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과 산포의 시야를 단련하다
– 음양의 도와 마행감석탕 –
요즘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열기가 뜨겁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했다는 점이다. 고증된 상황이 맞는지 알 길이 없는 사극과는 달리, ‘응답하라’에서 재현된 과거는 시청자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대부분 확인된다. “아 맞다, 그때는 저랬었지.” 한때 익숙했던, 그러나 지금은 낯선 과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재미는 참 쏠쏠하다. 배역 중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실존인물이 있다. 쌍문동 어느 골목의 다섯 친구 중 한명으로 등장하는 ‘최택’이라는 캐릭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바둑계의 어린 천재다. 그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바둑계의 거물 ‘이창호’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최택의 삶은 통째로 바둑과 함께 존재한다. 그는 밤낮으로 바둑에 빠져 있으며, 희노애락 역시 그 안에서 겪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바둑 밖의 삶에서는 참 무능하다. 실제로 이창호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응팔’에서의 최택은 바둑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옷 단추도 잘 못 잠그고 그 흔한 라면 하나 끓일 줄 모른다. 세상 살아가는 게 서툴다보니 주변사람이 보기에 돈을 다루는 일도 답답해 보인다. 혼자선 아버지의 선물도 살 줄 모르고, 기원 선배에게 덥석 천만 원을 빌려주어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돈은 벌어 뭐하나, 즐기질 못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그에게 이런 부러움 섞인 조롱을 던질 수도 있다.
극 중 천재 프로 바둑기사 최택(왼쪽)은 심지어 젓가락질도 잘 못한다!!
하지만 그는 즐거움을 버리고 바둑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바둑을 두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휴가 받은 15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다시 연습실에 출근했다고 한다. 15일은 발레라는 즐거움을 참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이란 여흥으로 인한 쾌락이 아니라 힘겨운 훈련 속에서 감지되는 보람에 가깝다. 자기단련으로부터 체득된 실력은 흩어져 있는 욕망을 점점 더 그 안으로 수렴시킨다. 실력이 늘수록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욕망의 수위가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돈을 벌거나 쓰는 일이 그에게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를 음양의 논리로도 설명할 수 있다. 수렴된 기운의 바깥은 그만큼 산포된 기운으로 흩어진다. 수렴의 정도가 강할수록 산포의 정도는 커지고 그 밀도는 적어진다.
하나의 욕망이 밀도를 가지면 지속력이 생기고 그 안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사이클을 모두 겪는다. 단맛, 쓴맛을 다 겪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욕망이 다양하게 일어난다면 욕망이 하나로 집중될 때에 비해서 각 욕망들의 수렴력은 약해지고, 이에 따라 욕망의 밀도와 지속력도 약해진다. 욕망의 밀도가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쾌락적인 면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장기간의 여행에서 여행자는 여러 시행착오와 희노애락을 다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반면, 짧은 기간 동안의 여행이라면 여행자는 대체로 주요 관광지를 중심으로 좋은 경치와 맛있는 먹거리를 위주로 즐기고 오기를 바란다.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은 장기간의 지루한 트레이닝을 거쳐야 함을 각오하지만 노래방에 가려는 사람은 그런 과정을 염두할리 없다. 다만 즐길 뿐이다. 이렇듯 밀도가 낮고 양적으로 다양한 욕망들은 가장 쾌락적인 요소만을 취하려는 방향성을 갖는다.
파편처럼 존재하는 이런 양적 흥취들은 대체로 음적인 훈련으로 이어지지 못하며, 삶의 기술로 관리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불안함을 낳는다. 여러 공부를 전전하며 짧은 감동과 자극으로만 지식을 쇼핑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열매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숙살지기를 거친 후에야 제 맛을 낸다. 봄여름의 양적 팽창이 멈추고 음적인 수렴의 시기를 견뎌내야 하는 것. 따라서 공부가 무르익으려면 흥미와 취미의 단계를 지나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지루하고 고독한 시간을 넘어가야 한다. 이때가 양이 음으로 교대하는 시간이다. 양이 극에 이르면 음이 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산다는 것은 이러한 전변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일이다. 삶에서 음양의 전변을 체험하게 되면 그 음양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재미로 시작했던 하나의 공부가 지루함을 넘어서 자기한계를 극복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면, 그는 자기 공부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을 모두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맥락 없이 흥취만 존재하는 파편적인 공부는 양적 쾌락과 연결되어야 할 음적인 고뇌의 끈을 끊어 놓는다. 이로써 양적 쾌락과 대쌍으로 존재하는 음적인 고뇌는 길을 잃고 맥락 없는 번뇌로 둔갑하여 불현 듯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삶의 기술로서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파편적인 쾌락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잠복된 번뇌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함을 유발한다. 또한 짧은 공부로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공허함은 덤이다.
우리는 대개 택이의 명성과 부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명성과 부는 택이의 욕망 한 가운데가 아니라 변방에 있다. 욕망이 닿지 않는 것은 존재감을 지각하기 어렵다.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왕양명의 현상학적 사유와 통한다. 욕망이 닿지 않으니 그와 관련된 결핍이나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택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이다. 매일 집중할 수 있는 하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만해진다.
