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노론백수 1세대 김창협] 시험을 위한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과거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1. 군자의 길, 학문의 길!


조선시대 선비들은 누구나 벼슬에서 물러나고 나아가야 하는 ‘출처(出處)’의 때를 고민했다. 그러나 농암 김창협에겐 ‘출처’를 어느 때 해야 하는지는 문제되지 않았다. 아무리 때에 맞게 처신한다 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이 자칫 부귀에 미혹된 것일 수도 있고, 물러나 숨어사는 일이 단지 인륜을 저버리고 자연에 묻혀 사는 데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자는 사소한 청렴을 지키거나 시시콜콜 삼가는 것으로 지조를 지킬 일도 아니고, 사사로운 지혜나 천박한 술수로 일을 삼아서도 안 된다. 농암에게는 나아가든 물러가든 먼저 할 일이 있었으니, 바로 ‘군자의 길’이다. 군자의 길은 다름 아닌 ‘자기를 닦는 학문’! 곧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극대화한 뒤 뜻을 참되게 하여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과 그리하여 마침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이다. 이치는 음양(陰陽)과 성명(性命), 덕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 인륜은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장유(長幼)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 교양은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 사람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를 추구하는 이것이 군자가 일삼는 것들이다.


─「은구암기(隱求菴記)」, 『농암집』, 1680년


「은구암기」는 농암 나이 30살에 쓴 글이다. 벼슬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에도 농암은 군자가 되는 길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선비는 출처 자체를 일삼아 고민할 게 아니다. 선비는 농부가 수확을 하듯이 뜻을 추구하여 묵묵히 도를 탐구하고, 배양하고, 체득할 뿐이다. 농암이 제시한 군자의 길은 유가를 자처하는 선비들에게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은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실행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보통 선비들은 군자의 길을 원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입신양명을 우선으로 한다. 농암은 이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 본다.


그래서 농암은 묻는다. “만일 홀로 은거할 때에 탐구하지 않고, 한가로이 일이 없을 때에 배양하여 체득하지 않다가 갑자기 종묘와 조정에 서서 천하를 구제하려 한다면, 장차 무슨 도를 행하겠는가?” 더구나 “세상에 쓰여 천하와 국가에 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쓰이지 않으면 선비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공자가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 죽게 될지라도, 몸이 늙는 것도 잊고 햇수가 부족한 것도 아랑곳없이 부지런히 날마다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농암은 그렇게 살리라 다짐했다.


농암은 30살 때의 결심을 지켰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관직을 버리고 시골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할 때 공부에 더욱 전심했으며, 제자들과 더불어 강학하며 나날을 보냈다. 관직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왕성하게 경전을 해석 체득하고, 친구와 후학들과 더불어 철학적 논쟁을 불태웠으며, 쉬지 않고 글을 썼다. 또한 “지난날 그저 입으로 외고 귀로 듣는 겉치레에 불과한 학문에서 참으로 중요한 마음에 대해서 진실하게 공부하고자” 했다.(「권치도에게 보냄」,  『농암집』, 1702년) 그리고 강에서 낚시질하며 소요하고, 오이, 목화, 벼농사를 지으며 생활을 경영했다. 농암은 물러났을 때 오히려 더욱 치열하고 즐겁게 살았다.




2. 과거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농암이 백수 선비가 되자, ‘과거 공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기만을 위한 공부를 하면서 ‘과거 공부’가 얼마나 소모적이고 쓸모없는 공부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농암이 석실서원과 영평에서 가르칠 때 강학했던 제자들은 대부분 과거 시험을 대비하는 공부를 하려고 했다. 농암은 송시열의 직계 제자로 충북 제천에서 강학을 하던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사실을 불평했다. 자신을 배양하고 도를 닦는 공부에 뜻을 둔 제자들은 10명에 1명을 보기가 어려운 지경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과거시험용 공부를 떨치지 못했으니 농암이 얼마나 가르치는 맛이 안 났겠는가? 그러나 농암은 실망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가르쳤다. 과거용 문장이 아니라 의리에 관한 글을 밤낮으로 강론함으로써 기운을 얻었다.(「권치도에게 답함」, 『농암집』, 1697년)


제자 어유봉이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농암은 과거 시험에 전력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농암은 제자에게 과거에 합격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문을 하고난 여력으로 과거 공부를 겸하는 건 괜찮지만, 과거 공부가 학문에 방해가 되고 뜻을 빼앗으면 자신에게 누가 되므로 차라리 과거 공부를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보았다. 학문하는 사람은 성현의 원대한 사업을 가슴속에 간직하여 앉으나 서나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범상한 일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서 급제하고 낙방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기를 바랐다.(「어유봉에게 보냄」, 『농암집』, 1695년)


농암은 과거 공부는 학문의 본령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험용 문장을 외워 모범 답안을 작성하거나 지식을 답습하는 공부를 거부했다. 농암에게 공부란 열악하고 시끄러운 환경에서 단련되는, 아주 절실한 체득이자 수행이었다. 그러니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어유봉이 안타깝고 못마땅할 밖에 없었으리라. 오죽하면 알성문과를 준비하는 제자 어유봉에게 편지로 과거용 문장인 4자/6자 한구가 대구를 이루는 변려체를 익히느라 얼마나 즐겁지 않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는 안부를 건넨다. 안타까움인지 꾸중인지 은근히 놀리는 것도 같다. 


