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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죽음이 준 선물

by 북드라망 2015. 10. 5.


죽음의 또 다른 얼굴이다”



태어난 이상 누구든 아프다. 아프니까 태어난다.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아픔이다. 또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얼굴이다. 생명의 절정이자 질병의 최고경지이기도 하다. 결국 탄생과 성장과 질병과 죽음, 산다는 건 이 코스를 밟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질병과 죽음을 외면하고 나면 삶은 너무 왜소해진다. 아니, 그걸 빼고 삶이라고 할 게 별반 없다. 역설적으로 병과 죽음을 끌어안아야 삶이 풍요로워진다. 잘 산다는 건 아플 때 제대로 아프고 죽어야 할 때 제대로 죽는 것, 그 과정들의 무수한 변주에 불과하다.

- 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북드라망, 2012, 439쪽


최근 몇 년 새 부쩍 지인이나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나의 일가친척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생애 주기에서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이 익숙한 나이가 된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경북 영천에 사시던 고모부님께서 돌아가셨다. 마지막 1년은 거동을 전혀 못 하시고, 정신도 오락가락한 상태로 둘째 딸이 집 근처에 모신 요양병원에서 계셨다. 고모부라면, 보통 굉장히 가까운 사이지만, 사실 나는 평생 고모부님을 뵌 적이 서너 번 정도이다(물론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까지 하면 한두 번 더 추가될 수 있겠으나). 어째서 그렇게 격조하게 지냈는가를 잠시 말해 보면, 가장 큰 원인은 우리 가족이 타고나길 살뜰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겠으나,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로 짚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우선 우리 아버지와 고모는 나이 차가 11살이다(우리 아버지가 늦둥이시다 ;; 아버지 바로 위가 고모시고, 고모 위에 큰아버님 두 분이 계셨는데 모두 한국전쟁 때 전사하셨다). 그런데 고모와 고모부님은 또 나이 차가 정확치는 않지만 대략 여덟아홉 살 차이. 일단 살갑게 지내기에는 거의 아버지와도 부자 관계 정도의 나이차가 난다. 게다가 고모부님은 영천의 시골집을 떠나신 일이 없다(한국전쟁에 참전하셔서 다치셨기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기도 하셨다). 슬하에 5남매를 두셨지만 모두 경상도를 벗어나지 않은 인근 지역에 산다. 경상도를 벗어날 일이, 아니, 영천을 벗어날 일이 아흔 평생 거의 없으셨던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 집은 내가 아주 어릴 때 2~3년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만 살았다.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멀미’다. 뜬금없을 수 있겠지만 이번에 나는 (나이 40이 넘어서…;;;) 내 멀미가 유전임을 알게 되었다. 동생이 모는 차에 내가 조수석, 아버지가 뒷자석에 앉으셨는데, 중간에 휴게소에서 내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하셨다. 멀미가 나신다고. 여기서 반전이라면 반전은 나의 아버지께서는… 택시를 모신다는 것. 택시든 승용차든 내가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탈 때는 늘 아버지가 운전하셨던지라 멀미를 하시는 줄 몰랐다. 그런데 고모께서는 멀미가 더 심하셔서, 영천에서 차를 타고 나오시는 일 자체가 고역이라 웬만하면 움직이질 않으신다고 한다. 이럴 수가, 그나마 내가 멀미에 한해서는 아버지나 고모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던 것이다.


늘 아버지가 운전하셨던지라 멀미를 하시는 줄 몰랐다



아무튼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천 근처 ‘하양읍’에 있는 장례식장엘 갔다. 거기에서 정말 수십 년 만에 고모와 고종사촌 언니, 오빠들을 만났다. 여든을 앞둔 고모, 평생 농사일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던 고모는 평생을 농사일과 거리가 멀었던 우리 아버지와 모습이 참 닮았지만, 손만은 너무나 달랐다. 딱 보아도 손재주와는 거리가 먼 가늘고 긴 손가락의 혈통인데, 고모의 손은 마치 둥그런 새알심이 박혀 있듯 손마디가 부자연스럽게 굵었고, 손톱 끝은 흙물이 들어 시커멨다. 앙상한데 마디만 유난히 굵은 고모의 손이 평생 연필과 키보드에만 익숙한 내 손을 잡았다. 거뭇하고 거칠거칠한 고모 손과 어쩐지 부끄럽게 흰 내 손이 서로를 한참 동안 붙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고모가 시집가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님 성화에 열 살짜리 동생을 두고 나이 든 상이군인에게 스물한 살에 시집간 얘기와 할아버지(고모의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앞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단 이야기, 한국전쟁 때 피난 갔던 이야기 등을 난생처음 들었다.


고종사촌들은 5남매 중 4남매가 이삼십대의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고, 막내인 언니는 스님이 되어 있었다. 물론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모습을 보니, 아주 옛날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던 얼굴조차 완전히 지울 만큼 낯설었다. 그런데 언니, 아니 스님은 나를 보고 특히 반가워하셨다(나의 동생은 묘제를 지내러 내려갈 때 가끔 고종사촌들을 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10대 초반의 나를 너무 세세히 기억하며, 네 생각을 드문드문 했노라고 하셨다. 나도 스님을, 아니 구미의 한 공장을 다녔던 언니를 드문드문 생각했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 “보내주셨던 편지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언니는, 아니, 스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선물을 주셨구나” 하셨다. 그 말씀이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어쩐지 죄송스럽고, 또 눈시울이 화끈거리게 하는 그 말씀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는 캄캄한 고속도로에서 깨달았다. 지난 몇 년간 장례식장에 가는 횟수가 잦아진 만큼, 끊겨 버린 인연을 다시 잇게 되는 일도 잦아졌다는 것을. 젊은 날 치기 어린 나의 행동을 다 받아주고 살뜰히 챙겨 준 친구와 끊어졌던 연락은 그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듣고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다시 연결되었고, 대학 시절 중요한 인연 중 하나였던 또 다른 한 후배는 가장 친한 친구 아버님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런 일들에 연이어 십여 년 전에 한 지인이 아버님을 여의고 고대하던 임신을 했을 때, 아버지가 내려 보내주신 아이라고 그립고 감사한 마음에 울먹이며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렇구나, 문득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아마, 누구나 이렇게 어떤 죽음 뒤에 어떤 탄생이, 혹은 어떤 인연이, 연이어 오는 일을 겪었을 것이다. 겪어갈 것이다. 단지 삶과 죽음은 한 생명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관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인연장 안에 그렇게 삶은 죽음과 함께 있고, 그렇기에 또 죽음은 삶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야 조금씩 실감한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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