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사막화된 몸’ 이 만든 사건
칠레 감독 패트리시오 구즈먼의 <빛을 향한 노스텔지어((Nostalgia For The Light, 2010) >라는 영화를 보았다.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과 별과 역사를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연결한 멋진 작품이다. 그는 사막에서 생명이 살지 못하는 별, 화성을 느낀다. 영화에서 내가 놀란 대목은 감독의 시선이다. 그는 생명이 없는 죽음의 사막에서 절망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생명이 자라지는 못하지만, 사막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막이라는 결과에 갇히지 않고 사막의 흔적을 읽어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 빛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빛은 모두 과거의 빛이다. 우리는 빛이 없이는 사물을 볼 수 없는데 달빛은 1초가 걸리고, 태양의 빛이 사물에 닿으려면 8분이 걸려서 현재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과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란 없다는 것이다.
현재가 있다면 아주 얇은 선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철학서 같은 느낌이다. 그 느낌은 동의보감을 읽을 때 오는 경이감과 유사했다. 우주, 땅,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하나로 관통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과학, 고고학, 역사를 한 평면 위에서 뒤섞어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고 있었다.
사막에 도도하게 흐르는 '동의보감'
물이 없는 사막은 기혈이 돌지 않는 자궁과 닮았다. 물이 없는 그곳에는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한다. 생명을 기르는 임무를 띠고 태어난 자궁이건만 기혈 공급이 끊기면 자라던 태아조차 유산될 수밖에 없다. 척박한 몸에선 더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동의보감은 유산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본격적으로 탐사해 보기로 하자.
유산의 원인, 기혈부족
동의보감에서 유산은 잘 기르던 태가 갑자기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다. 자, 이제 기억을 더듬어보자.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태를 길러왔는지. 열 달 동안 내 몸의 모든 경맥이 총동원되어 태가 길러졌다. 족궐음간경맥(木)에서 시작해서 족소양담경맥(木), 수궐음심포경맥(火), 수소양삼초경맥(火), 족태음비경맥(土), 족양명위경맥(土), 수태음폐경맥(金), 수양명대장경맥(金), 족소음신경맥(水), 족태양방광경맥(水)의 순으로.
혹시라도 떨어져 나갈까 봐 조심스럽게 길러왔던 태가 아기가 되기 전에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을 유산이라고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유산을 이렇게 표현한다. 가지가 마르면 열매가 떨어지고, 넝쿨이 시들면 꽃이 지는 것과 같다고. 식물로 치면 물기가 부족하여 열매와 꽃을 더는 자양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
유산, 물기가 부족하여 열매와 꽃을 자양하지 못하는 상태
태는 자궁에 있다. 자궁은 포라고도 하고 혈실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피가 충만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피의 충만함은 몸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생명까지 생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자궁은 생명이 태어나는 근원, 땅은 만물이 생기는 근원으로 이것이 충만해야 생명이 탄생한다. 자궁에서 피가 모이는 충맥과 임신을 주관하는 임맥이 시작되는 것은 생명을 주관하는 힘이 여기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태가 떨어짐은 열매와 꽃이 떨어지듯 피가 부족하게 공급되는 문제인 것이다. 한마디로 기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유산이 되는 첫째 원인이다.
둘째 원인은 몸에 불의 기운이 평소보다 많아지면 유산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사람이 가지를 꺾는 것과 같다고 동의보감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 이런 일은 무엇으로 드러날까. 화를 내는 것이다. 화를 많이 내어 감정이 상하면 몸속에 불기운이 동해서 태가 떨어진다.
또한, 일을 너무 많이 해도 위험한데 그것은 사람이 가지를 꺾는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과로는 일부러 유산 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모두 내 몸속에 불기운을 퍼트리는 행동이다. 임신은 기운을 응축하는 것, 기운을 모으고 모아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흩어버리는 기운을 자꾸 몸에 주입하면 태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몸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기운을 흩어버리는 행동을 조심할 것!
임산부의 과로는 사람이 가지를 꺾는 행동과 같다는 등의 동의보감 식 비유는 이해가 쏙쏙 된다. 그렇다면 정상 분만은 어떤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밤송이 속의 밤이 익어 껍질이 저절로 열리는 것과 같단다. 이렇게 되면 밤송이나 밤알이 모두 해가 없이 자연스럽게 분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산은 아직 덜 익은 밤을 찍어 껍질을 부수고 막을 상한 뒤에 밤알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익을 때까지 기혈 공급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덜 익은 태의 상태로 몸 밖으로 나와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몸도 살자니 이런 극단의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완성된 태아를 만들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몸에서 남아 있으면 생리 대사를 막으니 그대로 있을 수는 없고. 결국은 몸은 유산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궁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유산은 정상 분만보다 훨씬 몸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10배는 더 신경 써서 치료해야 한다고 동의보감은 말하고 있다.
유산을 막으려면 기혈을 충만하게
유산이 되면 슬퍼하거나 나쁜 일로 여기고 후다닥 덮어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외면하면 몸과 마음이 모두 상한다. 유산 또한 우주가 생성 소멸하듯 내 몸의 변화일 뿐이다. 유산 그 자체에 낙담하지 말고 기혈 공급의 원리를 탐구해서 내 몸에 기혈을 충만해지는 법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유산은 보통 3, 5, 7개월에 일어난다고 한다. 한 번 3개월째 유산을 하게 되면 그다음에도 그즈음에 유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유산을 막으려면 근원인 태를 충실하게 만들고 화를 내거나 과로로 인해 기혈의 소모를 줄여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유산과 비슷한 태루와 태동이 있는데 그것은 하혈하는 것이다. 태동은 배가 아프고, 태루는 배가 아프지 않다. 태루는 열을 내리는 데 주력하고, 태동은 기가 잘 순환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태루와 태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행동은 술을 마시고 성교하는 것,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것, 너무 뜨거운 약을 먹는 것이다.
사막을 다시 풍요롭게 하는 법?
유산은 내 몸을 사막으로 만든 결과이다. 유산이라는 사막 속에서 우리는 몸의 원리를 읽어내야 한다. 구스만 감독의 <빛을 향한 노스텔지어>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의 빛을 사유하면서 사막을 다시 풍요롭게 하는 법을 창안해야 한다. 그래야 비옥한 땅, 기혈이 풍부한 자궁을 다시 생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 기혈의 흐름을 읽어내고, 태를 기르기 위한 근원인 자궁을 튼튼히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주와 역사를 탐사하는 작업과 닮았다. 그것은 세상과 존재의 이치를 궁구하면서 생명을 기르기 위해 삶을 배워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삶을 유산시키지 않고 낳을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유산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흔적으로 내 삶이 도약할 수 있다면!
글_박장금(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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