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남인 백수 2세대 : 혜환 이용휴] ④ 이용휴의 제문, 그 담담한 글쓰기


혜환이 들려주는 아주 특별한 레퀴엠



겨울의 초입.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진다. 자연의 이치상 생·장·소·멸을 겪지 않는 존재는 하나도 없건만, 소멸에 관한한 남다른 감정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우리를 더욱 힘겹게 한다. 다시는 함께 할 수 없기에 담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제문을 지어 죽은 이를 추모하며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제문을 낭독하며 죽은 이들의 영혼에 말을 건네고, 그들의 장도(長途)를 위무했던 것이다. 물론 제문은 애도만 담지는 않았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을 말하는 양식이 제문이었다. 죽은 이들이 묵묵히 레테의 강을 건널 때,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행위는 온전히 산 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픔을 다하면서도 특별한 그 사람이 드러나야 하므로 제문의 글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애도의 글이라는 제문의 특성상 문체나 내용상의 파격은 쉽사리 허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의례에 쓰이는 글이니, 격식을 따져야 하므로 글의 양식 자체가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문마다 그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추모하는 이들의 슬픔은 남다르지만 형식과 내용은 오히려 천편일률이었다. 가까운 이가 아니라면 공명하기 어려운 글이 제문이었다.


18세기 혜환 이용휴는 이 제문에 개성을 불어넣었다. 혜환은 “세상에서 남들이 조문하는 상투적인 말로 떠나는 이들의 귀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쓰고자 했다. 슬퍼하더라도 그 사람에 맞게 슬퍼야 하고, 기억하더라도 온전히 그 사람의 그 사람다움을 기억하는 글! 혜환에게 제문은 이렇게 써야만 하는 것이었다. 떠나는 이들의 삶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혜환은 그 평범한 사람들의 남다른 개성을 남김없이 반추했다. 그래서 추모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해도 혹은 가까운 이가 아니더라도 모든 이들이 혜환의 제문에 공명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 혜환은 연암 박지원과 더불어 제문의 글쓰기에 있어서 단연 최고이다. 혜환과 연암 박지원의 제문은 두 사람의 개성이 다른 만큼 그 분위기와 표현 또한 매우 다르다. 혜환이 제문의 글쓰기에 온기를 불어넣었다면, 연암은 그를 이어받아 현장에서 느낄법한 그 미세한 감정의 파동을 잡아내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제문을 읽으면 쓰는 이의 마음에 빠져들고, 죽은 이의 삶 그 자체를 온전하게 느끼게 된다.      




담담한 글쓰기, 더 깊은 슬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한 노인을 이해하게 만드는 혜환의 글쓰기는 극도로 간결하고 응축되어 있어서 정말 놀랍다. 총 88자로 이루어진 제문을 통해 우리는 정수노인을 만난다. 정수노인의 삶이 참으로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제문도 참으로 담박하다. 담박해서 오히려 여운이 더 오래간다. 아주 짧게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의 삶의 한 자락을 오래도록 서성이며 그 삶을 반추하게 되는 이 역설은 혜환 제문의 특징이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정수 노인을 묻으려 하였다. 그때 일가인 내가 술잔을 들어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말했다.
“공은 세상에 있을 때도 늘 세상을 싫어했지요. 이제 영영 가는 곳은 먹을 것 입을 것 마련하는 일도 없고, 혼사나 상사의 절차도 없고, 손님을 맞고 편지를 왕래하는 예법도 없고, 염량세태나 시비의 소리도 없는 곳일 게요. 다만 맑은 바람과 환한 달빛, 들꽃과 산새들만이 있을 뿐이겠지요. 공은 이제부터 영원히 한가롭겠구려.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공은 분명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상향.”

「祭正靑叟文」


아마도 정수노인은 평생 가난하면서 분주하게 살아왔음에 틀림없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경조사를 챙기고, 빈객을 접대하고, 세상의 이런저런 시비 다툼에 시달리며 한 시도 편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짧은 말 속에 정수노인의 신산한 삶이 다 드러나고, 혜환이 느끼는 그 안쓰러움까지 낱낱이 전달된다. 간결하지만 모든 것을 응축했다. 삶의 편린들을 낱낱이 열거하지 않아도 정수노인의 살아온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켜켜이 얽힌 감정들이 남김없이 전해진다. 


죽은 다음에야 한가할 수 있는 인생, 그 삶이 어떠했을지 이 한 마디 말로 다 전달된다. 죽은 이후에야 맑은 바람과 환한 달빛, 들꽃과 산새들을 즐길 수 있는 삶. 이 세상보다 나은 저 세상. 죽어서라도 제발 편안하기를 바라는 혜환의 간절함이 읽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슬프다는 말 한 마디도 내보이지 않았건만,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누군가의 삶 뿐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삶은 늘 분주하고 죽은 다음에야 쉴 수 있는 것, 그게 인생이다. 혜환은 이 제문을 통해 정수노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어루만진다.


