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노론백수 1세대 김창협] 주자학으로 주자학을 가로지르기!

주자학을 횡단하는 주자학자! 



1. 송시열과 윤휴의 대결, 주자학 대 원시유학 


농암 김창협은 송시열의 학맥을 계승하여 주자학을 지켜낸 노론계의 정신적 지주다. 농암의 동지이자 스승이었던 송시열은 “나를 알아줄 분도 주자이고, 나를 죄줄 분도 오로지 주자다”를 외쳤던, 철두철미 주자학자였다. 송시열은 어지러운 시대, 오랑캐가 중국을 장악한 시점에서, 이 난국을 타개할 방책은 북벌이자 중화이념의 고수라고 생각했다. 송시열에게 중화의 이념은 오직 주자학이었다. 주자의 이념을 더 견고하게 고수하는 것, 더 철저한 주자주의자가 되는 것 말고는 오랑캐를 타개할 방책이 없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은 주자의 해석 말고는 어떤 해석도 용납하지 않았다.


더구나 남인계의 윤휴로 인해 송시열은 더 고집스럽게 주자 해석의 독보성에 매달렸다. 윤휴는 송시열의 평생 라이벌이자 논적으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학문적으로 사사건건 대립했다. 윤휴는 주자 해석만 인정하는 학계의 일방향적 경향에 제동을 가하며 다양한 경전 해석을 주장했다. 주자주의 송시열에게 윤휴는 이렇게 대결했다.


천하의 허다한 의리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주자에 개의하지 말고 오직 의리만을 논할 따름이다. 주자가 다시 온다면 나의 학설이 인정받지 못하겠지만, 공자나 맹자가 태어난 연후라면 나의 학설이 승리할 것이다.(남기재, 아아록)


이 말은 18세기 노론학자 남기재가 기록한 것이다. 주자를 깎아내리고 주자에 필적하는 존재로 자신을 높인 윤휴! 노론 지식인들이 윤휴에게 씌운 이미지였다. 윤휴는 서인들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거론되어 1908년에 가서야 간신히 신원되었다. 실상 윤휴는 반주자주의라기보다 경전 해석의 주자 일원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주자의 주석만을 유가 경전의 해석으로 인정하는 당대의 주류적 경향에 반대하여 주자의 해석 이전에 존재했던 공맹의 원시유학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런 윤휴를 용납하지 못했다.


주자학은 주자 사후, 관리들의 등용문이 되는 학문으로 견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송시열과 윤휴가 원래부터 적수로 대결했던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때 학문적 교류를 하는 등 사이가 매우 좋았다는 사실이다. 윤휴는 북인 집안의 후손이지만 젊어서 어떤 당파에도 매이지 않아 남인, 서인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사귀었다. 하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윤선거, 민정중 등의 서인과 자연스럽게 교류했다고 한다. 게다가 30세의 송시열은 20세의 윤휴를 직접 찾아와 3일 동안 토론하며, 자신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탄식했던 적도 있다. 1651년 윤휴와 송시열이 속리산에서 다시 만났는데, 윤휴는 주자 시의 운을 따서 자신의 포부를 펼치자고 송시열에게 제안했고, 송시열은 어찌 성인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냐고 펄쩍 뛰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기질의 차이랄까 두 사람 사이에 주자를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게 달랐다.


