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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톡톡] 재앙을 물리치는 법

by 북드라망 2015. 10. 15.


재앙을 물리치는 법



재앙을 물리치는 해태


광화문에 가면 그 앞을 지키고 있는 한 쌍의 기이한 동물을 만난다. 이마와 눈은 불뚝 튀어나왔고 엄청나게 큰 코 평수를 자랑하며, 드라큘라처럼 이가 양옆으로 튀어나왔다. 거기다 영구 파마라도 한 듯 웨이브가 심한 털이 온몸을 뒤덮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는 통에 제대로 보기가 민망하다. 어떻게 보면 포효하는 사자 같아 무섭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못생긴 할머니가 파마하고 앉아 있는 것 같아 웃기기도 하다. 위엄과 친근함을 동시에 주는 이 기이한 동물은 해태다.


해태는 다른 말로 ‘해치’라고도 한다. 풀이하면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다. 해는 해님의 ‘해’에서, 치는 벼슬아치의 ‘치’에서 왔다. 깜깜한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햇빛이 만물을 비춘다. 세상은 다시 환해지고 추위는 차츰 물러가 따뜻해진다. 햇빛은 만물을 자라게 하고 만들어 내는 원천이다. 이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이렇게 비쳤다. 해는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니까 복덕을 주는구나, 어둠을 물리치니 귀신이 사라지는구나, 사악한 기운에 병든 사람들이 신음에서 깨어나는구나, 라고. 결국 해는 모든 재앙을 푸는 열쇠였다. 해의 기운을 항상 받으려는 사람들의 염원이 해태라는 상상 속의 동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 해치



해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갔다. 중국에서는 해태를 사법의 상징으로 삼아서 법관의 의복에 그 모습을 장식하고 법관이 쓰는 관을 해치관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에도 법을 집행하던 사헌부 관원들 역시 해치관을 썼다. 또 민간에서는 부엌문에 해태를 붙여 사악한 기운을 막았다. 부엌은 불을 다루는 곳이므로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해태는 불을 먹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화재를 막는 영험한 동물로 사람들은 믿었다. 이것은 단지 화재뿐 아니라 온갖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의미까지 담겨 있다. 결국, 광화문 앞에 한 쌍의 해태를 세운 것도 경복궁의 화재를 막고 임금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


밝은 햇빛으로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치고, 불을 먹어 화재를 막고, 힘이 세고 올곧아 억울한 사람을 풀어주었던 해태. 만물의 재앙을 물리치는 해태가 있다면, 출산에서 해태 같은 존재는 없을까?



출산에서 재앙을 물리치는 법


『동의보감』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해산 초기에 산모가 늘 입고 있던 옷을 벗겨 굴뚝과 아궁이를 덮어씌우면 쉽게 해산할 수 있다. 산모가 모르게 해야 한다. 해산할 때 붉은 말 가죽을 깔고 산모를 그 위에 앉게 하면 빠르고 쉽게 해산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날다람쥐 가죽과 털을 산모가 쥐고 있으면 곧 해산한다. 또한 해마(海馬)나 석연자(石燕子)를 두 손에 각각 하나씩 쥐고 있으면 곧 효험이 나타난다.

─「잡병편」, 부인, 법인문화사, 1,666쪽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것은 일종의 푸닥거리다. 산모의 몸에 부정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쫓는 작은 제의. 출산에서 재앙을 물리치는 법이다.


먼저, 한옥에서 굴뚝과 아궁이는 불을 지피고 그 연기가 들고 나는 곳이다. 굴뚝은 불을 지필 때 필요한 공기를 받아들이고 아궁이에 바람이 들지 못하도록 막는다. 또 연소된 물질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만든 장치이다. 굴뚝의 높이는 바람의 흐름에 따르는데, 산간지대에서는 지붕마루보다 높이 세우고, 평야 지대에서는 처마와 같거나 조금 높이 세운다. 산이 높으면 굴뚝도 높아야 바람을 적게 타서 불이 잘 들기 때문이다. 아궁이는 한옥에 불을 넣는 구멍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곳에 솥을 걸어 취사를 겸한다. 결국, 아궁이 하나로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한옥에서 굴뚝과 아궁이는 ‘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집안에 훈훈한 기운이 돌게 하고 따뜻한 먹을거리를 만든다. 이 따뜻한 기운을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산모가 늘 입던 옷으로 막는다고 한 것은, 그 기운을 온전히 감싸서 해와 같은 기운을 가진 아이를 낳는 데 쓰기 위함이다. 한편 그것을 막음으로써 사악한 기운이 집안에 깃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산모가 늘 입고 있던 옷을 벗겨 굴뚝과 아궁이에 덮어씌우면 쉽게 해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을 때 붉은 말 가죽을 깔라고 한 것은 왜일까? 붉은색은 잡귀를 물리치는 색이다. 고사를 지낼 때 붉은 팥떡을 만들거나 팥죽을 쑤기도 하는데,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어 집안의 평안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말은 기(氣)의 왕성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말을 뜻하는 간지 오(午)는 화(火)의 기운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활동성을 상징한다. 불 중에서도 오화(午火)는 정점에 있는 불이다. 그러니 붉은 말 가죽을 깔고 낳은 아이는 말의 기운을 닮아 튼튼하고 풍요로운 기운을 갖고 태어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날다람쥐 가죽과 털을 산모가 쥐고 있으면 곧 해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날다람쥐는 일명 비생조(飛生鳥)라고 한다. 산속에 있는데 생김새는 박쥐 같고 크기는 까치나 비둘기만 하며 밤에 날아다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飛) 자는 ‘날다’는 뜻도 있지만 ‘떨어지다’는 의미도 있다. 생(生)을 떨어뜨리는 새, 비생조. 아이를 곧 해산하려는 산모에게 꼭 필요한 새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 가죽을 벗겨 두었다가 해산할 때 손에 쥐고 있으면 아이를 쉽게 낳는다고 한 것이다.