이용휴의 아우 정산처사 제문



혜환은 친구 유처사가 뜻하지 않게 죽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수명을 백 년으로 기한을 삼으니, 사랑하는 자는 진실로 그것을 믿으며 혹은 그보다 더 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어긋나게 되면 어찌 슬퍼서 실성함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祭花郊柳處士文」,『혜환 이용휴 산문전집』상) 갑작스런 죽음은 다 슬픈 일이지만, 젊은 사람의 죽음은 더 애통하기 마련이다. 황맹년이란 이가 28살에 죽었다. 혜환 또한 말할 수 없이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혜환은 아주 담담하게 황맹년을 기렸다.  


모든 사물은 출생은 때로써 하고 멈추는 것은 한정으로써 한다. 누에는 봄에 늙고 보리는 여름에 죽는다. 누에는 잠을 자서 실이 되고, 보리는 이삭이 빼어나서 열매가 되면 그 일은 이미 완성된 것이다. 사람도 또한 그러하다.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과거에 올라서 조정에 서면, 사람의 일은 대략 이미 다한 것이다. 그렇다면 황맹년 군의 죽음은 요절이 아니라, 대개 그 직분을 다하고 떠난 것이다. 비록 그러나 28년 사이에 스스로 친척과 붕우들 중에 허여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가 영영 떠나가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 들어가 영결을 하여 곡하고 또 그 소리를 써서 애사를 지었다. 책을 펴서 한 번 읽어보면 마치 가을 산에 들어갔을 적에 잎이 울고 샘물이 목 메이는 것과 같아 무한한 처량함을 이루게 되니 슬프도다!

-「정자 황맹년의 애사권의 뒤에 쓰다(題黃正字孟年哀辭卷後)『혜환 이용휴 산문전집』상


황맹년이 비록 28살의 젊은 나이에 지고 말았지만, 할 일을 못하고 죽은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동안 완전하게 살다가 갔다. 그 삶이 완전하지 못해 슬픈 게 아니다. 다만 그와 허여했던 이들이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니 슬플 뿐이다. 요절했다고 생을 다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이는 인생의 2막까지만 살고, 어떤 이는 5막까지 산다. 그러나 누구의 삶도 완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2막도 완전하고, 5막도 완전하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길게 볼 수 없어 참으로 슬프다. 혜환의 슬픔은 각도가 다르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모든 자연이 겪는 절차다. 짧고 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요절을 한스럽게 여기면, 황맹년의 인생이 불쌍해 보이지 않겠는가? 혜환은 죽은 이의 삶을 담담하게 드러내되, 보내는 자의 슬픔에는 깊이 공명했다. 




완전한 삶, 완전한 죽음


혜환의 제문에는 애도가 담겨 있지만, 애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기억이다.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삶이 완전하면 죽음도 완전하다. 여한 없이 살다간 인생이라면, 그 죽음에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혜환은 여한 없이 살다간 사람들과 경쾌하게 이별했다. 작별은 슬프지만 영혼의 발걸음은 가벼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 처사가 돌아갔으니 세상은 말세가 되었고 풍속은 경박한 풍속이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옛날의 질박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처사는 태어나 60여 년이었는데, 일찍이 하루도 진기한 음식을 먹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밭은 반 무도 없었으며 재산도 얼마 안 되었으니, 곤궁함이 매우 심했다. 그러나 비록 교묘하게 감찰하는 자라도 능히 그 청탁하는 것을 추적하지 못하였고, 취지를 달리하는 자라도 감히 점잖은 체하며 아첨한다고 무함하지 못했으니, 여기서 처사를 볼 수 있다. 황강의 굽이에 깨진 옹이조각으로 만든 창틀 집, 흙으로 만든 침상에서 살면서 풀이 지붕 위에 솟아 있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성스러웠으며 남자는 책을 읽고 여자는 길쌈을 했다. 자기의 자리를 지켜 본분을 행하니, 저 부귀는 했으되 마음에 부끄러워 이마에 땀이 나는 자와 견준다면 어떻겠는가?
처사의 묘소는 그 집과 밥 짓는 연기가 통하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니, 이는 당으로부터 방으로 가는 거리이다. 풍수가의 말에 빠져서 빈산이나 황량한 들판 사이에 비바람이 진동하고 여우와 살쾡이가 울부짖는 데에 묘를 쓰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아! 흰 망아지가 지나가고, 메조가 익었으니 처사는 그 행장을 꾸려서 떠날지어다. 

-「외사촌 조처사 춘경 제문(祭表從趙處士春卿文)」같은책


제문의 주인공 조처사도 예외 없이 빈한하고 청렴하다. 보잘 것 없는 흙집에다 돌보지 않아 잡초까지 무성한 그런 곳에 거처하면서도 가족끼리 화목하여 남 부러울 것이 없다. 조처사는 부끄러울 일도 없고, 걱정도 없이 그렇게 평온하게 인생을 살다 떠났다. 물론 가난하여 명당에 산소를 마련하지 못했지만, 집 가까이에 묘소가 마련되어 죽어서도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요, 죽음인가? 미련을 가질 일이 그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다. 


