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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18c 조선지식인 생태학

등용하려는 숙종, 거절하는 김창협 -노론 백수 1세대를 만나다

by 북드라망 2014. 4. 1.

노론 백수 1세대!
18세기 노론 지성의 메카, 농암 김창협


1. 사직소 올리는 사나이!


농암 김창협의 문집(『농암집』)을 열어보면 유독 눈이 가는 글이 있다. 이름하여 사직소(辭職疏)! 즉 관직을 사양하기 위해 임금께 올리는 글이다. 무려 총 45편의 사직소가 ‘소차(疏箚: 상소문)’ 항목에 실려 있다.


등용하려는 군주와 이를 사양하는 신하. 김창협은 장장 13년 동안 숙종에게 사직소를 올렸다.



이 사직소들은 농암의 나이 44살인 1694년(숙종 20년)부터 56살인 1706년(숙종 32년)까지 장장 13년 동안 올린 상소문으로, 자신의 관직임명을 거둬달라는 상소문이 38편, 형 김창집을 대신하여 올린 상소문이 7편이다. 13년 동안 거의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숙종은 관직을 제수했고, 농암은 이때마다 거절하는 상소문을 바쳤다. 농암이 1708년, 그의 나이 58살에 죽었으니 죽기 전까지 계속 관직을 임명받은 셈이다.


관직도 다채롭다. 호조참의, 좌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개성부유수, 형조참판, 이조참판, 동지경연사, 부제학, 대사헌, 호조참판, 이조참판, 동지돈녕부사, 좌윤, 이조참판, 대제학, 형조판서, 대제학. 어떤 경우는 네 차례에 걸쳐 사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관직을 내리고, 사직소를 쓰는 일이 왕과 신하의 취미도 아니고, 이쯤하면 숙종도 농암도 참으로 집요하다고 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농암의 그 꺾이지 않는 결기가 놀랍기까지 하다.


농암이 사직소를 올린 행위는 산림처사들이 관직을 제수하면 으레 한 번쯤 사양하는 관례적인 절차, 혹은 형식적인 과정과는 달랐다. 보통 산림처사들은 관직을 덜컥 받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관직에 나아간다는 뜻을 천명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리고 나서야 수락하는 수순을 밟았다. 왕조실록에 왕 이상으로 출현 횟수가 많은 인물이 송시열이라는데, 그 중에 많은 부분이 사직소와 관련된 이야기다. 왕의 부름을 받았던 송시열은 진정 관직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사직소를 올렸고, 산림처사라는 위상에 걸맞기 위해서도 사직소를 올렸다. 송시열의 사직소는 그 자체가 정치 행위로 정국을 쥐락펴락했다. 『효종실록』과 『숙종실록』에는 거의 열흘에 한 번 꼴로 송시열의 사직소가 오르내렸다. 그러나 농암은 달랐다. 언제나 한결 같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서 처사로서 살아가겠노라고 왕에게 전했다. 자리의 유혹에 넘어감직도 하건만, 꿋꿋하게 청요직(淸要職)에 오르는 길을 거부했다.



2. 기사환국과 아버지의 죽음


물론 농암 김창협은 젊어서 관직에 나아갈 뜻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산림처사를 꿈꿔본 적도 없었다.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왕을 보좌하는 직책을 맡는 것이 농암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40여 년 동안을 중앙 정계에서 몸담았던 서인의 영수요, 영의정까지 오른 김수항(1629~1689)이 아버지였으니,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서울 지역에서 권세를 떨치던 경화사족으로 그에 걸맞은 삶이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효종과 현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당색은 서인.

농암의 집안으로 말하자면 문벌 중의 문벌인 안동 김문이다. 증조부는 병조호란 직후의 살벌한 시기에 반청인사로 활약했던 청음 김상헌(1570년(선조 3년)~1652년(효종3년))이다. 김상헌은 주전파로 척화를 주장하다 1640년 71살의 노구로 심양에 끌려가 6년간 억류되었다가 1645년 76살에 귀환했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 또한 열혈 지사로 1637년 강도(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남문루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농암의 아버지 김수항은 어떠한가? 산림의 맹주이자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1607~1684)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며 서인의 이념을 결집시켜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송시열은 서인의 적통으로서 김상헌과 산당을 결성했다. 그는 이이의 수제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스승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에게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런 연유로 농암과 그 형제들은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평생 동안 학문적,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었다.