송시열과 윤휴의 결정적 갈등은 두 사람이 산림으로 명망을 얻어 정계에 진출한 뒤에 일어난 1차 예송 때부터다. 1차 예송은 효종 사후,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제 문제로 일어난 기해예송(1659년)을 말한다. 송시열은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는 주자의 예법을 들어 기년(1년복)을 주장했다. 윤휴는 ‘왕의 예는 사대부와 서인이 다르므로 자의대부는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예조에서는 국제(國制)로 기년설을 채택했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사실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는 예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불과했다. 시작은 그랬다. 남인 중에도 기년을 주장하는 이가 있었고, 서인 중에도 삼년을 주장하는 이가 있었다. 윤선도가 상소를 올리기 전까지 이 복제 논의는 처음엔 전혀 당쟁이나 이념의 색깔을 지니지 않았다. 윤선도가 송시열을 비판하는 바람에 예법 문제가 정치 논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윤선도는 송시열의 복제론을, 효종이 적자가 아닌 차자로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적통 부정론에 입각해있다고 비약시켰다. 윤선도의 판단에 의하면 송시열은 왕의 예법이 아니라 일반 서인의 예법을 주장한 바, 효종의 왕권계승을 문제 삼고 그 권위를 무시한 것이 된다. 서인은 윤선도를 간흉이라 비판했고 윤선도를 함경도 삼수로 귀양시키는 선에서 이 논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갈등의 저변에는 왕권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느냐, 신권의 자율성을 강조하느냐라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입장이 잠복되어 있었다. 남인들이 왕권 중심의 사고를 했다면, 서인들은 신권 분립의 사고를 했던 것이다. 노론과 남인의 차이! 윤휴와 송시열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송시열과 윤휴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74년, 효종비의 죽음으로 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가 문제시되었다. 서인과 남인이 다시 격돌한다. 이름하여 2차 예송인 갑인예송! 송시열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채택한다. 1675년(숙종 1) 숙종이 현종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서인들은 남인의 윤휴(尹鑴)·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의 공격으로 관직을 빼앗긴다. 송시열은 효종의 적통을 인정하지 않고 붕당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장기로 귀양 가고, 김수항은 영암으로 쫓겨난다.


결국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윤휴가 사사되기까지 서인과 남인들 간의 정국 주도권 쟁탈전은 예송논쟁으로부터 유학의 정통성 논쟁으로 비화된다. 송시열은 경전 해석에 있어 주자만을 절대 진리라 믿었고, 윤휴는 주자를 여러 주석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송시열이 윤휴 일파를 이단으로 몰아간 이유는 너무나 분명했다. 주자학은 왕권에 대해 신권 즉 사대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자들에게 이념의 준거가 되었고, 원시유학은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전제국가를 상정하는 자들에게 이념적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인과 남인은 서로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적 입장에 따라 주자학파와 원시유학파로 팽팽하게 맞섰다. 이렇게 보면 윤휴가 탈주자주의라해서 더 진보적이고 송시열이 주자주의라 해서 더 보수적이라고 논단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이 대립으로 인해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주자대전>의 주석서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편찬에 착수했고, 죽을 때까지 이 작업에 매달렸다. 이 책이 완성된 후, 후학 김창협에게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라고 유언을 내릴 정도로 완벽을 기했다. 김창협은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면서, 송시열의 주석에서 미진한 문제를 노론 학인들과 토론했고, 이후 주자의 저술을 보완하는 작업이 노론 학자들의 주요한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송시열이 <주자대전>에 매달린 이유는 윤휴와 같은 남인 이단들 때문이었다. 주자의 정맥 곧 유학의 정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주자의 해석에 더 완벽을 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농암의 주자학, 주자의 본의를 찾아라!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농암은 주자학을 존중했고, 주자 해석을 탈주하여 양명학에 경도되거나, 원시유학으로 회귀하는 학문 경향을 이단이라 취급했다. 학문의 극치와 의리의 정밀함과 가르침의 분명함은 주자의 언어와 사유 이외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농암은 결단코 주자학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농암은 주자의 본의를 왜곡하는 당대의 주자학 연구를 염려했다. 주자가 편찬한 텍스트들을 더 면밀하게 비교, 분석하여 주자의 본의를 찾아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저는 그래서 배우는 자들이 종신토록 주자의 글을 읽되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뜻이 합치되지 않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대번에 자신의 견해를 세우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서 깊이 생각하고 오랫동안 음미하여 의심스러운 점이 없어진 뒤에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간혹 이곳과 저곳의 풀이가 다르고 앞뒤의 뜻이 다른 경우는 한쪽의 설만 고집하지 말고 각각 그 가리키는 바를 따라 끝까지 연구하여 어려운 뜻이 잘 통하도록 해석함으로써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안 뒤에 그만두기를 바랐습니다. 손수 쓰신 글이 초년과 만년의 차이가 있거나 기록하는 데에 잘잘못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는 더욱 분명히 보고 자세히 고증하여 어떤 것이 정론(正論)이고 어떤 것이 본의(本義)인지를 안 뒤에 그만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금의 여러 학자들의 주장과 자기 스스로 터득한 견해에 대해서도 모두 선생의 주장과 비교하되 합치하는지 합치하지 않는지를 관찰하여, 합치하면 취하여 남겨두고 합치하지 않으면 버리고 고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선생을 돈독히 믿고 잘 배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민언휘에게 답함>, 《농암집》)