해산할 때 필요한 것들_붉은 말 가죽, 날다람쥐 가죽과 털, 해마, 석연자?!



그렇다면 해마와 석연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해마는 바다의 말(馬)이다. 일명 수마(水馬)라고도 한다. 앞서 보았듯이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을 그 이름에서 얻었다. 한데 해마는 독특한 사연이 더 보태어졌다. 해마는 일생을 일부일처제로 사는데 수컷이 새끼를 낳는 특이한 방식으로 번식한다. 번식기가 되면 암컷과 수컷이 서로의 꼬리를 감아 교미한다. 이때 암컷은 수컷의 배에 있는 주머니(육아낭) 속에 알을 집어넣는다. 이때부터 수컷은 수정란을 돌보고 부화시킬 뿐 아니라 태어난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 독립할 때까지 뱃속에서 키우기까지 한다. 수컷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새끼 해마가 1cm 정도까지 자라면 수컷은 몸에서 새끼 해마를 내보낸다. 한 번에 한두 마리씩 1백 마리가 넘는 새끼가 연이어 나오는데 새끼들은 이미 성체의 모양을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성숙한 암수 한 쌍은 출산을 한 직후, 다시 짝짓기할 수 있다. 수컷의 배에서 새끼들이 연달아 한 마리씩 톡톡 튀어나오는 모습과 출산 후 바로 짝짓기에 들어가는 특성들이 순산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석연자는 연꽃의 씨앗인데, 연실 혹은 연자라고도 한다. 말려 두었다가 오장의 기운이 부족할 때 죽을 쑤어 먹으면 오장의 기운을 보해준다. 특히, 심장의 기운을 보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12경맥의 혈기를 좋게 한다. 석연자의 기운은 출산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산모에게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는 약재로 선택된 것이다.



현대의 출산에서 재앙은?


출산을 준비하는 산모는 자기 나름대로 운동을 하면서 출산일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출산은 공포, 그 자체다. 출산에 있어서 고통에 관한 믿음이 너무 강해서 고통이라는 개념의 타당성을 생각해 보기도 전에 고통을 합리화한다. 하여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산모들의 초점을 고통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고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이 굉장히 중요한 신호 체계이고 산모가 출산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생물학적 피드백이라고 설명한다. 산모가 진통의 강도와 간격을 알게 되면 진통이 어느 단계에 와 있으며 어떤 대응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진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견딜 만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로 여기라고 한다. 고통에는 특정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산모에게 이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니다. 고통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만약 고통이 필수적이라면 그것을 어떻게든 피할 방법을 찾게 한다.


하여 산모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왜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지 못할까요?” 그렇다. 왜 사람은 그럴 수 없겠는가? 우리는 말이나 다른 동물들이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거나 불편하면 진통 시점을 늦추거나 진통을 중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성들의 몸도 이와 같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성들은 자기 몸의 역량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의 출산은 훼손되었다. 자신의 본능적인 출산의 힘을 믿는 여성들의 정신력이 훼손된 것이다. 여기에는 ‘가공된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공포를 확산시킨 장본인은 병원이다. 출산에 마취가 사용되면서 출산=공포라는 공식이 선포되었고 여성들의 신체는 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신체가 된 것이다. 현대의 출산에서 재앙은 이것이다. 이 재앙을 풀 수 있는 것은 해태도, 해마도 날다람쥐도 아니다. 바로 여성 자신이다.



글_이영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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