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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

'자연'에 대한 몇 가지 깊은 오해들

by 북드라망 2012. 3. 7.
자연이 순수하다고?

신근영
(남산강학원 Q&?)


'넌 자연스러울 때가 제일 예뻐'

TV 속, 자막이 뜬다. ‘Nature Republic’ 새 소리가 섞인 음악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 하늘거리는 하~아~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연예인이 숲속에 누워 있다. 일어나 앉아서는 꽃향기를 맡고 나무에 걸터앉아 물속에 발을 담그더니, 숲속을 맨발로 거닌다. 자외선 차단제 화장품이 잠시 비추더니,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든 그 여자 연예인의 모습이 비춘다. 곱디고운 컬이 바람에 날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자막. ‘넌 자연스러울 때가 제일 예뻐.’

사용자 삽입 이미지'자연스러운' 피부를 위한 피나는 노력. 먹지 마세요, 피부에게 양보하세요!


‘자연의 순수함’을 모토로 한 화장품 광고다. 오늘 난 그 순수함에 딴지를 걸어 볼까 한다. 제일 예뻐 보인다는 그 자연스러움이란 게 뭘까. 작은 나뭇가지 하나에도 금방 올이 나가버릴 것 같이 하늘거리던 드레스. 수풀 위에 눕고 온 숲속을 돌아다니면서도 티끌 하나 묻지 않는 그 하얀 드레스. 지루함을 참으며 몇 시간이고 미용실에 앉아 있어야 했을 그 컬이 풍성한 머리. 무엇보다도 그 반짝이던 햇빛을 원하는 자에게 권하는 자외전 차단제. 이래놓고 자연스러운게 제일 이쁘다고? 여기 당최 뭐 하나 자연스러운게 있다는 거지? (-_-;;)

괜한 시비라고 할지 모르겠다. 광고라는 게 다 그런 판타지를 보여주는 거 아니냐며…. 맞다. 뭐 이런 광고가 한두 개며, 광고라는 게 그런 판타지를 극대화해 보여주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그 환타지가 광고만의 것일까. 우리가 가진 자연에 대한 이미지는? 그 이미지 역시 광고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자연의 모습이 아닐까? ‘순수한 자연’이란 판타지로 가리고 있는 우리 마음은 뭘까? 딴지를 걸어보자.

자연은 지저분해~

포도에서 추출한 씨가 농축액으로 변신하는 과정.


부모님 집에서 밥상을 차릴 때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식탁을 훔치기도 전에 해야 할 일은 식탁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약 상자를 치우는 일. 그 상자 안에는 치료를 위한 약이 반, 건강식품으로 분류된 약이 반이다. 생선 기름으로 만든 약, 로얄 제리로 만든 약, 홍삼 엑기스, 심지어는 태반으로 만든 약 등등 일일이 확인은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대충 ‘자연산’과 ‘엑기스’라는 것을 내세우는 건강 보조제들이다.


워낙 골골대는 나인지라 당신들은 종종 그 약들을 권하신다. 이건 약이 아니라 자연식품이니 안전하고 건강하다는 말씀과 함께. 그런데 나는 그 자연산 엑기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섬뜩함이 느껴진다. 기름만 쪽 빼내진 생선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로얄제리만 뽑아낸 그 벌집은, 홍삼은…. 인간의 정기만 쪽쪽 빨아먹던 외계인이 나오던 SF 공포물이 오버랩 되는.


좀 생각해 보면 ‘자연산 엑기스’란 모순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엑기스란 필요한 성분만 순수하게 쏘오옥 추출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필요한 성분이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렇게 어떤 성분만을 순수하게 뽑아낸 것. 이것이 엑기스다. 그런데 ‘자연’이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아니 반대로 순수한 것은 자연이 아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로얼드 호프만은 자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실 모든 것은 상당히 지저분하다. 특히 천연적으로 얻어진 것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더 많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
 
ㅡ로얼드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로얼드 호프만에 따르면 화학자들의 고민은 자연이 너무 안 깨끗하다는 것이다. 한 개의 특정 성분만으로, 아니 좀 더 양보해서 몇 개의 성분만으로 이루어진 자연물은 없다. 장수에 좋다는 포도주만 해도 그렇다. 그 향기를 이루는 성분이 900종류가 넘는다고 하니, 포도주 자체야 말해 뭣하겠는가. 그 중 장수에 도움이 되는 엑기스는 뭘까. 적어도 향과 색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하지만 알 게 뭔가. 그 향이, 그 색이 우리 신경을 자극해 장수에 도움이 되는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인지.

자연은 잡종을 좋아해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자연에서의 막장드라마, 어쩌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_-*


고양이를 데리고 한 재미난 실험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각기 다른 종인 열 쌍의 고양이가 있다. 그 중 수컷만을 골라 투명 상자에 넣어 한 쪽에 둔다. 그러고 나서 암컷 고양이를 풀어주고 수컷을 택하게 하니 열 마리 모두 자기와는 다른 종의 수컷 고양이를 선택했다. 반대로 해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실험해도 마찬가지였다. 고양이들은 결코 자기와 같은 종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연은 잡종을 좋아한다. 순수함은 자연이나 생명과는 거리가 멀다. 순수하지 않기에 자연은, 생명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천연물질은 왜 순수하지 않을까?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오랫동안 진화를 통해서 매우 복잡한 상태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한 그루의 포도나무나 당신의 몸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천 종류의 화학반응과 수없이 많은 화학물질이 필요하게 되었다. 자연은 만물 수선공과 같아서 식물이나 동물의 생존방법은 수백만 년 동안의 무작위적인 실험의 결과로 확립된 것이다. 한 조각의 생명체에도 놀랄 정도로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분자가 필요하다.……단순함은 인간의 약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동하는 이 세상에 적합할 수 없다.
 