문벌과 학맥 어느 하나 빠질 게 없는데다가 농암 스스로도 일찍부터 학문과 재능으로 명망이 드높았으니, 승승장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농암은 32세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부교리, 대사성, 대사간이라는 직위에 올라 숙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교목세신(喬木世臣)으로 맡은 바 직분에 충실했다. 말하자면 농암은 여러 대에 걸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함께할 수 있는 신하 그 자체였다.


그랬던 농암의 삶은 중년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진다. 그 원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 그 유명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로 인해 빚어진 사건이다.  


기사환국이 있기 몇 년 전부터 이미 농암 집안엔 파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686년 숙종은 나인 장씨를 총애하여 숙원으로 책봉하고 장씨가 머물 별궁을 지으면서 남몰래 공사를 진행했다. 김창협은 미색에 빠져 백성도 모르게 토목공사를 일으킨 왕을 나무라며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직언을 했고, 이 일로 숙종은 농암 집안에 대해 유감을 가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숙종은 장씨 집안과 가까웠던 조사석을 내심 정승으로 밀었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아버지 김수항은 왕과 의견이 달라 조사석을 밀지 않았다. 이 일로 위기를 직감한 김수항은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고 결국 영의정에서 영돈녕부사로 체직된다. 물론 김수항의 체직은 표면상 정승 임용으로 빚어진 가벼운 갈등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들 김창협의 상소로 심기가 불편했던 숙종의 화풀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농암 집안에 핵폭풍을 몰고 온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숙종의 나이 30살, 1688년에 장씨가 아들 균(경종)을 낳았다. 숙종은 너무 기쁜 나머지 후궁 소생이지만 원자로서의 명호를 정해주려 했다, 이에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서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송시열의 상소문을 기화로 거의 1년여에 걸쳐 전, 현직 관료와 재야 유림을 막론하고 100여명 이상의 서인이 처벌되었다. 이 사건이 1689년의 기사환국이다. 83살의 송시열은 위리안치라는 처벌을 받고 제주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 뒤 숙종은 투기죄를 씌워 민비를 폐출하라 명했고, 남인과 서인이 모두 반대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박태보가 간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송시열은 식음을 전폐했고, 정읍에 이르러 사사의 명을 받들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농암 36살에 아버지 김수항은 진도에 유배된 뒤 사사되고 작은아버지 김수흥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큰아버지 김수증은 화천 곡운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에게 '원자'의 명을 주려하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했고, 이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많은 서인들이 처벌당했다. 기사년(己巳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주도권은 남인으로 넘어가게 된다.



농암은 아버지가 사사된 이유가 형과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임금의 은총과 세상의 명망에 취해 자제할 줄 몰라 화를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인끈을 매고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기로 다짐했다. 왕에게 올린 간언이 집안에 재앙을 불러왔다고 여긴 농암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마음 아파하며, 경기도 영평(현재 포천)의 시골에 물러나 살았다.


선친께서 조정에서 40년 동안 벼슬하며 임금을 섬기고, 몸가짐을 갖는 방도와 우국 봉공(憂國奉公)하는 충절은 모두 처음과 끝이 있어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심(小心)하고 근신(謹愼)하여 권위(權位)로써 자처하지 않았고 겸공(謙恭)하고 외약(畏約)하여 시종이 한결같게 하였으니, 그 귀신의 시기함과 인도의 재화에 있어서 결코 스스로 그것을 초래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신의 형제가 한 가지 품행과 재능도 없으면서 서로 이어서 조정에 벼슬하여 갑자기 하대부(下大夫)의 반열에 올라서 임금의 은총이 대단하여 세상의 지목하는 바 되었는데, 신 등이 부승(負乘)의 경계와 지족(止足)의 훈계를 생각하지 않은 채 앞뒤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전진하여 지극히 왕성한 기세를 타고 자제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가득찬 재앙으로 하여금 유독 선친에게만 미치게 하고 신은 요행으로 면하였으니, 신은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부끄럽고 원통하여 피땀과 눈물이 함께 흘러내립니다. 영원히 농사꾼이 되어 이 세상을 마치고, 다시는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만일 갓끈을 치렁거리고 인끈을 매고서 당세에 분주하게 돌아다닌다면 이는 장차 어질고 효성스러운 군자(君子)에게 거듭 죄를 얻게 될 것이며, 지하(地下)에서 신의 아비를 뵈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창협/김창집, 「아버지 김수항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 『숙종실록』, 1694년 5월 5일