농암은 주자가 지은 텍스트일지라도 초년에 쓴 것과 만년에 쓴 것 사이에 착종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고증해서 주자의 정론과 본의를 찾아내라고 말한다. 여러 주석들 중에 주자 해석과 일치하는 주석을 취해야할 뿐만 아니라, 주자의 텍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주자에 가까운 정론과 본의를 고증해서 추려내라는 것! 농암은 주자학의 본래로 돌아가기 위해 주자의 언어들을 고증했다. 경전의 언어에 대한 훈고가 아니라 주자의 언어에 대한 훈고! 왜곡되거나 혼효된 주자학이 아니라, 주자가 원래 말하고자 한 바에 가장 가까운 주자학의 정수를 찾아 들어갔다.
농암이 주자의 언어를 고증하고 정론을 따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역으로 생각해보면 농암의 시대에 와서야 주자학의 정론을 따지는 작업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성리학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의 논쟁이 활발했던 16세기, 17세기 전반까지 주자의 저서 전체를 보기는 힘들었던 듯하다. 주자와 그 제자들의 저서 전모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17세기 전반 이후로 짐작된다. 이 때문에 송시열에 이르러 주자대전의 주석 작업이 이루어지고, 김창협이 그 주석에 대해 다시 정밀하게 고증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협도 1690년에야 주자가 초기에 편찬한 《논맹정의(論孟精義)》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논맹정의》와 주자의 중후반기 저작인 《논어혹문》《논어집주》를 비교하는 작업은 농암이 은거할 때 지은 《농암잡지》에서 이루어진다.    


《논맹정의(論孟精義)》도 반평생을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우옹의 말씀을 들으니, 지난날 소설을 보니 중국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연경(燕京)의 저자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근년에야 비로소 사신 갔다 온 사람을 통하여 이른바 《주자유서(朱子遺書)》라는 책을 얻게 되었는데, 주자가 편집한 책들이 다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근사록(近思錄)》, 《연평답문(延平答問)》, 《상채어록(上蔡語錄)》 같은 글들이 모두 한 책으로 묶여 있었고 《논맹정의》도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근년에 간행된 것으로서, 이 책이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은 정말 크나큰 다행입니다.(<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 경오년(1690), 《농암집》)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行有餘力則以學文)”고 하였다. 이는 바로 공자가 사람이 이미 힘써 행하였으면 또한 반드시 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 것이다. 대개 힘써 행한 것은 본래 제자가 먼저 힘써야 할 것이지만, 학문도 또한 느슨하게 해서는 안되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행유여력즉이학문(行有餘力則以學文)’에서 ‘즉이(則以)’라는 두 자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연후(然後)’라는 글자와는 조금 다르므로 반드시 주의해 보아야 하는데, 《논어정의》의 설명들은 대부분 여기에 대해 살피지 아니한 듯하다. 정자 이후로는 대개 본을 먼저하고 말을 뒤로 한다는 의미만 밝혔는데, 주자에 이르러 힘써 행하였으나 글을 배우지 않으면 성현의 완성한 법을 상고하여 사리의 당연함을 깨닫지 못하므로 행한 것이 혹 개인의 사사로운 뜻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침내 사람은 반드시 학문을 해야 한다는 성인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내편>3, 《농암잡지》)


