나에게 J쌤이 해주신 말이 떠오른다. 고마우신 J쌤. ‘찬율씨! 제 안전이 아니라 찬율씨 안전이 우선이예요! 저는 다쳐도 찬율씨는 절대로 다치면 안 돼요!’


글_전찬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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