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달, 담의 결단력으로 태아를 기른다
이상이 쓴 단편 소설 <날개>의 주인공 ‘나’는 스물여섯 살 청년이다. 그는 한창 팔팔할 나이에 하는 일 없이 아내에게 얹혀살고 있다. 그것도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아내에게. 그의 전공 분야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내와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나’의 방은 창이 없어 볕도 들지 않는다. 그는 이 골방에서 찬밥덩이로 배를 채우며 축축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명도 하고 논문도 쓰고 시도 쓴다. 오로지 생각으로만. 한 마디로 이불 속 연구원인 셈이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결코 말로 전하는 법이 없다. 혼자서 이불을 쓰고 누워 마음 졸이며 생각으로만 사죄를 한다.
이상, <날개>, 1936
‘나’가 감기에 걸렸을 때, 아내가 준 약이 아스피린이 아니라 수면제임을 알았을 때에도 아내에게 한 마디 따지지도 못하고 생각으로만 분노하고 말았다.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스물여섯 살 청춘, 그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한다. 결국 ‘나’는 기운이 꺼질 대로 꺼져, 거의 유령이 된 상태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간다. 거기서도 그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라고 외치고 싶어 할 뿐 끝내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한다. 이런 ‘나’야말로 행동력 제로, 결단력 제로의 전형이다.
물론 어떤 일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한 우려와 기대, 지금 이 상황이 변화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행에 앞서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타이밍을 놓쳐 아쉬워하기도 하고, 기대했던 결과에 못 미치거나 진행 과정에 어려움이 닥치면 자책과 후회, 원망의 감정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 발을 내딛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를. 아무리 생각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해 봤자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래야 일이 진척되고 거기서 무엇을 얻든 잃든 삶이 펼쳐질 게 아닌가. 그것이 생명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것을 포기한다면 이미 살아있는 게 아니다.
족소양담경이 태를 기른다
일단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새 생명을 기르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젠 쓸데없는 생각일랑 접어두어야 한다. 사내아이가 태어날지 계집아이가 태어날지, 유머가 있는 놈일지 재미라고는 없는 놈일지는 알 수가 없다. 이건 구체적인 움직임에 돌입한 뒤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고, 그 가능성을 품고 열 달을 길러서 낳아봐야 안다. 그리고 자라봐야 안다. 그러니 하나의 생명체를 탄생시키려면 결단을 하고 일단은 움직여야 한다. 망설이고 주저한다면 가능성으로 끝날 뿐이다. 생명을 낳을 수는 없다.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 이를 위해 한 발을 내디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기가 임신 둘째 달이다.
둘째 달은 족소양맥이 태아를 기른다. 또 27일이 지나면 곧 임신 2개월의 일수가 된다. 이때는 이슬방울 같던 것이 붉은 빛으로 변하여 복숭아꽃판처럼 된다. 이것은 ‘태극이 정(靜)하여 음(陰)을 낳고[太極靜而生陰], 땅이 두 번째로 화(火)를 낸 것[地二生火]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운(腪)’이라고 한다.
─ ‘婦人’, 「잡병편」, 『동의보감』, 법인문화사, 1,646쪽
둘째 달은 족소양담경맥(足少陽膽經脈)이 태아를 기른다. 맨 앞에 발 족(足)자가 붙은 경맥은 그 기운이 발에서부터 시작하거나 발에서 끝나는 경맥이다. 족소양담경맥은 눈 바깥쪽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이마를 거쳐 귀 뒤로 내려오면서 옆구리 쪽을 지그재그로 돈다. 거기서 다시 무릎 바깥쪽으로 타고 내려가 복사뼈 앞을 지나 넷째 발가락 바깥쪽으로 흐른다. 즉 몸 측면 전체를 흐르는 경맥이다. 담은 오행상으로 목(木)에 배속되고 맥(脈)은 기운이 흐르는 통로이다. 따라서 둘째 달에는 목기(木氣)를 가진 담이 신체의 양 측면을 지그재그로 흐르면서 소양상화(少陽相火)의 기운으로 태를 기른다.
