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토·금의 삼중주,
형태의 탄생
몸과 절기의 스파크
일요일 아침, 느닷없이 깨어 몇 주째 버리지 못해 산더미가 되어버린 재활용 쓰레기를 버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방바닥에 널려 있는 책더미, 뒤죽박죽 섞여 있는 책꽂이, 수북이 쌓여 있는 자료들, 너저분한 책상…. 눈은 이미 책꽂이를 향했고 손은 벌써 버려야 할 책들에 가 있었다.
책꽂이 서너 칸을 순식간에 비우고 책꽂이 꼭대기에 올려놓았던 책들마저 끌어 내렸다. 방바닥에 쌓여 있던 책들을 빈칸에 챙겨 넣고, 분류에 맞게 다시 배열했다. 쌓여 있던 자료들은 목록을 작성해서 자료보관함에 넣었다. 버릴 책들을 노끈으로 묶어 엘리베이터까지 수차례 왔다갔다하니 맥이 탁 풀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만둘 순 없는 법.
책들을 싸안고 재활용 쓰레기자루에 집어넣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저것들도 한때는 내 손때가 묻은 것들인데, 이렇게 버리고 마는구나.’
한편으론 책에 대한 애착 때문에 아까운 생각도 들고, 한편으론 필요한 사람 만나겠지 하는 생각에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맘먹고 버렸으니 돌아서야 한다.
쌩하니 돌아서는데 어느새 한 아주머니가 달려와 책을 집어 들었다.
“버리는 거예요? 책을 좋아하는데 잘 됐다.”
아주머니는 먹잇감을 찾아 분주히 손을 놀렸다.
‘바로 임자가 나타났군. 잘 가라, 책들아. 새 임자 만났으니 그 집에 가서도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주렴.’
제자리를 찾아 가시오.
책들은 제 운명을 찾아갔다. 집으로 돌아와 가구들도 자리배치를 바꿔보았다. 늘 보던 방이 달리 보였다. 그리고 대청소 시작! 방이며 부엌이며 화장실이며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이제 나만 윤이 나면 된다. 목욕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두 달 만에 가는 목욕탕 행차다. 뜨거운 물에 불린 몸에서 때가 국숫발처럼 밀려 나왔다. 대청소 하느라 지쳐 있던 터라 등은 때밀이 아줌마한테 맡길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때를 밀어보니 때가 너무 많이 나왔다. 밀다 보니 등마저 밀게 되었다. 손닿는 데까지 등을 밀었다. 팔을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면서 때를 미는 걸 탕 안에 있던 한 할머니가 보셨다.
할머니는 앉은뱅이 의자를 내 앞에 탁 놓으시더니
“내 등을 밀어라. 그럼, 네 등은 내가 밀어줄게. 낑낑거리고 미는 꼬락서니 하고는….”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할머니, 저는 때가 많이 나오는데요….”
“탕 안에서 봤다. 때 많이 나오는 거. 그러니까 등을 밀어줘야 시원하지.”
‘아뿔싸, 때 많은 거 다 들켜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할머니 등이나 밀어 드리자.’
헌데 할머니 등에서는 때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때 많은 나를 밀어주려고 일부러 자청하신 거였다. 할머니는 내 등을 있는 힘껏 밀어주셨다. 거의 살이 벗겨질 정도로. 등을 밀고 난 후 할머니와 나는 바나나 우유를 함께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이었다.
나를 일깨운 봄바람~
목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바나나 우유 같은 바람, 봄바람이었다. 절기를 찾아보았다. 입춘(立春)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하, 오늘 내가 한 것은 봄맞이 대청소였구나. 봄이 오는 소리를 몸이 먼저 알고, 나를 일깨워 행동으로 옮기게 한 거였구나.’
그렇다. 나를 일깨운 것은 봄의 기운, 목기(木氣)였던 것이다. 이렇게 계절의 기운은 우리 몸속에도 흐른다. 어디로? 경맥으로 흐른다. 경맥은 계절의 기운과 연동하여 그 계절을 주관한다. 봄에는 목기가 흐르는데 그 기운이 흐르는 경맥은 족궐음간경맥과 족소양담경맥이다. 일요일 아침, 내 몸의 간경맥과 담경맥이 입춘이라는 절기와 연동해서 강하게 스파크를 일으켰던 것이다. 덕분에 새봄을 새 마음으로 산뜻하게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비위맥이 태를 기른다
생명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봄여름 가을 겨울의 차서에 따라 계절이 순환하듯이 생명을 기르는 것도 이 차서를 따른다. 앞서 봄과 여름의 기운을 만나 그에 해당하는 경맥이 태를 기르는 것을 보았다. 이제 가을 기운을 만나야 할 차례일까? 여기서 잠깐. 우리는 흔히 계절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이것은 음양이라는 운동원리로 따져보면 봄과 여름은 발산하는 양의 기운으로, 가을과 겨울은 수렴하는 음의 기운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발산하는 기운에서 수렴하는 기운으로 곧바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기운과 기운이 전환할 때는 그것을 매개하는 기운이 반드시 작동한다. 그렇게 끼어 있는 기운이 바로 토기(土氣)다. 계절로 는 장하(長夏)라고 불렀다. 늦여름, 폭염이 계속되는 때를 말한다. 이때는 봄여름에 태양열로 지구가 달궈져 복사열이 한창 나오는 때라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된다. 온도는 한여름보다 높지 않지만, 땅으로부터 습기와 열이 한꺼번에 올라와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열기 때문에 땀이 줄줄 흐른다. 이런 기운이 흐르는 경맥이 족태음비경맥과 족양명위경맥이다. 엄마의 자궁에서 열 달 동안 태를 기를 때 다섯째 달과 여섯째 달을 담당하는 경맥이 이것이다.
