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안의 인턴을 깨워라
- 좌금환과 인경약
잘 나가는 한 온라인 쇼핑몰 회사에 70대 인턴이 채용되면서 영화 <인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젊고 유능한 CEO인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은 자신의 패션 쇼핑몰을 창업 1년 만에 직원 220명의 중견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 시켰다. 회사는 사회봉사 차원에서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그 과정에서 은퇴한 70대 노인인 벤 휘태커(로버트 드니로)가 줄스의 비서로 채용된다. 줄스는 천천히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캐주얼을 좋아하며 메신저로 지시를 내리는 활동적이고 젊은 CEO이고, 벤은 정장을 차려입고 격식을 따르며 침착한 스타일의 늙은 인턴이다. 둘은 나이의 차이만큼 많은 점에서 달랐지만 줄스는 벤의 지혜롭고 따뜻한 삶의 태도에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한편, 줄스는 외부 CEO를 영입하는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투자자들은 노련한 외부 CEO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길 원했고, 줄스는 영입한 경영자가 모든 걸 자기 방식대로 바꿀 거라면서 투자자들의 제안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줄스의 동료인 카메론은 그녀를 설득했다. 회사가 너무 커져서 우리가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결국 줄스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투자자들이 선정한 CEO 후보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만난 후보는 줄스의 운영방식과 완전히 달랐고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며 성차별주의자였다. 줄스는 더 괜찮은 후보를 찾아야 했다. 나는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줄스가 찾는 그 적임자가 벤이 아닐까하고. ‘인턴’이라는 영화의 제목과 연로해진 로버드 드니로가 주는 아우라가 만나면 뭔가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니까. 낮은 지위의 주인공이 성공을 이루는 각본은 누구나 예상해봄직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상투적인 반전은 없었다.
사장님, 저 계속 인턴하게 해주세요
벤은 ‘인턴’의 지위를 넘지 않았다. 줄스의 운전기사이자 비서로서 제 역할을 했고, 그녀의 선택을 인정했고 이해했으며, 그녀의 결정을 바꾸려고 개입하지 않았다. 대개의 인턴이 그렇듯이 벤도 비슷한 직급의 직원들과 가깝게 지냈다. 이상하리만치 주인공인 벤의 존재는 영화의 스토리를 바꿔놓는 구조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벤이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의 서사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행동이 때론 생각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힘의 확장은 특히 줄스와의 관계에서 주로 일어난다. 벤은 줄스가 해답을 알고 던지는 질문에 그 해답을 환기시켜 줌으로써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줄스가 세 번째 후보를 인터뷰하고 나서 그 후보를 새로운 CEO로 결정했을 때, 줄스는 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가 우리의 의견에 반대해서 자기의 계획을 계속 진행시키려 할 수도 있을까요?”라고. 그러자 벤은 “물론이죠. 그는 CEO인걸요.”라고 대답했고, 줄스는 뻔한 걸 물었다는 듯 멋쩍게 웃는다. 아무리 맘에 드는 CEO라 할지라도 운영의 여러 측면에서 줄스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그럴 때 최종 결정권은 CEO에게 있다는 점을 줄스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벤의 확인을 얻고 나서 줄스는 앞으로 벌어질 냉혹한 현실을 각인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혹시 타협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버리고 마음의 결정을 해야 한다. CEO의 결정을 충실하게 따르던지 회사를 그만두든지, 혹은 투자자들의 권고를 물리치고 CEO를 영입하지 않든지. 벤은 그녀의 선택 방향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어떤 선택이건 단호하게 결정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물론 그의 생각도 있었다. 그는 줄스가 회사를 계속 경영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벤은 그녀가 CEO를 영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에야 맞장구를 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줄스는 아침 일찍 벤을 찾아와서 외부 CEO를 영입하는 문제를 재고해야 할 것 같다고, 그게 맞는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벤은 자신도 그 일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그 누구도 줄스처럼 회사에 전념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며 그녀의 선택을 환영했다. 벤은 선택을 바꿔 놓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에 확신을 갖도록 독려한다. 갈림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은 대개 자기가 갈 길을 알고 있다. 다만 다른 길에 대한 기회비용을 생각하고 아쉬워하며 이 길이 혹시 잘 못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주저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벤은 가려고 했던 길을 주저하지 말고 확신을 갖고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확신은 자기가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든 건 자기 책임이다. 책임을 지는 위치는 주인의 위치다. 예컨대 삶의 여러 상황을 자기 책임으로 여길 줄 아는 것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기 확신을 갖도록 하는 도와주는 일은 상대를 주인 자리로 승격시키는 행위다. 이로써 상대는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며, 동시에 그런 힘을 갖도록 도와준 인도자를 신뢰하고 따르게 된다. 벤을 신뢰하게 된 줄스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벤과 함께 논의하고 싶어 한다. 이제 줄스는 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의 삶의 태도를 배우려 한다.