3. 아버지의 유언, 현요직에 오르지 마라


기사환국이 일어난 지 5년 뒤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이 노론 측의 김춘택과 소론 측의 한중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남인의 득세를 못마땅해 하던 숙종은 이들의 힘을 빌어 남인을 축출했고, 그 결과 소론*이 정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것이 1694년의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처벌당한 서인들이 신원되면서 아버지 김수항의 복작(復爵)도 이루어진다. 숙종은 서인들의 신원에 그치지 않고 명망이 높았던 김창협과 이여를 불러들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농암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다.


신의 망부(亡父)가 임종 시에 유훈(遺訓) 한 장을 손수 써서 신의 형제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는 평소 재주와 덕이 없이 한갓 선대의 음덕에만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아서 분수에 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재앙을 자초하였다. 오늘의 일은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칠 줄 모르다가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내 자손들은 나를 본보기로 삼아 항상 겸손한 뜻을 품어 집에서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벼슬할 때에는 현요직(顯要職)을 피함으로써 몸을 편안히 하고 집안을 보존하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의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 유훈을 받아 고이 간직하여 감히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의 아비의 속마음은 ‘가득 찬 복은 천도(天道)가 덜어 내기 마련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책임이 중하면 거기에 맞추기 어려워 허물이 생기고, 명망이 높으면 거기에 부응하기 어려워 비방이 돌아온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는 예로부터 누구나 우려해 온 것으로서 자신은 불행히 이미 이러한 허물에 걸려들었지만 후손들은 더 이상 위험한 처지에 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에 대해 간곡히 경계했던 것이니,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고 그 뜻이 매우 슬픕니다. 이는 후손들이 심장과 뼛속에 아로새겨 영원히 준수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신의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김창협, 「부제학을 사직하는 세 번째 소」, 『농암집』, 1694년


농암의 아버지 김수항이 죽으면서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은 “현요직을 피하여 몸을 편안히 하고 집안을 보존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김수항의 유언은 예상 밖이다. 우리가 기대한 바와 다르게 대부의 반열에 올라 가문의 영화를 회복하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몸이 편한 길을 가라고 당부했을 뿐,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농암 또한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아서 새길 따름이었다. “가득찬 복은 천도가 덜어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며, 중한 책임은 허물을 만들고, 높은 명망은 비방을 불러온다.”  아버지의 마음은 필시 노자의 잠언과 다르지 않았을 터, 농암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었다.


농암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기사환국이 일어난 후부터 죽을 때까지 경기도 영평의 시골에 은거했고, 이후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에서 아우 삼연 김창흡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기르다 그 근처 삼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로 관직 길에 오르지 않고 시골에 은거함으로써 아버지의 유계를 지켰다. 김수항은 아들 6명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 6명이 모두 학식과 문재로 당대를 주름잡았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1662~1713),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 1666~1683). 이 중에서도 농암과 의기투합했던 아우 삼연은 21살에 과거를 단념하고 평생 처사로 살았다. 학문의 경향도 자유로웠으며, 자유자재로 팔도를 주유했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노장과 불교에 심취했고, 죽는 순간에도 삼교를 회통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다. 형제가 모두 관직에 오르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재능을 아끼는 사람들의 의리에 미안한 일이라 여겨 큰 형 김창집만은 예외로 했다. 김창집은 청현직에 오르는 일은 되도록 삼갔지만 왕이 부르면 벼슬길에 올랐다. 역시 아버지 김수항은 앞을 내다보았던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면서 신임사화(1721~1722, 신축과 임인년에 일어난 사화)가 야기된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는데, 이에 반대한 소론은 목호룡을 내세워 고변을 하게 된다. 고변인 즉 노론이 세자시절의 경종을 독살하려했다는 것이다. 이 고변의 결과 노론 사대신 즉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는 참살되는 변을 면할 수 없었다.


