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
<Šu Concerto for sheng and orchestra>
생황(笙簧)이라는 악기가 있다. 3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생황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후 동아시아 삼국(한중일)의 전통음악에 가장 신비로운 화음의 음색을 불어넣게 된다. 모든 관악기 연주자들은 공기를 한껏 흡입하여 취구와 리드를 통해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소리의 ‘결’로 바꾸는 단계를 거치는데 그 중에서 생황은 연주할 때 악기와 연주자가 완전히 말착된 상태를 보여준다. 하늘에 떠다니는 기운들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정화된 기운의 소리를 필터링하여 내보내는 듯한 이 악기를 일컬어 한 유명한 미술작가는 내게 “심장이 피를 온몸에 퍼트리듯 생황이라는 악기는 심장을 닮았다”는 인상적인 말을 해주었다. 훌륭한 생황 연주자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신묘한 기운을 모아 소리로 방사할 수 있는 연주자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 악기는 옛 선비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악기로도 애용되었듯 하다. 생황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전통 회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김홍도의 〈월하취생(月下취生)〉을 감상하다보면 고적함과 외로움을 넘어 진정한 풍류의 즐거움에 한껏 몰입되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에서는 조선후기 이후로 궁중과 민간에서 생황 연주법이 점점 단절되어 가다가 근래 들어 젊은 전통음악 전공자들의 활발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황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장 큰 계기는 한국의 재독 작곡가 진은숙이 작곡한 오케스트라와 생황이 협연하는 협주곡 '슈'의 열풍 때문이다. (Shu-이집트 신화에서 ‘슈’는 건조한 공기의 신이며 하늘을 떠받치는 자다.) 특히 이 곡을 초현한 중국의 뛰어난 생황 연주자 우웨이(Wei Wu)는 이 곡을 통해 서양 음악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으며 오늘날에도 이 작품을 전 세계의 수많은 유명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하고 있다. 물론 이 곡은 요즘 현대음악의 최전선에서 가장 핫하게 연주되는 곡이니 만큼 쉽게 다가오는 멜로디와 기능적 화성음악에 익숙한 일반적인 청취자들에게는 난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은숙 작곡가의 창작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터뷰를 보면 한번쯤 이 곡을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이라 생각된다. 쉽게 접하기 힘든 생황과 서양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새로운 소리경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파동의 에너지와 접해보는 건 어떨까?
음악은 세속화된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감정적ㆍ정신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용품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곡을 만들 때 창작자에게 도전인 것처럼 청중에게도 일종의 도전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음악은 인간을 모른 체 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도를, 인간이 지닌 예술적 경험의 가능성을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완전성을 향한 갈망’은 그 모든 허약함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동의어가 아닐까요.”
- 2007년 1월 31일 하이델베르크 예술상 수상기념 연설 중 -
올해 정명훈의 지휘로 서울시향과 우웨이가 이 곡을 한국 초연했을 때 나는 객석에서 이를 감상한 직후 바로 작곡가 진은숙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에게 소감을 전했다. “판타스틱한 소리여행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 이 느낌을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 2부 프로그램인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곡은 미안하지만^^ 안 듣고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겠다.” 그녀는 기뻐하며 고맙다고 했고, 서울시향 단원들이 정말 연주를 잘해줬다고 연신 칭찬했다. 인터미션을 틈타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마음이 뒤숭숭하고 복잡했다. 작곡가로서 지금의 내 상태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음악을 통해 환상을 경험했고 멋진 소리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여러분들도 함께 이 여행을 경험해보면 좋겠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생황 협주곡 '슈'》 (지휘:정명훈, 생황:우웨이)
다음은 그녀가 말하는 이 곡의 작곡 동기다.
“〈생황 협주곡〉을 쓰기로 작정했을 때 ‘동양’과 ‘서양’을 결합하는 시도가 간단치는 않았어요. 저는 그냥 제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은 무엇이든 현대음악의 복잡하게 뒤얽힌 여러 가능성들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음악가로서 계속 발전해나가려면 서로 다른 방식의 다양한 음악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게 비서구 음악이든 대중음악이든 말입니다.”
“제가 생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십 년 전이에요. 한국음악에도 생황이 사용되지만 독주 악기로서의 연주법은 그리 발달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베를린에서 우웨이의 중국 생황 연주를 처음 듣고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 반음계와 미분음, 화음, 폴리포니, 클러스터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데, 때로는 전자음악처럼 들리기도 하고 영묘한 음향을 만들어 내거나 폭발적인 힘을 발휘활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음향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이 악기가 지닌 본연의 성질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악기의 본질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비서구 악기들을 ‘서양적인’ 문맥 속에 집어넣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 작업을 피했던 것은 비서구 음악문화의 유산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서로 다른 근원과 역사를 가진 것들을 한데 뒤섞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냥 동양악기와 서양악기 몇몇을 한데 모아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가지고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야지요.”
- 슈테판 드레스,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 이희경 옮김, 휴머니스트 -
+ 내가 들었던 그 연주 실황이 최근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 접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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