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계가 창조되는 시점, 출산
쿠바의 출산 -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중시하는 나라
“출생의 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태어나고 5분만 지나도 응급상황이 발생할 확률은 불과 0.5%에 지나지 않습니다. 쿠바에는 전미소아과학회가 추천하는 ‘신생아소생프로그램’과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이 있고, 모든 직원이 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가령 응급상황이 있어도 전처럼 목숨을 잃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신생아 사망률은 1,000명당 3.5~4명입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와 엄마는 가장 다치기 쉽다. 그 목숨을 지키기 위해 쿠바에는 ‘PAMI', 즉 ‘전국 엄마와 아기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계획이 있다. 쿠바는 가정 내 출산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아기는 병원에서 태어난다. 산부인과의원과 함께 태아의 건강을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엄마의 집’으로, 전국에 약 209개소가 있으며 간호사가 당번제로 기거하면서 24시간 보호체제를 갖추고 있다.
미국의 헤더 렌스는 2001년에 비날레스 계곡 근처 작은 마을에 있는 ‘엄마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보고하고 있다.
“어느 저녁 나는 현관 쪽에 늘어선 의자에 앉아 모기를 쫓으면서 이곳 생활에 대해 물었다. 어떤 여성은 의사와 간호사의 진찰을 받은 후에는 낮잠을 자고 방문객과 서로 몇 시간씩 얘기를 나눈다든지 한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임신 중에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이 집에서 생활하는 편이 즐겁다고 말한다. 그래서 뭐가 특히 좋으냐고 한 여성에게 물었더니 ‘평화, 평정, 그리고 식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물자 부족이 심각한 쿠바에서는 비누, 수건, 화장실 휴지 같은 기초 물품조차 부족한 편이고 몇몇 병원에서는 최악의 경우 물까지도 부족해 거리에서 양동이로 퍼 옮겨야만 할 때도 있다. 잘사는 나라들과는 달리 구급차라 해도 변변치 않다. 하지만 미리 입원해 있으면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다가 임신한 여성이 죽게 되는 참사는 일단 일어나지 않는다. 선진국들과는 달라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예방이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쿠바에만 있는 '엄마의 집'
예방을 중요시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도밍게스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조금 독특한 것이, 전국의 엄마와 아기 프로그램은 아기에 대한 보호 관리를 임신 전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위험이 예상되지 않는 일반적으로도 건강한 임신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카운슬링도 제공합니다. 출산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인 ‘양심적인 육아’에 참여하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아빠도 프로그램에 나올 수 있도록 일을 쉬게 해줍니다.”
아기를 위해서 아빠도 일을 쉬게 할 정도의 나라인 만큼 엄마의 휴가는 당연히 더 길다. 출산 전 6주와 출산 후의 12주를 합해서 18주를 보장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받는 이 기간에는 급여가 100% 지급된다. 휴가를 더 원한다면 다시금 40주를 얻을 수 있는데, 그때는 급여의 60%가 지급된다. 현행법은 적어도 34주는 휴직할 것을 권하고 있다.
출산휴가가 길어지게 된 데는 재미있는 이유도 있다. 엄마들은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아기와 보내고 싶어 하는데, 보조금이 나오는 보육원에 들어가려면 아기가 만 1세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출산 후 휴가를 12주에서 1년까지 늘리는 운동을 해왔는데, 이것을 모유 육아를 중시하는 의사들이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95%의 엄마들은 아기를 모유로 키우면서 퇴원을 하게 되고 80%는 4개월을 모유만으로 키운다. 의사들은 직장 복귀 뒤에도 모유 육아를 하도록 장려하고 매일 한 시간씩은 직장의 업무를 벗어나 수유할 권리까지 부여하고 있다.
인간은 어쨌거나 포유류다. 쿠바의 제도는 생물이라는 인간의 건강한 탄생을 촉진하기 위해 구축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신용의 사회화와 기본소득 보장을 주장하는 일본의 사상가, 세키 히로노가 말하는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중시하는 나라’에 관한 하나의 모델을 쿠바에서 찾을 수 있다.
─ 요시다 타로,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송제훈 옮김, 서해문집, 228~235쪽 정리
생성을 알리는 첫 출발 - 출산의 징후
내가 쿠바의 출산제도를 서두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쿠바의 출산정책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중시하는 태도. 제도는 출산을 도와주는 산파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출산이 어떤 의미이길래 이렇게 중시하는 걸까? 출산은 과연 무엇인가?