농암은 ‘행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는 《논어》의 말씀은 행하고 난 뒤에 글을 배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논맹정의》의 여러 주석가들과 ≪논어집주≫에서 정자는 행하는 일을 우선시하고 중시할 것으로 해석했는데, 주자는 행하는 데 진력하는 게 당연하지만 더불어 반드시 학문도 부지런히 힘써야 함을 강조한 말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농암은 주자 텍스트들 상호간의 비교를 통해, 행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학문에도 힘써야 한다는 주자의 해석이 성인의 본지임을 알려준다. 주자가 편찬한 책들에 의거하여 주자의 해석을 고증하는 작업, 이것이 농암의 훈고학이었다.


학문을 갈고 닦아 유연하게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것, 어쩌면 농암은 이러한 자세로 공부를 탐구한 것 아닐까?



농암은 스승 송시열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자의 뜻을 밝히고 전수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이단을 배격했지만, 농암에게 더 중요한 것은 주자의 뜻이었다. 송시열이 이단으로부터 주자학을 지키고자 주자적 해석만을 고수한 데 반하여, 농암은 주자의 뜻을 찾아 실현하는 데 더 의미를 두었다. 농암에게 주자의 본지는 학문에 힘써, 도덕적 심성을 체득하고 수련하는 것이었다. 공부란 다른 게 아니었다. 공부는 마음의 순선함을 깨달아 심신을 수련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농암은 이를 위해서 주자학의 본원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가장 주자다운 말과 의미에 접속하기! 그리고 그 이치를 깨달아 본성을 회복하기! 농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마음 공부와 실천의 문제였다. 


성명(性命)의 이(理)가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성현이 사람들에게 반드시 마음을 주로 삼게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만물보다 귀하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잡아 보존하고 구하여 잃지 않게 했을 따름이다. 또한 성명의 이를 다하려고 한다면, 먼저 이것을 안 뒤에 천하의 만사를 처리함으로써 가히 그 마땅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없이 어찌 이 마음을 체득함으로써 일을 다 마쳤다고 하겠는가? 석씨(釋氏, 석가모니)는 이 이치에 전혀 어두워 문득 그 사물은 버리고 이 마음만을 구하려 하니, 이는 오로지 이 마음을 사사로이 함이다. 그가 구하려는 것은 또한 장차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 <원도(原道)>(한유)에 말하기를 “옛날에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되게 한 것은 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하였다. 이제 마음을 다스리면서 천하와 국가를 도외시하고 그 하늘의 법도를 없애니, 자식은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아니하고, 신하는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백성은 자기 일을 자기 일로 여기지 않으니, 바로 이 뜻이다.(<내편>2, 《농암잡지》)


농암은 인간 마음에 ‘이’(만물의 법칙, 만물을 주재하는 근원)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보다 귀한 게 아니라고 한다. 실상 인간이 만물보다 나은 이유는 없다. 농암이 보기에 마음의 본성을 잡아 보존하고 구하여 잃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만물보다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농암은 단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의 이치를 체득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것이 일로써 드러나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일로, 가족의 일로, 국가의 일로, 천하의 일로 드러날 때 비로소 마음의 본성을 체득했음이 증명된다. 자기 자신에게 국한해서 이야기해보면, 적어도 자신의 습성과 기질을 바꿀 수 있어야만 천하 만사를 처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은 그저 추상 세계에 머물 뿐, 마음이 있는지조차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관념이나 추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마음의 이치를 체득할 뿐만 아니라 그 체득된 마음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자학의 실질이다. 이 때문에 농암의 주자학은 그저 훈고나 예법이나 형이상학으로 떨어지지 않고, 당대의 주자학적 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3. 주자학으로 주자학을 가로지르다!