ㅡ로얼드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사실 우리는 자연이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캠핑을 가는데 하얀 드레스를 챙겨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자연의 순수함이란 깨끗함과는 다르다고. 그 순수함이란 자연이 어떤 분별심도 없이 움직이는 데 있다고. 맞다. 자연이 순수하다면 그런 순수함일 거다. 나쁜 놈이라고 태양이 그 빛을 거두지 않듯이, 착한 놈이라고 더 많은 빛을 주지 않듯이, 자연은 분별심에 이끌려 주고 말고 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점 말이다. 그 공평무사의 움직임이 자연의 순수함이라면 나도 한 표~.

하지만 이렇게 공평무사의 순수함에 한 표를 던지고 나니 그것에 또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여름이면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에 넘쳐나는 강물을 볼 때, 지진으로 건물들이 무참하게 주저앉을 때, 태풍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논과 밭을 볼 때 ‘오~ 순수한 자연!’이란 말을 외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런 자연 재해를 제대로 다룰 수 없던 시대에 경이로운 자연, 어두운 자연은 있을지언정 순수한 자연은 없었다. 순수함이란 말이 자연의 이런 모습을 담기에 적절치 못하다면, 대체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한 자연’이란 무엇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순수함, 그 불편한 진실

어떤 식으로든 자연=순수함의 도식은 어색하다. 자연이 잡종을 좋아한다는 의미에서도, 자연이 무자비하다는 점에서도 ‘순수함’이란 단어는 자연의 수식어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자연에서 순수함이란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난 그 순수함에 어떤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로얼드 호프만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약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불편한 진실 말이다.

"환경은 박테리아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들의 영향이 너무 골고루 미쳐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생물의 영역이고 또 어디서부터 비생물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꼬집어 말하기가 굉장히 곤란하다." (린 마굴리스 외, 『마이크로코스모스』, 121쪽)


처음의 그 TV 광고 속 자연으로 돌아가 보자. 반짝이는 햇빛, 볼을 스치는 바람, 상쾌함이 느껴지는 푸른 나무들이 그리는 순수한 자연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순수한 자연에 혹해선 우리는 잊는다. 햇빛이 품은 과도한 자외선을, 바람에 섞인 서걱거리는 모래를, 푸른 나무 위에 얼룩진 제초제를. 아니, 그 도를 넘는 자외선을 만드는, 황사 바람을 불러오는, 동식물들에 온갖 약품들을 뿌려대는 우리의 일상을 잊는다.


순수한 자연이란 멋드러진 이미지 뒤에 숨은 우리의 일상. 편리함을 위해 맘껏 자동차를 타고, 실컷 고기를 먹으려고 가축을 대량 사육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곳에서는 볼 필요가 없다. 돈이 된다면 나무고 강이고 온갖 곳을 파헤쳐 개발을 일삼고, 보기 싫고 귀찮은 것은 한 번에 싹 쓸어버리려 제초제를 구입하는 우리의 탐욕 또한 마주할 필요가 없다. 순수한 자연이란 일종의 면죄부다. 우리가 행한 자연에 대한 엄청난 횡포를 보지 않으려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약한 마음에 주어진 면죄부 말이다.

이 순수를 가장한 탐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근래 유행하는 자연을 닮은 아파트란 거다. 수십 년 된 나무들을 산에서 파내 오고, 온갖 돌들을 모아 멋지게 장식하고, 모터를 돌려 흐르는 냇물을 만들어 놓은 아파트 단지. 제초제와 살충제 덕분에 허투루 자란 잡초도, 성가시게 하는 곤충도 없는 그 정원. 밤이면 온갖 조명으로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는 것 또한 필수다. 그 곱디 고운 정원을 장식하는 마지막 것은 울타리. 우리 아파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들어 올수 없게 철통보안을 자랑할수록 집값이 비싸지는 이 불편한 진실. 그렇게 내 눈 앞에 긁어모은 자연을 보며 하는 말이 ‘아~순수한 자연!’이란 감탄사가 아닐지.

여하튼 순수한 자연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니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런 순수한 자연은 탐욕이 없으면 불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순수한 자연을 만끽하기 위한 필수 패션 아이템들은 잊지 않는 게 좋을 듯. 우선 광고 속에 보이던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다. 다음으로는 눈만 빼꼼이 보이는 신종 마스크를 두른다. 그래도 불안하니 검은 색 차양이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린다. 여름이라면 팔에 끼는 자외선 차단 토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혹 쉴 때를 대비해 일인용 야외 간이 방석도 가방에 쏘옥. 이 정도는 해줘야 순수한 자연을 거닐 블링블링한 외계인 패션이 완성된다는 걸 잊지 말자구요~. 그리고 하나 더. 이 모습이 바로 순수한 자연에 담긴 ‘넌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예뻐’의 의미란 것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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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 10점
로얼드 호프만 지음/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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