다섯째 달은 족태음비맥이 태를 기른다. 화의 정기를 받기 시작하여 음양의 기가 이루어지고 근골과 사지가 생기며, 모발이 나기 시작한다.
여섯째 달은 족양명위맥이 태를 기른다. 금의 정기를 받기 시작하여 근이 이루어지고 입과 눈이 모두 생긴다.
─ ‘婦人’, 「잡병편」, 『동의보감』, 동의보감출판사, 1,747쪽
다섯째 달은 족태음비맥(足太陰脾脈)이 태를 기른다고 하였다. 족태음비맥은 뭘 말하는 걸까? 먼저 이 용어부터 풀어보자. 족은 발을 말하는데, 기운이 발에서부터 시작되거나 끝난다는 의미다. 족태음비맥은 발에서부터 기운이 시작된다. 태음(太陰)은 습기가 많은 토기를 지칭한다. 비(脾)는 오장육부 중 비장을 말하고, 오행상 토(土)에 배속된다. 마지막으로 맥(脈)은 기운이 교류하는 통로, 곧 경맥을 말한다. 하여 족태음비맥은 오장육부 중 토기가 강한 비가 태음습토(太陰濕土)의 기운을 유통하면서 태를 기른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일요일 아침 나의 몸이 입춘이라는 절기를 만나 새로운 감각(충동)을 일으켰듯이, 비(몸)라는 장부와 태음습토(절기)라는 기운이 만나 태의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열 달 동안 태를 기른다는 것은 몸과 우주의 기운이 만나는 시간이다. 그 기운의 스파크가 일어나고 새로운 우주(시공간)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자궁이다.
족태음비맥은 그 자체로 토기가 강한 맥인데, 인용문에는 화의 정기를 받기 시작하여 음양의 기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화(火)는 앞서 둘째 달, 족소양맥이 태를 기르면서 ‘지이생화(地二生火)’ 하였다. 이렇게 생긴 화가 제대로 발휘하려면 그 지반이 되는 토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몸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족태음비맥의 기를 태가 받을 때, 화의 정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작동한 화와 토의 기는 근골과 사지, 모발을 만든다. 토기로 몸의 뼈대가 되는 근골을 만들고, 불처럼 뻗치는 화기는 몸통에서 사지를 뻗게 하고, 머리에서 모발을 분출한다.
태음습토의 기운을 유통 양명조금의 기운을 유통
또한, 여섯째 달은 족양명위맥(足陽明胃脈)이 태를 기른다고 하였다. 족양명위맥은 앞서 족태음비맥에서 보았듯이 기운이 발에서부터 시작되거나 끝난다. 헌데 족양명위맥은 족태음비맥과 달리, 그 기운이 발에서 끝난다. 다음으로, 양명(陽明)은 건조한 금기(金氣)를 지칭한다. 위(胃)는 오장육부 중 위장을 말하고, 비장과 마찬가지로 오행상 토(土)에 속한다. 하여 족양명위맥은 오장육부 중 토기가 강한 위가 양명조금(陽明燥金)의 기운을 유통하면서 태를 기른다는 말이다. 양기와 수렴하는 금기가 뭉쳤으니 태 중에서 단단하게 형태를 만들어야 할 것을 만드는 시기다. 하여 몸을 강단 있게 하는 근(筋)을 만들고,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 입과 눈을 만든다.
형태가 탄생하는 과정
이로써 보건대, 다섯째와 여섯째 달은 족태음비맥과 족양명위맥, 곧 토기가 뒷받침되는 가운데 화기와 금기의 이중주가 펼쳐지는 시기다. 뻗치고 단단한 기운이 유통되면서 태아의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는 앞서 말했던 장하의 계절 기운과 꼭 맞다. 장하는 토기가 작용하지만, 화기와 금기 사이에 있다. 토기가 주축이지만 화기를 충분히 받았고 이제 금기로 가야 할 시점이니 세 가지 기운이 짬뽕인 상태인 것. 이렇게 형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발산하는 기와 수렴하는 기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몸이라는 지평을 만든다. 그야말로 새로운 시공간이 창조되는 중이다. 이제 태아는 눈·코·입·몸통과 사지를 갖추었다. 두께가 있고 질량을 가진 존재, 신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이 우주의 한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형태의 탄생
이렇게 형태가 탄생하는 과정은 기와 기의 농밀한 대화가 오고 가는 시간이다. 우주와 엄마와 태아의 농밀한 대화. 이 대화야말로 자연지(自然智)다. 생명을 움트게 하는, 생성하는 지(智)! 그러니 자연지는 지적(知的)으로 어떤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기로써 느낄 뿐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느낄 뿐! 그 공감능력이 태를 기르고 형태를 만들고 우주와 연결된다. 만약 우주와 엄마와 태아 사이에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땅은 알고 있다. 지금쯤 봄바람이 불 거라는 것을. 다만, 이심전심으로 느낄 뿐 달리 아는 것이 없다.
글_이영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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