송시열의 학맥을 전승했음에도 농암은 송시열과 다른 길을 열었다. 산림학자로 살다가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하며 여론을 선도했던 송시열과 정계에 나갔으나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으며 처사를 자처한 농암. 농암이 송시열의 학맥이면서도 스승과 다른 지식의 지형도를 그려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던 것 같다. 농암에게 주자학은 더 이상 정치적 이념, 이념의 제도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일상을 바꾸는 주자학! 위기지학의 기회가 왔을 때 농암은 송시열보다 더 유연하게 주자를 바라볼 수 있었고, 주자를 통해 교조적인 ‘주자주의’를 넘어설 수 있었다.


농암이 송시열과 다른 주자학을 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농암은 서울지역 서인의 학맥 속에서 자라고 배웠다. 장인인 이단상, 그리고 조성기의 문하에서 공부한 까닭에 송시열과는 다른 방향에서 주자의 언어와 사유에 밀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단상과 조성기는 소강절의 상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형이상학의 세계를 넘어 우주만물의 현상과 물리로 시야를 확장시켰던 장본인들이다. 이런 경향은 서울 지역의 지식인들에서 두드러졌다. 이 시기는 서울과 지방의 학문 경향이 점차 분기되는 중이었다. 남인도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으로 나뉘어 영남남인은 오직 퇴계, 조식이었고 근기 남인은 퇴계에 율곡 이이의 학문을 함께 포섭했다. 노론도 사정은 비슷했다. 근기지역의 노론과 호서지역의 노론으로 나뉘어, 호서지역은 이율곡의 학문만을 고수했고, 근기지역은 이율곡의 학문에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절충했다. 노론의 경향분기는 농암에게서부터 나뉘게 된다. 송시열의 직계 제자인 권상하의 호서학맥과 농암의 낙론학맥으로 나뉜 것이다. 호서학맥과 낙론학맥의 분기는 권상하의 제자들과 농암·삼연의 제자들 사이에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과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 인성과 물성은 같다)이라는 철학적 차이 때문에 일어났다. 


잠재태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현실화의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왜 농암이 낙론학맥의 종주가 된 것인가? 인물성동론, 성범일체론(聖凡一體論)의 싹이 농암에게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농암은 미발일 때 공부가 필요한가 아닌가, 미발일 때 성인과 범부는 하나인가 아닌가라는 새로운 문제 위에서 주자학을 고민했다. 농암은 주자가 언급한 바, “미발(未發)의 때에는 본디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미발의 때에는 요(堯) 임금, 순(舜) 임금으로부터 길 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매한가지이다”(<내편>2, 《농암잡지》)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미발의 때가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미발’은 사유와 행위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이자 마음이 현실화되기 이전의 잠재태를 일컫는다. 이때는 사실상 사람이든 동물이든, 성인이든 범부든 품부 받은 이(본체)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이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농암은 순선한 본체가 온전히 작동하는 미발의 때에는 선악이 섞여있지 않다고 본다. 우주만물의 본체인 이는 현실화되기 이전의 마음 상태에서는 온전하게 존재한다. 이 상태에서 마음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기는 이와 하나다. 기는 이의 완벽한 주재성 아래서 이의 실질로 드러날 뿐이다. 


발하기 전의 본체는 완전히 텅 비고 지극히 정하여 방종이란 말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혼미하다는 말도 쓸 수 없으니, 만일 발하기 전인데도 혼미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자사(子思)가 어떻게 ‘미발’을 ‘중(中)’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 주 선생(朱先生)이 ‘발하기 전에는 본체가 그대로 보존되어서 궁구하고 탐색할 필요가 없다. 이때에는 다만 경(敬)하여 그것을 보존함으로써 그 기상이 항상 보존되고 상실되지 않게만 하면 그로부터 발현되는 것이 반드시 절도에 맞을 것이다.’ 하셨던 것이네.(<홍석보(洪錫輔)에게 보냄>,임오년(1702), 《농암집》)


