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더운 여름날을 식혀줄 차갑고 시원한 우물의 지혜 - 수풍정


더운 여름,

차고 시원한 우물의 지혜 어떠세요?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우물 하나가 있었다. 탱자나무로 둘러 쌓여있는 작은 우물이었는데 식수용이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이 빨래하거나 청소를 하는 데 쓰는 것 같았다. 가끔 호기심이 일어서 우물 밑을 내려다보면 바닥은 보이지 않고 검은 물만 고여 있었다. 물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참을 째려보다가 누군가가 등 뒤에서 밀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지레 놀라 뒷걸음질 쳤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 자주 찾지 않는 오래되고 낡은 우물의 음산한 기운 탓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우물을 배경으로 나왔던 한 공포영화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우물은 어둡고 음침한 장소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옛날 우물은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였다. 물을 긷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당연히 일상의 사소한 것들로 성인의 지혜를 풀어내는 주역에 우물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오늘 주역 서당에서는 더운 여름날을 식혀줄 차갑고 시원한 우물의 지혜, 수풍정(水風井)을 만나볼까 한다.



괘사로 보는 수풍정의 지혜 - 우물을 보면 정치가 보인다 


井은 改邑호대 不改井이니 无喪无得하며 往來 井井하나니

(정은 개읍호대 불개정이니 무상무득하며 왕래 정정하나니)

정은 읍을 고치되 우물을 고치지 못하니,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으며 가고 오는 이가 정정하나니(샘물을 길어 먹고 먹나니)


汔至亦未繘井이니 羸其甁이면 凶하니라.

(흘지역미귤정이니 이기병이면 흉하니라)


두레박줄 귤/율(繘), 거의 흘(汔), 깰 리(羸), 병 병(甁)


거의 이름에 또 (두레박줄이) 우물에 닿지 못함이니, 그 병(두레박)을 깨면 흉하니라.


수풍정괘에서 성인은 우물이라는 일상도구를 가지고 군주가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성인은 말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읍은 고치되 우물은 고칠 수 없다고. 이것은 무슨 말일까? 고인 물은 썩는다고 위정자들이 오랫동안 정사를 장악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면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 이때는 나라를 병들게 하는 탐관오리들을 내쳐야지, 백성을 억압하거나 핍박해서는 안 된다. 우물의 더러운 물을 퍼다 버리되, 우물의 물구멍은 막아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러운 물은 흘려버리고 정갈한 물이 샘솟도록 우물을 정비하는 것처럼, 정사를 농단하는 자들을 몰아내고 현명한 자들을 기용하는 것이 군주가 해야 할 일이다.


수풍정을 통해 살펴보는 우물의 지혜



또한, 군주는 아무리 길어 마셔도 고갈되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넘치지 않는 우물처럼 욕심이나 방탕에 빠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무상무득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물을 먹기 위해 우물로 모여드는 것처럼, 백성들이 저절로 군주에게 모여들고 감화된다. 군주는 정치하는 데 있어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해야 한다. 군주의 말 하나, 행동 하나, 결정 하나가 끼치는 파급력은 엄청나기 때문이다. 수풍정에도 그것을 경계하는 말이 있다. 샘물을 퍼 올리기 위해 두레박을 내리는데 두레박의 줄이 짧거나, 우물의 물이 충분히 차오르지 않았을 때 무리하게 되면 자칫 두레박이 깨져버린다. 무엇이든 때가 있는 법인데 군주가 때를 놓쳐서 성급하게 굴거나 나태해질 때, 말 그대로 ‘박 터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흉해지는 것이다.



효사로 수풍정의 지혜 - 우물을 낱낱이 파헤쳐보자!


효사에서는 수풍정이라는 우물을 밑바닥부터 상층부까지 부분별로 설명한다. 우물의 각 부분에서 어떤 지혜를 걸러냈는지 우물 속으로 퐁당 들어가 보자.


初六은 井泥不食이라 舊井에 无禽이로다.

(초육은 정니불식이라 구정에 무금이로다.)

초육은 우물이 진흙이라 먹지 못하니라. 옛 우물에 새가 없도다. 


초육은 수풍정 우물의 밑바닥이다. 질퍽질퍽한 흙탕물로 사람은 물론 짐승도 먹지 않는다. 고로 쓸 수 없는 옛 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흙탕물은 혼란과 부정이 오래되어 썩어버린 세상을 뜻하며 더러운 물을 걸러내고 정갈한 물을 채울 군자를 기다리는 세상이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수풍정에서는 양효가 맑은 물에 해당하고 음효는 진흙이나, 벽, 뚜껑 같은 어둡고 탁한 것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동양의 사유에서 양(陽)은 밝고 경쾌하고 긍정적인 것, 음(陰)은 어둡고 탁하고 부정적인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맑은 물, 진흙, 벽, 뚜껑 같은 구성물이 있어야 온전한 우물이 이루어지듯이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물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물의 밑바닥에는 질퍽질퍽한 흙탕물이 있다.



九二는 井谷이라. 射鮒오 甕弊漏로다.