정상에서의 기쁨은, 길고 험한 산을 오른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겨울이 봄여름의 기운으로 전환되는 것처럼, 음적인 수렴도 극에 이르면 양적 팽창으로 돌아선다. 산만하게 펴져 있던 욕망을 한 데 모으는 고독한 자기 극복의 수행이 음적인 수렴이라면, 거기서 얻은 열매와 씨앗을 토대로 세상과 섞이는 것이 양적인 팽창이 된다. 택이가 세상과 섞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일상의 기술을 좀 익힐 필요가 있다. 젓가락질도 잘 못하는 택이가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은 많다. 그러나 젓가락질과 라면 끓이는 법을 단편적으로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둑을 통해 깨우친 자기 극복의 이치를 세상을 사는 지혜로 응용하는 일이다. <미생>의 주인공인 장그래가 바둑을 배울 때 터득했던 이치들을 사회생활 속에서 적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둑과 한 몸이 되어 만들었던 견고한 세계에 균열이 가야 한다. 장그래가 바둑의 이치를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둑의 장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택이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여전히 잘나가는 현역이고 바둑의 장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바둑 생활과 함께 형성된 의례적인 아우라를 벗어나는 일은 가능하다. 그 의례적 아우라란, 세계적인 바둑기사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위엄, 바둑에 대한 고매한 느낌, 애국심에 의한 부담감 등이다.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바둑을 두는 일이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바둑은 자기를 닦고 단련하는 여러 수행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의례적인 아우라를 떨치고 바둑과 순일하게 섞여 있던 몸에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로 세상의 사건들이 비집고 들어간다. 그렇게 세상의 사건과 택이의 몸이 섞여야 비로소 그의 깨달음이 더 큰 용법으로 확장될 수 있다.
친구들은 최택의 이러한 확장에 도움을 준다. 최택이 큰 게임에서 지고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고 긍정적인 힘을 불어 넣는다. “좋은 경험했다 생각하고 얼른 떨쳐버려” 동네 사람들도 그를 위로하며 힘내라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기소침해 있는 택이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거침없는 막말을 던진다. “너 완전 깨졌다며? 잘 한다 새끼야. 동네 창피해서 어디 다니겠냐.” 심지어 친구들은 이럴 땐 욕을 하는 거라며 그에게 욕을 가르친다. 욕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최택은 욕을 어색하게 따라하다가 친구들과 한바탕 웃어버리고 만다. 참 짜릿한 장면이다. 대국을 오락실 게임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은 친구들의 이 무지한(?) 대응으로 인해, 최택과 합체된 고매한 바둑의 세계에 한 순간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그 균열 안으로 질박함이 스며들면서 순일하고 고매한 세계에 속물적인 혼융이 일어난다. 최택은 그로부터 새로운 세계와 접속을 확대하며 깨우쳤던 이치의 용법을 확장시킬 것이다. 택이가 덕선이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낀 것도 이 무렵부터다.
최택/덕선 커플 화이팅!
음양의 도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욕망이 산포하는 가운데 하나의 집중력을 가지고 세상을 가로지르는 신체를 만들어가고, 또 그 신체에 균열을 내어 세상과 섞이게 되는 이중성. 물론 최택은 또 다시 그 확장들을 수렴해서 혼자 극복해야 하는 고독한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전과는 다른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 길이 승률을 높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승률이 아니라 다른 깨우침이 일어난다는 것. 그것은 미야모토 무사시의 말처럼 시야를 단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고, 때로는 하나에 집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 넓고 멀리 봐야 할 때와 가깝고 세밀하게 봐야 할 때를 구분해 시야를 단련하고,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공명한 상태가 진정한 ‘하늘의 경지’임을 깨닫고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미야모토 무사시, 박화 옮김,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원앤원북스, 154쪽
시야의 단련을 필요로 하는 방제도 있다. 마황행인감초석고탕(이하 마행감석탕)이란 방제가 그 중 하나다. 풍열사나 풍한사가 폐에 침입하면 열이 뭉칠 수 있다. 폐에 열이 뭉치면 기침, 천식, 갈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이때 폐의 열을 끄기 위해서 차가운 약만 쓰게 되면 폐에 뭉친 사기가 찬약의 수렴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폐에 머물러 있는 병은 아직 초기에 해당하므로 맵고 따뜻한 약으로 땀을 내게 하여 사기를 발산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맵고 따뜻한 약을 쓰면 이번엔 폐열이 더 극심해질 염려가 있다. 이럴 때 마행감석탕을 쓴다. 이 방제는 마황, 석고, 행인, 감초로 구성된다. 마황은 맵고 따뜻한 발산약으로 폐에 머물고 있는 사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행인은 폐기를 부드럽게 하여 기침과 천식을 멎게 한다. 그런데 이 두 약은 맵고 따뜻하기 때문에 폐의 열을 다스리지 못한다. 이런 취약함을 석고가 돕는다. 석고는 매우 차가운 성질을 가진 약이다. 폐의 열을 꺼주고 갈증과 답답함을 소멸킨다. 그리고 감초는 이 두 방향성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열을 끄는데 집중하거나 폐의 사기를 내보내는데 급급했다면 부작용이 일어났을 것이다. 시야를 단련한다는 건 이렇게 방향성이 다른 두 벡터를 함께 고려한다는 뜻이다.
주의할 것은 두 벡터를 동시에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으로 집중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외부를 가늠할 수 있다. 예컨대 폐의 사기와 열을 함께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식의 순차가 존재한다. 열을 다스리겠다는 욕망이 먼저 일어난 뒤에 병의 방향성을 깨닫거나, 폐의 사기를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뒤에 열에 대한 해법을 찾게 된다. 따라서 시야를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집중이 먼저다. 하나에 집중할 수 있어야 그 외부가 보인다. 줌인 할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줌 아웃하여 넓게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기에는 사유가 아니라 산만한 시선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
글_도담(안도균)
하나에 집중할 수 있어야 그 외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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