농암이 미발심체를 이라는 본체의 온전한 현재화 상태로 해석한 것은 “미발의 때에도 병통이 있을 수 있으니 힘써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서였다(<내편>2, 《농암잡지》). 주로 권상하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미발의 때에 병통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마음은 기로 구성된 물질이고, 기로 이루어진 마음은 미발의 때에도 이미 청하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여 선악이 편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체는 기라는 물질요소로 인해 위축되고 한정된다. 이는 기라는 물질이 없이는 절대 현재화될 수 없다. 이럴 경우 이는 기를 주재하는 원리가 아니라 기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질의 변화만이 이를 복권시킬 수 있다. 그러니 이미 미발의 때에서부터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본체를 회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본체가 누구에게나 온전하게 있다고 상정하면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성인과 범부는 미발 때부터 차이가 난다. 기의 청탁에 의해 본체가 협착되기 때문에 성인은 이가 온전히 현재화되지만 범부는 그렇지 않다. 권상하의 제자들은 율곡의 주기론에 입각하여 성인과 범부,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농암은 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퇴계의 주리론을 절충하여 이의 주재성에 힘을 실었다. 이가 그렇게 무위한 것이라면 어떻게 순선한 본체가 현실화될 수 있겠는가? 농암이 주기론에 의문을 품은 문제는 이것이었다. 농암이 주자의 언설로 확신컨대, 미발의 때에는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바로잡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미발심체는 원래, 누구나 그렇게 완벽한 상태로 이가 현재화되기 때문이다. 미발의 때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성인이나 범부나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발의 상태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유념할 것은 누구나에게 주어진 본체를 보존하는 일이다. 본체인 이가 기를 주재함으로, 사람은 본체를 보존하여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본체는 누구나에게 주어지므로 누구나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믿고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인간과 금수. 성인과 범부가 나뉘는 갈림길이다.


호랑이와 승냥이는 사람보다 인(仁)하고 의롭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잘 모르거나, 혹은 모른척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농암이 인간과 동물을 똑같이 본 것은 아니었다. “인간과 동물은 각각 하늘이 부여해 준 이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그러나 건순오상의 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부분적이기도 하고 온전하기도 한 차이가 생겨난다. 이를테면 개미는 군신(君臣) 관계를 유지하고 호랑이와 승냥이는 부자(父子) 관계를 유지하여 혹은 인(仁)하고 혹은 의롭지만, 이들은 오성 중에 하나를 부여받은 데에 불과하다. 다른 동물에 미루어 보아도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이 어찌 천명이 고르지 않아서이겠는가. 그 기(氣)가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기 때문에 부여받은 이치가 그에 따라 부분적이기도 하고 온전하기도 한 것이다.” 일단 미발의 상태에서 천명을 고르게 부여받지만, 동물은 사람보다 기가 막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인의예지신이라는 오성 중에 하나만 발현한다.


농암은 이렇듯 인물성동론의 길을 열어주었다. 농암의 후예들은 오상의 하나를 발현하는 금수 초목의 상태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개미는 의에 뛰어나고, 호랑이와 승냥이는 인에 뛰어나다. 동물이 인간보다 못한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러니 차별은 있을 수 없다. 농암의 후예들은 미발의 상태를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현실에서 작동하는 주자학의 위계성을 넘어섰다. 농암은 주자학에 도전하지도 않았고 주자학을 탈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자학의 정통에 다가서려 함으로써 주자학을 비껴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농암과 권상하의 주장 중 어느 것이 더 현실 개혁적인가, 더 진보적인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발심체를 주자가 말한 바대로 탐구하고자 했던 농암의 해석은 송시열의 주자학과 다른 주자학의 가능성을 포섭할 수 있었다. 농암은 사유와 행위의 주체로서 이의 주재성에 무게를 실어 성인과 범부, 인간과 동물의 같음을 말했고, 그 후예인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은 심성을 주체의 능동적 에너지로 전화시켜 사유와 학문과 윤리상의 견고한 경계와 한계선을 무너뜨리는 데 활용했다. 중요한 건, 이전과는 다르게 주자학을 사유하고 주조하는 움직임이었다. 농암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백수로 살면서 농암의 시선은 결코 정치적이거나 경세적이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심성 수양과 학문의 점진적 훈련이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가장 주자적인 방식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것은 농암 자신도 내다볼 수 없는 파장과 균열을 일으켰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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