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매너’있었을까? -세련된 도시인의 탄생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매너’있었을까?



“그 사람 매너가 참 좋아” 혹은 “매너 없네~” 이런 표현 혹시 자주 듣고 자주 쓰는가?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다가 가끔씩 튀어나오는 이 단어. 그런데 깊이 들어가면, 매너가 뭔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너 좋다=예의바르다’는 의미는 어쩐지 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매너'를 챙겼을까? 일단 『위생의 시대』를 지도삼아 언제부터 매너가 이렇게 중요해졌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젠틀맨이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오늘은 우리가 또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몸 가지는 법을 말하노라 조선 사람은 매양 길에 다닐 때에 입을 벌리고 다니니 이것은 남이 보기에 매우 어리석어 보이고 또 사람의 몸에 대단히 해로운 것이 숨을 입으로 쉬면 공기가 바로 부화로 들어간즉 여름에는 공기에 각색 먼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독한 물건이 바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니 대단히 해롭고 겨울에는 일기가 추운즉 공기 속에 독한 생물은 적으나 먼지와 찬 기운이 바로 들어가니 부화에 해가 대단히 있는지라 코로 숨을 쉬게 되면 공기가 바로 부화로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길이 여러 번 꼬부라졌은즉 공기가 부화에 다다를 때에는 공기가 얼마큼 더워졌고 먼지와 독한 생물들은 중간에서 막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또 콧속에 털이 얼마큼씩 있으니 그 털 있는 까닭은 이 먼지와 독한 생물을 중간에서 막으라는 뜻이라 그런 고로 코로 숨을 쉬면 사람의 위생에 대단히 유조하고 또 첫째 입을 다무니 보기에 병신 같이 보이지 않는지라


위의 인용문은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 『독립신문』의 논설이다. (1896년 12월 12일자) 읽다가 정말 빵 터졌다. 논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길을 다닐 때 입을 벌리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왜 입을 다물고 다녀야 하는지에 관해 두 개의 이유를 제시했는데, 결국 입을 다물고 다니면 보기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말씀이다. 표현이 좀 직설적이라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도 미세먼지 농도가 짙은 날이면 마스크를 착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코와 입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독한 물건이”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이 위생 관념은 약 120년 전에 시작된 것!


이제 개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몸의 청결이다. 세균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세균의 담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개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물을 끓여 먹고 공기를 맑게 해야 하는 것처럼 개인들은 자신의 몸을 철저히 ‘소독’해야 한다.


─고미숙, 『위생의 시대』, 89쪽


놀라운 것은 이 당시의 개혁은 ‘말’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으로도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박영효. 그가 내정개혁에 관해 올린 상소문에는 “아편과 흡연을 금할 것” 외에도 “하천을 청결히 할 것, 도로변에 가로수를 심어 공기를 맑게 할 것, 목욕탕을 설치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대대적인 목욕 캠페인이 진행된다.


목욕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목욕 리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하루에 한번 샤워를 하지 않으면 냄새가 난다’며 1일 1샤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떨 때에는 아침·저녁 두 번씩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씻어대는 걸까? 씻으면 깨끗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스나 신종 플루가 한창 유행했을 때를 기억하시는가? 그때에도 예방법이 손 씻기였다. 씻어서 예방할 수 있는 건 세균이다. 하지만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에는 씻는 것이 예방이 될 수 없다. ㅠ_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씻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샤워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물이 소모될 것인가. 또 제대로 된 샤워 시설을 갖추려면 집도 커야 한다. 즉,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에 대한 폭력적 전유이자 사적 소유의 증식을 의미하는 셈이다. (『위생의 시대』, 91쪽)


한편에서는 샤워를 하며 물을 펑펑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실 물을 구하는 것조차 힘들다. 가끔 너무 당연하게 전기나 물을 쓰면서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편리한 것들이 무언가의 대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사용된다는 점을. 그러니 샤워하기 전에, 꼭 필요한지 피부에게 먼저 물어보자. (피부에는 약간의 유분이 있는 게 더 좋다고 한다. ^^) 청결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이제 몸 뿐 아니라 개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외국 부인을 만나 볼 때에는 예를 사나이에게보다 더 공경하고 부인 앞에서 담배를 먹지 않고 부인 있는 데는 음담과 더러운 물건을 이야기도 아니하며 대소변 같은 말은 당초에 옮기는 것이 실례요 남의 집에 갈 때에 파나 마늘이나 냄새 나는 음식은 먹고 가지 않는 법이요 옷이나 냄새 나는 몸을 가지고는 남의 집에 가지 않고 남 보는데 내 살을 보이는 것이 큰 실례요 남 앞에서 트림하는 것과 하품하는 것과 재채기하는 것이 실례요 재채기는 어쩔 수 없이 할 지경이면 입을 손으로 가리고 아무쪼록 소리 덜 나도록 하고 한 후에 그 사람에게 용서하여 달라고 말하는 법이요 남 앞으로 지나갈 때에 용서하여 달라고 하고 지나가고 …… 남 보는데 코 후비는 것과 이 쑤시는 것, 귀 후비는 것, 머리와 몸 긁는 것과 음식 먹을 때에 소리나게 입맛 다시는 것과 국물 음식 먹을 때에 소리나게 마시는 것은 모두 실례라


『독립신문』 1896년 11월 4일자 논설이다. 익숙해서 너무 놀랐다. -_-; 우리가 대체적으로 탑재하고 있는 '기본 소프트웨어로서의 매너'가 다 이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련된 도시인의 탄생’을 목격하게 된다. 사실 그렇다. 혼자 있을 때에는 생리작용을 편안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참거나 가리고 한다. 어떤 커플은 상대방하고 함께 있을 때에는 트림이나 방귀를 뀌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신비로움이 깨지기 때문이라나…


방귀는 당연한 현상 아닌가요? ^^;



어릴 때 무척 좋아했던 전래동화가 있다. <방귀쟁이 며느리>이다. 시집을 간 후 3년 동안 방귀를 참았던 며느리가 얼굴이 노래지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의사는 방귀를 뀌면 낫는다는 처방을 내렸고, 시부모님의 허락 하에 며느리가 3년 묵은 방귀를 시원하게 배출한 그 순간! 그 소리와 방귀의 힘 때문에 지붕이 내려앉았다는 이야기이다. (아직 방귀를 트지 못한 커플들이여! 『위생의 시대』를 상대에게 선물하시라! ^^;)


어쩌면 '매너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과 통하는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의 행동에 그러한 배려가 어느새 증발해버리고, '매너'라는 형식만 남은 것이라면? 때로는 '매너'없음이 우리의 삶을 더 즐겁게,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아야 하는 이 어려움~)


병리학이 도래하면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견고한 장벽이 세워졌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둘러친 방어벽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그 안에 가두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장벽 안에 갇혀서 사람들은 자연과의 거리, 타인과의 거리, 연인과의 거리가 세련된 도시인의 삶이라고 자명하게 받아들인다. 길거리에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인간 사이에도 서로 ‘지지고 볶는’ 관계는 허용되지 않는다. 두렵기 때문이다. 고독과 우울이 근대인의 질병이 되는 건 그런 점에서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다 보니,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 아니라, 덜 불행해지고 병에 덜 걸리는 게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고작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다니! 이보다 더 초라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이 어처구니없는 배치를 바꾸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마음의 장벽을 박차고 나와 ‘거리들’을 지워 버려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기계, 몸과 마음 등 이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들을. 그것이야말로 내 몸을 ‘나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터이니. (『위생의 시대』, 95쪽)


위생의 시대 - 10점
고미숙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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