슬픔보다 경탄이 가득한 이 제문은 그 울림 또한 남다르다. 제문이 죽은 이를 위로하는 레퀴엠이자 산 자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라면 제문이라고 늘 슬픔을 자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혜환의 제문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남은 자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의식이 되려면, 그 완전한 삶을 기억하며 그렇게 살아낼 힘을 줘야하지 않을까?


조선 중기의 화가 이경윤의 <고사탁족도>의 부분



한 편만 더 읽어보자. 혜환의 제문에는 온기가 흐른다. 죽음을 너무 자연스럽게 서술하여 이 제문은 오히려 송축문처럼 보인다. 이 제문의 주인공 김명로군은 50년을 살다 갔지만, 100년을 산 것과 맘먹는 생을 누리다 갔다. 조물주는 공평하여 100년을 산 것처럼 50년을 살았기 때문에 수명을 더 주지 않았다. 100년을 살았으면 200년을 사는 사람처럼 생을 누렸을 테니 평등한 조물주의 입장에서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제문이 참으로 유쾌하다. 김명로군의 삶이 즐거웠으니 제문도 경쾌하다. 이렇게 혜환의 제문은 파격적이다. 그렇다고 죽은 이를 보내는 혜환의 마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우를 다한 후배와 작별하는 혜환의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슬프다. 그러나 혜환은 김명로군의 살아온 시간을 제대로 드러내야 진짜 애도라 생각했기에 그의 삶의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했다.


오호라! 그대는 인륜과 물리에 충실하고 신의와 의리에 도타웠다. 가슴에는 도회지가 담겨있지 않았고, 입에는 남을 욕하는 말이 오르지 않았다. 선행을 하여도 이름나기를 구하지 않았고, 베풀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대의 몰래하는 수행을 조물주는 기억하고 있어 성적 매기는 최판관의 장부에는 우등에 올라가 ‘군자다’라고 썼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손태와 왕공겸의 일을 통하여 알았다.
아, 인생이란 백년을 정한으로 삼아 상수(上壽)라고 일컫는다. 그대는 안락함으로 거처를 삼고, 즐겁게 지내는 것으로 가족을 삼았다. 부인은 음식을 잘 만들었으니 궁궐의 요리가 부러우랴? 아이들이 독서를 잘 하니 음악에 대신할 수 있다. 이렇게 살고도 만약 또 백년의 수명을 다 채운다면 다른 사람이 상수를 산 것에 비해 두 배쯤 더 살아 한 2백년은 산 셈이 된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이제 백년 수명에서 반을 던 것은 조물주가 긴 것은 자르고 짧은 것은 길게 하여 평등하게 만드는 뜻이 담겨있다. 달관한 사람이라면 그 뜻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궁상맞게 늙어버린 포의에 불과하건만 그대가 늘 존경하여 모셨고, 그대는 까마득한 후배였건만 나는 늘 그대를 예우하였다.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나는 이제 그대를 잃고서 슬픔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와 세상에서 남을 조문하는 상투적인 말로 그대의 귀를 번거롭게 할 겨를이 없구나.

-「김명로 제문(祭金君溟老文)」같은 책


혜환은 크게 욕심이 없었다. 그리고 욕심 없는 사람들의 삶을 찬미했다. 김명로군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생을 살았다. 50년간 부족함 없이 할 것을 모두 했다. 완벽한 인생의 기준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박하지만 베풀 줄 알고, 선행을 하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완벽한 것이다. 혜환은 군자라 말했지만 도가의 지인에 가까운 삶을 추구했다. 여기에 아이들의 독서 소리는 음악처럼 들리고, 부인의 음식 솜씨는 궁궐 음식 부럽지 않으니, 더 보태려야 보탤 게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니 50년을 살아도 완전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었으니 다른 이를 조문하는 의식처럼 상투적인 애도에 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혜환은 후배에게 아주 특별한 레퀴엠을 들려주었다. 슬픔과 비통에 어린 레퀴엠이 아니라 축복 가득한 레퀴엠. 진한 아쉬움 속에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위무의 노래. 혜환은 이렇게 제문을 통해 우리들에게 삶을 선사했다.


혜환의 제문이 특별한 건, 죽은 이를 몰라도 공감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제문의 격식을 파괴함으로써 제문이 더 제문다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각 삶의 개별성을 완벽하게 전한 건 순전히 혜환의 이 파격 덕분인 것이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上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下 - 10점
이용휴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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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무심이 2014.11.19 21:45 답글 | 수정/삭제 | ADDR

    혜환의 제문에는 연암의 제문과는 또 다른 담백함이 있네요.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