약물 중에는 인경약(引經藥)이란 것이 있다. 인경이란 ‘경맥으로 인도하다’라는 뜻이다. 각각의 경맥은 특정 장부와 연결되므로 ‘인경’은 ‘장부로 인도하다’라는 말도 된다. 인경약은 방제의 주요 약물을 특정 경맥으로 이끌고 간다. 모든 약은 주로 작용하는 경맥 혹은 장부가 있다. 예컨대 마황은 주로 방광경과 폐경으로 들어가서 약효를 발휘한다. 인경약을 쓰면 특정 부위에 국한된 약물들을 이끌고 병이 발발하는 곳에서 효과를 발휘하도록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길경은 약의 기운을 인후 쪽으로 인도한다. 목감기 등에서 가래와 기침이 동반될 때 인후에서 약물이 작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약효가 하초에서 발휘되도록 하기 위해선 육계 같은 인경약을 쓰기도 한다. 육계는 약들을 이끌고 간과 신장 등 주로 하초(下焦)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약효를 원하는 지점에서 발휘하게끔 인도하는 방제의 네비게이션, '인경약' "간까지는 직진입니다"
좌금환(左金丸)이라는 방제는 황련과 오수유라는 단 두 가지의 약재로 구성된다. 이 방제는 간화(肝火)가 치성하여 위(胃)를 손상시키는 간화범위증(肝火犯胃證)에 사용된다. 군약은 황련이다. 황련은 차가운 성질을 가진 약으로 몸 안의 화기(火氣)를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황련은 비, 위, 심, 간, 담, 대장 등 대체로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약물이다. 그런데 간화범위증에 사용될 때는 화기가 간에 집중되어 있으니 황련의 사화(瀉火. 화를 제거함) 작용은 주로 간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유리하다. 이때 황련의 약효가 간에 집중되도록 돕는 인경약이 오수유다. 오수유는 또한 황련의 차가운 성질이 너무 강해지지 않도록 조절한다. 오수유는 황련과 달리 맵고 뜨거운 약이다. 오수유를 조금 사용하면 황련을 간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몸이 너무 차가워지는 것을 예방하며 또한 매운 기운으로 황련에 의해 위축된 간기가 펼쳐질 수 있도록 돕는다.
인경약은 어디까지나 인도하는 약으로 본격적인 치료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약의 양도 적게 쓴다. 많이 썼다간 군약의 효능을 압도해버릴 수 있다. 요리사를 초대해 놓고 자기가 주방을 차지하게 되는 꼴과 같다. 인경약의 미덕은 군약의 효능이 적재적소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데 있다. 강력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약의 양을 줄여 군약을 배려하면 군약은 인경약을 신뢰하며 그가 이끄는 곳으로 가서 효능을 발휘한다. <인턴>의 벤도 그랬다. 그는 노련함과 세심한 관찰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도왔지만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줄리의 신임을 얻어 본격적인 비서 역할을 할 때도 기존의 비서인 베키를 최대한 배려했다. 그는 비서로서 탁월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도 베키와 호흡을 맞췄고, 그녀에게 공을 넘겼으며, 그녀의 역량이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힘을 낼 수 있도록 물밑에서 도왔다. 열정은 넘치지만 경험이 부족한 줄스를 도울 때도 그랬다. 그는 그녀의 치기 어린 정열을 강압적인 힘으로 제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열이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인도했다. 엔딩 직전, 벤이 공원에서 사람들과 태극권 동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벤을 찾아온 줄스에게 그는 옆으로 오라며 손짓을 한다. 느린 동작을 따라하는 그녀에서 벤은 깊게 숨을 쉬라고 말한다. 숨을 조절하라는 것은 삶의 속도를 조절하라는 뜻일 게다. 그는 강권하지 않고 체득할 수 있는 장으로 이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살다보면 자기를 믿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세이렌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둥에 묶었던 오디세우스처럼 자기 제어 장치를 이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론 자신에게 확신을 주고 스스로를 신뢰하며 선택한 길을 의심 없이 가야할 때도 있다. 이런 결단은 매사에 주저하거나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특히 더 필요한 덕목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벤의 역할이다. 벤이 줄스의 선택에 확신을 주었듯이 자기의 욕망과 선택에 확신을 주는 것이다. 이때는 그 선택에 의해서 잃어야 하는 기회비용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선택의 결과를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운명의 주인이 된다.
결국 이러한 힘은 자기를 확신하고 신뢰하는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삼략>이라는 병법서에서는 “유(柔)한 것은 강(剛)한 것을 능히 제어할 수 있으며, 약한 것은 강(强)한 것을 능히 제어할 수 있다.” (황석공 씀, 이상옥 역해, 「삼략」, 『육도, 삼략』, 명문당, 478쪽)고 했다. 강한 힘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부드러움도 쓸 곳이 있으며, 굳셈도 쓸 곳이 있으며, 약함도 쓸 곳이 있고, 강함도 쓸 곳이 있다.”(같은 책 480쪽) 벤의 부드럽고 지혜로운 전략은 다른 이 뿐만 아니라, 우유부단한 자기 자신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거듭나게 한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주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억지로 자기에게 드라이브를 거는 것보다, 자기 확신을 일으킬 자기 안의 미약한 인턴을 깨워보는 것은 어떨까.
똑, 똑, 똑, 계세요~?
글_도담(안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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