출산의 과정을 떠올려 보자. 산모는 아기를 낳으며 진통의 소리를 내고 아기는 땅에 떨어지며 세상과 마주치는 소리를 낸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엄마는 젖을 주게 되고, 아기는 탯줄을 대신한 젖이 생명줄이므로 빨게 된다. 출산은 엄마와 태아가 숨소리와 동시에 분리되며 모자(母子)라는 생명 관계가 창조되는 시점이다. 아기는 엄마의 생명이며 엄마는 아기의 생명으로서 같은 원인으로 비롯되는 인간이다. 생명과 생명의 원초적 나눔. 그렇다. 출산은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화(化)하는 생성의 시간이다. 이 생성을 알리는 첫 출발의 징후가 오늘의 주제다. 『동의보감』에는 출산의 징후를 이렇게 알리고 있다.
임신부가 달이 찼을 때 이경맥(離經脈)이 나타나고 배가 아프면서 허리와 등이 땅긴다면 아이를 낳으려는 것이다. ○ 임신부의 배꼽 주위가 다 아프면서 허리까지 땅기고 아프며 눈에 불꽃이 이는 것 같은 것은 아이가 도는 것이다. 대개 신(腎)은 허리와 연계되어 있고, 자궁은 신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 임신 8개월에 배가 아팠다 멎었다 하는 것을 ‘농통(弄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해산의 증후가 아니다. 혹 배는 아파도 허리가 심하게 아프지 않은 것은 정상적인 해산의 증후가 아니다. 태아가 위에 있으면서 처져 내려가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해산의 증후가 아니다. 항문이 빠져나오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해산의 증후가 아니다. 양수가 터져 나오지 않거나 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정상적인 해산의 증후가 아니다. 양수와 혈(血)이 나와도 배가 아프지 않은 것은 정상적인 해산의 증후가 아니다. 따라서 산모를 부축하여 천천히 걷게 하고 꾹 참게 하며 아이 낳을 자리에 앉히지 말아야 한다. ○ 임신부는 태기가 처져 내려가서 아이가 음문을 압박하고 허리가 무거우면서 통증이 심하고 눈에서 불꽃이 이는 것 같으며 항문이 빠져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해산을 하려는 증후이므로 이때 비로소 자리를 잡고 힘을 주어야 한다.
─『동의보감』 「잡병편」,「부인」, 법인문화사, 1,659쪽
출산 징후의 판별
출산할 때가 되면 임신부의 배꼽과 배가 모두 아프고 허리까지 당기면서 아프며 눈에 불이 난 것 같다. 그리고 맥으로는 이경맥(離經脈)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상맥보다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린 맥인데, 한번 숨을 내쉴 때 맥이 세 번 뛰거나 한번 뛰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임신 8개월이 되면 배가 아팠다 멎었다 하면서 며칠 동안 진통하게 되는 ‘농통’이 있는데 이것은 출산의 징후가 아니다.
『동의보감』에는 출산의 징후가 아닌 것을 세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배는 아파도 허리가 심하게 아프지 않는 것, 태아가 밑으로 처져 내려가지 않는 것, 항문이 빠져나오지 않는 것, 양수가 터져 나오지 않는 것, 피가 나오지 않는 것, 양수와 피가 나와도 배가 아프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출산 징후의 판별이 중요한 것은 산모가 엉뚱한 데 힘을 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출산의 시간은 산모에게 감내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 따른다. 또한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시간이기도 하다. 고통과 환희의 오버랩! 이것은 기존의 배치와는 다른 이질적인 시공간과의 강도 높은 접속이다. 이 강밀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하다.
『동의보감』에서 제시한 타이밍은 이러하다. “임신부는 태기가 처져 내려가서 아이가 음문을 압박하고 허리가 무거우면서 통증이 심하고 눈에서 불꽃이 이는 것 같으며 항문이 빠져나오는 때.” 이때 비로소 자리를 잡고 힘을 주어야 한다. 강밀도 최대치! 기존의 배치와 결별하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있으면 중간이 있고, 중간이 있으면 끝이 있다. 강밀도는 이러한 리듬에 변화를 주는 진동이다. 이 진동과 함께 리듬을 타는 것. 이 간극 없음이 출산이라는 대장정을 경쾌하게 넘는다. 태아와 함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미끄러져 나온다. 새로운 관계! 그것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고, 안주하고 있는 것을 깨고 나가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보성출판사
글_이영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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