오른쪽이 숙종, 왼쪽이 숙빈 최씨. 가운데 아이가 훗날 영조가 된다. 노론은 경종보다는 연잉군을 지지했다. 기사환국때 장희빈을 지지하는 남인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김창협과 김창흡은 갑신환국으로 서인이 복권되었을 때도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소론 남구만에게 신원을 분명치 않게 하고, 암암리에 장희빈 세력을 등에 업고 노론을 재앙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거침없이 비판한 바 있다. 1708년 농암은 죽었고, 삼연은 형 김창집이 사사되기 전인 1722년 2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영의정’이라는 현요직에 올랐던 김창집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몸을 지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4. 백수 선비의 자유와 평안


중년의 농암은 관리가 아닌 백수 선비로서 삶을 만끽했다. 「동음대」라는 작품을 통해 농암은 백수 선비에게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염려와 조소를 가볍게 물리친다.


영가자(永嘉子)가 동음(洞陰)의 산에 거처를 정한 뒤에 그의 집에 들러 위로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그대는 참 괴롭겠네. 그대는 어려서 대대로 벼슬해 온 도성 안의 집안에서 자랐으니, 비록 그대 자신이 벼슬길에 올라 관복을 입는 영광을 누려 보진 못했어도 실로 고량진미를 배불리 먹고 비단옷을 껴입으며, 거처는 안락한 즐거움이 있고 출입할 때에는 유유자적 한가로운 즐거움이 있어 점차 부귀에 무젖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네. 그런데 지금은 하루아침에 초가집에서 명아주 잎이나 콩잎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으며 가난하게 지내면서 처자는 초췌하고 종은 굶주린 기색이 있으니, 매우 고달프겠네. 게다가 이곳은 깊은 산속이라 인적은 없고 호랑이와 표범이 울부짖고 곰들이 오가는 곳인데 그대가 이곳에 거처하다니, 나는 내심 그대가 걱정스럽네. 아무리 그대라 해도 이러한 생활 속에서 어찌 원망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내 장차 그대가 이곳에 오래도록 안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네.” 


지나가는 객은 인적 없는 산속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영가자를 비웃는다. 객은 영가자가 굶주려 고달프고, 맹수의 출몰이 걱정되어 오래도록 안주하지는 못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리고 묻는다. 원망하고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농암의 대변자 영가자는 담담하게 반박한다.
 

제가 비록 고깃국 먹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긴 하였으나 본성이 담박하여 일찍이 한 번도 부귀한 모양을 익히거나 권세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자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미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길에 나갈 생각이 사라지고 세상일을 사절한 채 스스로 깊은 산속 험한 바위 속에 숨어 살고 있으니, 가난하여 굶주리는 일과 세속적인 즐거움이 없이 지내는 것은 바로 스스로 구한 것입니다. 스스로 구하고 나서 또 따라서 원망하고 후회한다면, 이 어찌 목욕하는 자가 물기를 싫어하고 불 쬐는 자가 열기를 싫어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우둔하다고는 하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려서부터 한가로이 지내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 소요부(邵堯夫)가 백원(百源)에서 정좌(靜坐)했던 일을 사모하여 배우고 싶어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와서는 실로 학문의 뜻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부지런히 연마할 수 있을 만큼 지대가 깊고 맑은 것을 좋아하여, 이미 조그만 집을 짓고 육예(六藝)의 서적을 가득 쌓아 두고서 밤낮으로 읊으며 성인의 유지(遺旨)를 구하고, 여가에는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으며 성정을 노래하고, 그마저 싫증이 나면 또 높은 곳에 올라 깊은 계곡을 굽어보며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과 변화무쌍한 구름과 오고가는 물고기나 새와 짐승을 구경하면서 마음에 맞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 또한 즐거워서 죽음조차도 잊기에 충분한데, 어찌 편안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로 인한 두려움이 혹 있기는 하나 세상에는 이보다 더 두려운 것들이 많으니, 이것들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김창협, 「동음대(洞陰對)」, 『농암집』