신체의 양 측면을 지그재그로 흐르는 족소양담경맥
상화(相火)가 생명의 싹을 틔운다
목의 기운은 봄에 땅을 뚫고 나오는 기운이다. 임신 첫째 달이 정자와 난자가 서로 엉긴 배(胚 : 엉기다, 시초), 즉 마치 이슬방울 같은 한 개의 낱알이 만들어지는 때라면, 둘째 달은 그 낱알(이슬방울)이 불그스레해지며 ‘복숭아꽃판처럼’ 변하는 때이다. 이렇게 낱알이 싹을 틔워 생명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일정 정도의 열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상화이다. 심장의 화(火)를 군화(君火)라고 하는데, 군화는 신장의 물과 함께 데우고 식히고 하면서 체온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와 달리 상화는 재상(宰相)의 화(火)로, 오장육부의 기능과 생명 활동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이다. 임금(군화)은 궁궐에서 명령을 하고 실질적인 일은 신하(상화)들이 처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상화의 은은한 열기가 ‘배(胚)‘를 쪼이면 태아의 세포는 세 겹의 층을 이루며 분화가 활발해진다. 그리고 수정란이 자궁 내막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여러 가지 신체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태아의 체중은 2g. 크기는 2.5~5cm 정도인 복숭아꽃판 크기로 변한다.『동의보감』에서는 이것을 태극이 고요하여 음(陰)을 낳고 땅이 화(火)를 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즉, 첫째 달에 응축하는 수(水)의 기운으로 꽃몽오리 같은 배(胚)를 만들었다면, 둘째 달에는 화(火)의 기운으로 그것을 벌어지게 하여 꽃판이 드러날 정도로 성장이 된 것이다. 이것을 ‘운(腪)’이라고 한다. 임신 2개월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태아의 주위를 덮고 있는 융모 조직이 활발하게 증식해 태아에게 필요한 영양과 산소를 공급하고 불필요한 노폐물을 엄마 쪽으로 운반한다. 그리고 심장의 형태는 없지만 두 개의 혈관이 튜브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수축과 팽창을 계속하며 온몸에 혈액을 순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아직 태아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배의 상태에서 한발 내디딘, 태아로 성장해갈 수 있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고기 肉’에 ‘움직일 運’을 붙여 쓴 게 아닐까.
임신 첫째 달의 꽃몽오리가 꽃판이 드러날 정도로 성장한 것을 운(腪)이라고 한다.
군화가 몸 안에서 인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일을 하는 화(火)라면, 상화는 외부와 접촉하려는 화(火)이며, 그러한 접촉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는 기운이다. 이러한 상화의 기운이 탯줄을 만들고, 혈액을 온몸으로 보낼 튜브 모양의 혈관을 설치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며 태를 기르는 것이다.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입덧이 생기기 시작한다.(입덧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는 생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고난 같은 것이다. 시련을 겪어야 내적인 힘이 생기고 이 힘이 생명이 살아가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날개>의 주인공 ‘나’는 이런 고난을 두려워하여 아내에게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골방을 박차고 나와 혼자서 살아갈 용기도 내지 못하고 오로지 생각만으로 살아간다. 이러니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동력이 생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안으로는 오장육부의 기운이 순환이 되지 않고, 밖으로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담의 결단력은 청정함에서 나온다
담즙은 간장에서 나온 것으로 맑고 깨끗한 액이다. 그래서 담을 일컬어 중정지부(中淨之府), 또는 중청지부(中淸之付)라고도 한다. 장경악은 “담은 중정지관으로서 맑고 깨끗한 액을 가지고 있으므로 중정지부라 한다. 다른 부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탁하나 이것만은 유독 맑다.”(『유경. 장상류』, 232. 배병철, 『기초한의학』, 201에서 재인용.)라고 하였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을 하여 씨앗을 배태한 첫째 달에 이어, 둘째 달은 씨앗을 틔워 생명체로 자라나기를 결단하는 두 번째 스텝을 밟을 차례다. 앞으로 아홉 달 동안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한 발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담의 청정한 기운이다. 그렇다면 <날개>의 주인공 ‘나’의 결단력 제로에 움직임 제로인 신체가 이해가 간다. 볕도 들지 않는 골방에서 한 번도 걷어 본 적 없는 축축한 이불을 덮고 아내가 차려 놓은 밥상에서 다 식어빠진 찬밥덩이나 먹고 사는 그에게 어떻게 맑고 청정한 기운을 기대하겠는가? 그런 그가 아내에게 말 한마디라도 용기 있게 내뱉기를 기대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망상, 걱정, 불안, 욕심은 그만! 이제 결단하자.
결단에 걱정과 불안, 욕심이 끼어들면 결단을 내리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내린다 하더라도 기운차게 움직이기가 어렵다. 머뭇거리고 뒤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느라 정작 해야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정력을 소모해버리기 때문이다. 행동은 시도도 못해 보고 생각하는 것에만 모든 에너지를 써버리는 <날개>의 ‘나’처럼. 그러기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기로 결심했다면 실행에 옮기는 순간에는 어떤 걱정도 불안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친 기대도 자만도 없는 맑고 깨끗한 기운으로 결단을 내리고 그 힘으로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니 가장 맑은 즙을 내는 담이 그 일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 담을 일러 중정지관(中正之官)이라고도 하는데, ‘중정(中正)’이란 사물을 대함에 있어 치우침이 없어 공평무사함을 뜻한다. 이 중정의 기운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배(胚)를 박차고 나가기로! 하늘이 낸 씨앗(天一生水)을 땅에서 꽃피우기로(地二生火)!
이렇게 둘째 달은 소양상화가 지닌 운동성과 화(火)의 기운으로 태를 기르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용기는 담의 맑고 청정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기운을 가진 족소양담경이 태를 기르는 것이다. 비단 생명을 기르는 일뿐이겠는가? 일상에서 무언가를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지나친 욕심이나 걱정을 내려놓고 담백하고 맑은 기운을 써야 한다. 그래야 그 청정한 기운에 힘입어 어떤 잉여도 없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결과에 상관없이 얻는 게 있을 것이다. 후회나 자책, 시비 분별이 아닌, 배움이 일어날 것이다.
글_오창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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