그래도 제자들은 과거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입신양명을 중시했고, 과거공부가 진정 학문의 본령이요 선비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공부는 시험과 출세를 위해서 하는 것! 농암의 문하에서 『대학』을 공부했던 서문약이라는 제자는 독서만 하고 싶은데, 형제와 벗들이 비웃고 만류한다고 스승님께 호소했다. 그러자 농암은 과거 공부를 그만둘 수 없다면, 성현의 책으로 과거 공부를 하라고 권한다.


과거 공부가 비록 나름대로의 체재와 법식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세(筆勢)가 활기차고 문장의 조리가 분명한 뒤에야 좋은 문장이 되어 반드시 급제하게 되는 것이니, 성현의 글을 읽지 않고 이런 수준에 이르는 경우는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것을 오활하여 절실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남의 글을 훔쳐 표절하는 능력과 아름답게 수식하여 글을 엮는 솜씨를 익히는 데에 급급하여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 공부의 첩경은 여기에 있다고 여기는데, 안목이 있는 사람이 보면 경박하고 좀스러우며 조악하고 졸렬하여 거의 문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우연히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눈을 감고 활을 쏘아 우연히 정곡(正鵠)을 맞춘 것과 같을 뿐이니, 어찌 솜씨가 좋아서이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하여 조정에 나가서 임금께 간하고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 있게 된다면, 어리둥절하여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도 결단하지 못한 채 목각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일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종신토록 부끄러움만 안고 살게 될 것이니, 무슨 영화가 있겠는가.


이제 그대가 진실로 이것을 거울삼아 우선 이전에 익히던 것을 제쳐 두고 성현의 글을 공부하여 마음과 눈을 밝게 틔우고 근본을 배양한 뒤에 그 여력을 가지고 문장을 익힌다면, 앞으로 반드시 성대하여 크게 볼 만하게 될 것이니, 그 어떤 과거 공부가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있겠는가. 저들이 만류하고 비난하며 비웃는 것은 이런 사정을 몰라서일 뿐이니, 만일 이를 깨닫게 되면 그들도 지금 하는 것을 버리고 당장 그대를 따를 것이다. 그러니 저들을 걱정할 것이 또 무어 있겠는가.


─「서생 문약(徐生文若)에게 준 서」, 『농암집』, 1969년 경 



농암의 충고대로 경전을 공부한다면 정말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합격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며, 합격한다 해도 시간이 오래 걸렸을지 모른다. 시험에 연연하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과거에 대한 뜻을 접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농암 스승이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일까? 실제로 사서삼경의 구두를 떼지도 못하고 글자도 잘못 읽는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고 하니, 농암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지만 시류대로 사는 선비들이 좇기는 어려운 지침이었다. 


농암이 비판한 바, 과거 시험용 문장은 표절이자 알맹이 없는 수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시험용 공부는 문장력을 익히는 데도 심신을 연마하는 데도, 즉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짜 공부다. 이렇게 공부해서 요행히 합격한다 치더라도,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목각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자리만 지키는 일일 터. 농암에게 과거 시험은 자기 판단력이나 의견이라고는 가질 수 없는 모방품들을 양산하는 제도일 뿐이다. 농암은 시험이라는 제도를 근본적으로 꼬집는다. 피폐한 영혼들의 경쟁에서 인재를 뽑을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망상이 아닐지.  


껍데기로 살기보다, 학문하는 선비로 살 것을 이야기했던 농암 김창협!


과거 공부가 학문하는 여가의 일이 되면, 벼슬하는 일도 학문하는 여력에 하는 일이 된다. 농암은 공부를 갈고 닦지 않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벼슬했다고 공부를 그만두는 일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 부임해 가는 사경(士敬)을 전송한 서」, 『농암집』, 1701년) 성인의 학문에 전념하여 성현의 삶을 실천하다 발탁되면 천하와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발탁되지 않으면 그 뿐 굳이 발탁되고자 과거에 잠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농암은 곤궁한 선비들을 위해 덧붙인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관직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았다면 조정의 관직을 받아서는 안 되고, 다만 부모와 처자식을 봉양하기 위해 선비에게 내리는 ‘몇 되, 몇 말 정도의 녹봉’은 받을 수 있다. 즉 잡직으로 받는 급료 같은 것이라면 혹 구해도 되는 이치가 있다. 다만 이것도 애써 계획하여 꼭 얻겠다는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


담헌 홍대용이나 연암 박지원의 장인 이보천, 처숙 이양천, 그리고 연암이 어찌하여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았는지, 연암이 중년에 조정의 관직을 받지 않고 여유로운 한직으로 떠돌고자 했는지 이즈음에 이르러 설명이 된다. 노론의 멘토, 농암 선생의 말씀을 따랐던 것이다. 농암은 노론의 지식인들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하는 선비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3. 주자만큼 공부하라!