(구이는 정곡이라. 석부오 옹폐루로다.)

구이는 우물이 골짜기라. 붕어가 쏘고 독이 깨져서 새도다.


수풍정에서는 주역의 다른 괘와는 다르게 풀이되는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구이다. 보통은 구를 양(陽)이 내괘(손하절/풍)의 중(中)에 위치해있다고 하여 좋게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이유는 물구멍에서 나온 정갈한 물이 우물에 차오르지 않고 터진 틈을 타고 골짜기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물 속에 남아 있는 물은 붕어가 물을 쏘며 물장난을 치는 정도밖에 안 된다. 구이도 물을 먹지 못하는 상황임에는 초육과 다를 바가 없다.


구이의 효사를 풀이한 소상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象曰 井谷射鮒는 无與也일새라.

(상왈 정곡석부는 무여야일새라.)

상전에 이르길 정곡석부는 더불음이 없기 때문이라.


구이는 자신의 짝인 구오와 음양응을 하지 못한다. 자석이 다른 극이 끌리듯 음양이 달라야 끌리는 법인데 구이와 구오는 양:양이기 때문이다. 자리로 따지면 구이는 신하, 구오는 임금인데 신하와 임금이 더불어 정사를 논하지 못하니 정치가 도탄에 빠지게 된다.


九三은 井渫不食하야 爲我心惻하야 可用汲이니

(구삼은 정설불식하야 위아심측하야 가용급이니)

구삼은 우물이 깨끗하되 먹지 못해서 내 마음이 슬프게 되어, 가히 써 물을 푸니(가히 길어 쓸 만하니)


王明하면 幷受其福하니라.

(왕명하면 병수기복하니라.)

왕이 밝으면 아울러 그 복을 받으리라.


깨끗이 할 설(渫), 슬퍼할 측(測), 길을 급(汲), 아우를 병(幷)


구삼은 내괘의 가장 윗자리로 물이 반쯤 차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두레박만 내리면 물을 퍼 올릴 수 있다. 한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눈앞에 물을 두고도 몰라본다니! 사람으로 비유하면 구삼은 구오 임금을 도와 정사를 행할 만큼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한데 구오 임금이 구삼을 몰라보고 기용하지 않아 정치로 나갈 수가 없다. 정설(井渫)은 우물이 깨끗해졌다는 말이고, 불식(不食)은 구오가 구삼을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구삼의 마음이 슬플 수밖에… 반면 구오 임금이 현명하게 구삼을 기용하면 결국 구오와 구삼 모두 복을 받게 된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六四는 井甃면 无咎리라.

(육사는 정추면 무구리라.)

육사는 우물을 치면 허물이 없으리라.


샘칠 추(甃)


앞서 말했듯 육사는 우물 위로 쌓아올린 벽에 말한다. 구오 임금 밑에 있는 육사 대신은 마땅히 임금의 명을 받고 백성이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우물의 벽을 수리하고 새로 쌓아야 허물이 없다.


九五는 井洌寒泉食이로다.

(구오는 정렬한천식이로다.)

구오는 우물이 맑고 차서 찬 샘물을 먹도다.


구오는 양이 양자리에 바르게 자리한 데다, 외괘(감중련/수)에서 중을 얻어 중정(中正)하다. 이 좋은 자리에 걸맞게 구오의 물은 아주 차고 맑다. 이는 구오가 강건한 군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기르는데 아무런 탈이 없다는 뜻이다.


上六은 井收勿幕고 有孚라. 元吉이니라.

(상육은 정수물막고 유부라. 원길이니라.)

상육은 우물을 거두어서 덮지 않고 믿음을 두느니라. 크게 길하니라.


구이와 마찬가지로 상육도 다른 괘와는 달리 수풍정에서는 예외적으로 풀이된다. 대부분의 상효는 풀이가 나쁘다. 상효의 자리가 극단에 올라선 위태로운 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풍정 상육에서는 우물에 물이 넉넉해서 쉽게 퍼먹을 수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좋다. 한데 이렇게 차갑고 시원한 물이 가득하면 자연히 욕심을 부리게 된다. 우물의 뚜껑을 덮고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수풍정의 마지막 상효에서는 그것을 경계한다. 욕심부려서 물을 독점하지 말고 누구나 고르게 마시도록 하라고. 그래야 크게 길하다.


흔히 주역을 만학(萬學)의 제왕이라고 한다. 고전 중의 고전,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지혜를 간직한 고전이라는 말이다. 주역의 마흔여덟 번째 괘인 수풍정은 우물이라는 일상도구를 밑바닥부터 상층부까지 하나하나 파고 들어가 인간세의 정치로 시원하게 풀어내고 있다. 물론 이것이 위정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같은 범인에게도 수풍정의 지혜는 고스란히 적용된다. 어떻게 하면 매 순간 차오르는 사욕과 일렁이는 분노를 퍼내고, 정갈하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더운 여름, 정신줄 놓치기 쉬운 이때 수풍정의 시원한 지혜 속으로 함께 빠져보자. <끝>



글_곰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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