농암은 관직에 대한 미련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산 속의 맹수보다 세상에 더 두려운 것이 많단다. 부귀영화가 화를 부려온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농암은 그 빈번한 숙종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매우 자발적으로, 아주 능동적으로 정치에의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그리고는 권세와 이익이라는 목적을 벗어나 자유롭게 공부를 즐기고 성인의 삶을 실천했으며, 변화무쌍한 자연의 흐름과 하나되어 죽음조차 잊었다. 관직을 버리자 새로운 세계가 찾아오고, 새로운 즐거움으로 매일매일이 충만하다. 그 때문에 좌절감이나 소외감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쓸데없는 한탄이 농암의 이 충만한 생활 속엔 끼어들 틈이 없다. 농암은 그렇게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향해 걸어갔다. 




노론의 후예들이 농암과 삼연을 뒤따랐다. 연암 박지원의 장인 이보천과 처숙부 이양천, 김창집의 손자 김원행과 김용행, 김윤겸, 그리고 홍대용, 박지원 등은 농암과 삼연의 뒤를 이어 처사로서 살아갔다. 어떤 결핍감도 느끼지 않은 채 벼슬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개척했다. 이것만으로도 18세기 노론 지성의 메카는 농암 김창협임에 틀림없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서인은 기사환국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다. 숙종 6년(1680년) 경신환국 즉 남인계의 영의정인 허적의 손자 허새가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으로 남인들이 축출된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송시열의 논적었던 남인의 윤휴가 사사된다. 김수항은 이 환국으로 영의정에 오를 수 있었다. 실상 허새의 역모는 김장생의 손자 김익훈이 무고한 혐의가 짙었다. 남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젊은 서인들도 분개했다. 김수항은 대신으로 김익훈을 옹호하면서 젊은 서인들과 대립했다. 숙종은 이 사건의 처리를 송시열에게 맡겼다. 젊은 서인들은 송시열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단호하게 조치하기를 건의했으나 송시열은 김익훈의 무고는 그 공로에 비하면 작은 흠집이라고 옹호하며 이 사건을 무마시켰다. 
  
송시열에 대한 젊은 서인들의 불만은 윤증과의 갈등에 의해 폭발하고 만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과도 친하고 윤휴와도 돈독했다. 송시열은 윤휴와 대결하는 입장에서 윤선거가 계속해서 윤휴와 교류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선거가 죽고 윤휴가 문상을 오면서 송시열은 단단히 틀어지고 만다. 그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칭찬도 없이 행적만 간단하게 정리한데다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아내의 자살을 방치한 채 도망 나온 사실까지 포함시켰다. 윤선거는 아내와 함께 자결하려 했으나, 자신은 자결하지 못하고 홀로 강화도를 벗어났다. 윤증은 묘갈명의 수정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거절했다. 윤증은 농암의 외삼촌인 나양좌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친이 강화도에서 도망나온 것은 서울에 계신 할아버지 때문이었고, 김상용과 권순창, 김익겸이  강화도에서 굳이 죽어야할 의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이와 같은 현인도 한때 입산하여 중이 되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고 거론하며 아버지 윤선거의 잘못을 한때 실수로 무마하려 했다. 외삼촌 나양좌가 윤증을 옹호하는 바람에 농암은 외삼촌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편지까지 보낸다. 이 논쟁으로 윤증의 문인과 송시열의 문인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회덕에 살았던 늙은 송시열과 니성에 살았던 젊은 윤증의 논쟁이라 하여 ‘회니시비’라 하는데, 이 시비로 서인은 결국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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