농암에게 학문은 심지를 단단히 지키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다. 농암에게 이것은 그저 원론이 아니라 매우 절실한 실천의 문제였다. 농암이 판단하기에도 이 공부법을 보여준 학자는 공자 이래 오직 주자뿐이었다. 학문의 극치와 의리의 정밀함과 가르침의 분명함으로 말하면 주자보다 앞서는 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암은 유가 경전을 통해 성정을 함양하는 공부를 할 때도 오로지 주자의 해석에 의거하여, 주자의 해석을 벗어나 원시 고경으로 돌아가는 경향에 반대했다. 육상산이나 왕양명처럼 마음을 행위와 지성과 윤리의 주체로 보아 마음 찾기에만 몰두하는 방식에도 반대한다. 농암이 보기에 마음은 너무 주관이어서 그 기준이 정해지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 본성을 깨달아 실천하는 게 아니라 허무적멸의 상태에서 헤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농암은 주자가 제안한 독서와 궁리(窮理)의 단계적이고 객관적 공부법이 아니고는 보통 사람들이 본성을 깨달아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유자들은 늘 “주자(朱子) 이후로 의리가 크게 밝아져서 배우는 자들이 절반의 공력만 들여도 두 배의 효과를 볼 수 있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 말이 그럴싸하기는 하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주자가 경(經)을 면밀히 검토하여 저술한 설은 명백하고 적확하여 백대 뒤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주자대전(朱子大全)』의 문답에는 학문 공부의 순서를 밝혀 놓았고 도리의 정조(精粗), 본말(本末)이 또 모두 상세하고 널리 두루 다 실려 있어 더 이상 남은 뜻이 없으니, 배우는 자들은 주자의 글에 의지하여 익숙히 외고 근본을 살펴 힘써 행함으로써 유자의 길을 잃지 않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裏面)의 정밀한 뜻과 수많은 곡절은 주자가 당시에 했던 만큼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깊은 경지에 나아가 자득할 수가 있겠는가. 주자가 일찍이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해 논하면서 “내가 했던 만큼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 뜻을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 이러한 뜻을 모르고 그저 완성된 말을 근거로 보며 10분의 2, 3의 공부만 하면서 주자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면 어찌 실제와 거리가 먼 말이 아니겠는가.


─『농암잡지』, 「내편 2」


이렇게 보면 농암은 주자주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농암은 주자를 교조화하지 않는다. 농암은 주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자처럼 공부하지 않으면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완성된 말을 근거로 하는 게 아니라, 주자가 공부한 만큼 공부해서 자득하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농암은 주자의 말에 의거하되, 주자 말의 실질을 탐구하는 데로 방향을 전환했다. 주자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주자주의와 다르게, 여러 주석가들의 주소와 주자 주석의 차이를 따지면서 주자의 원의를 좇아갔다. 너무나 치열하게 그 원의의 실질을 해석하고 그 원의가 오해되고 있는 지점을 짚어내었다. 농암은 견강부회하거나 천착하지 않고 주자의 말의 실질에 근접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래서 농암의 글들은 실상 어렵게 느껴진다. 읽기에 많은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러 주석가들의 책과 경전 공부가 뒤따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덕분에 농암의 글을 읽고 나면 어떤 책도 쉽게 읽힌다.^^ 훈고에 가까운 방식이지만 자구에만 매달리지 않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 의미들이 어떻게 다르게 쓰이게 되었는지에 역점을 둔다. 주자 언어의 생기를 찾는 것! 주자를 추숭하되 주자의 시대, 주자의 말 그대로를 탐구하여 그 개념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 이 점이 농암의 주자학 이해였다.


주자 언어의 생기를 천착하는 방식은 오히려 주자학 해석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인성과 물성은 똑같다’는 인물성동론의 이론이 그것이다. 기원에 접근함으로써 현재의 주자 해석을 해체하게 되는 이런 방식도, 대항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농암은 보여준다.  


어떤 사상이 대외에 응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텐데 조선의 17~8세기 성리학도 이런 응전에 부딪혀 자기 나름의 모색을 거쳤던 것 같다. 16세기 성리학의 생기와 실천이 17세기에 지속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 길을 암중모색하는데 ‘주자학’을 고수하느라 주자보다 더 경직된 주자주의가 되는 경향, 주자의 시대와 그 의도의 실제에 접근하려는 경향, 주자학이 아니라 원시유학으로 돌아가는 경향, 주자학에서 다른 사상으로 탈주하는 경향, 관념이나 형이상학보다는 현실을 개혁하는 경세학으로 경도되는 경향. 농암은 주자학의 생기를 천착함으로써 주자주의라는 독트린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 주자학을 고수하기 때문에 고루한 게 아니다. 농암은 역설적이게도 주자학을 철두철미 연구하고 지킴으로써 주자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을 열었다. 


탈주자주의(脫朱子主義)가 아니라 원주자주의(原朱子主義)였던 농암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요, 문장가일 수 있었던 진면목은 다음 시간에~~ I will be come back!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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