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18c 조선지식인 생태학

[노론백수 1세대 김창협] 앵무새같은 글쓰기는 이제 그만!

by 북드라망 2014. 5. 13.

문장에 ‘생기’(生氣)를 불어넣기! 



글쓰기, 어떻게 쓸 것인가?


농암 김창협에게는 ‘독서와 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생업이었다. 백수 선비로서 자신을 살리고,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독서와 글쓰기’ 외에 다른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농사나 장사를 해서 생업에 종사한다면 모를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식인으로 살려면 책을 읽고 글 쓰는 일 말고 그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농암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는 조선시대 지식인 선비로서 유난스럽게 대서특필할 사안은 아니다. 농암 말고도 뜻을 품은 선비라면 대부분 독서와 글쓰기를 전업으로 삼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농암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해 특별히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농암이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농암이 문제 삼은 분야는 글쓰기 자체였다. 참으로 신기한 점은 농암 김창협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정치적이거나 행정적인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암은 남인이었던 반계 유형원이나 성호 이익처럼 제도를 개선하거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그 대책을 연구하거나 제안한 적이 없었다. 유형원이나, 성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명백했다. 현실을 개혁하기 위함이고, 민생의 안정을 위함이었다. 물론 조선의 주자학자인 농암이 공부하는 이유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선비의 공부가 천하와 국가를 위해 쓰일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지 물었던 농암이 아니던가? 그런데 농암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선비로서 남인들과 다르게 처신했다. 가르치고 글을 쓰는 일상은 같았지만, 그 초점이 달랐다. 농암의 시선은 오직 ‘언어와 문장’을 향해 고정되었다는 점이다.


농암은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관심보다 선비들 스스로 마음을 닦고, 말하고, 쓰는 방식을 중시했다. 그는 경전 해석자로, 문장 비평가로서의 실천에 집중했다. 농암은 당대의 언어와 글쓰기를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지식인의 역할에 제동을 가했다. 무엇을 써야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할지로 시선이 전환되었다. 이제 글쓰기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가의 도를 담든, 정서를 담든 핵심은 문장의 스타일 즉 문체였다. 농암은 문체를 18세기 지성사의 중요한 담론으로 부각시킨 장본인이다.         


이러한 농암의 경향성은 『농암잡지』에 집적되어 있다. 『농암잡지』의 글 중에는 농암 나이 20~30대에 쓰인 것도 몇 편 있지만, 농암으로 퇴거한 40-50대 시절의 기록물이 주를 이룬다.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에서 ‘잡지’(雜誌)라 일컬었다. 특정한 문장 양식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수록된 글들은 경전이나 시문에 관한 메모 수준의 ‘단상’이나 짤막한 ‘비평’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짤막한 글들은 농암의 성향을 보여주는데 손색이 없다. 농암이 이 텍스트에서 주목한 바,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살펴보자. 


조선 후기에 책가도(冊架圖)라는 형식의 병풍이 많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책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실상에 맞는 글쓰기! 


농암은 주자학을 해석할 때도 원래의 의미를 따지는 데 관심을 보였듯이, 실상에 맞지 않게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언어의 오용, 의미의 오류를 배격한다. 사상의 확장이나 변전을 가져오는 사유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실질에 맞는 언어를 쓸 것인가에 주목했다. 농암은 그 말이 나온 정황 혹은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지금의 실상에 적확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묻고 따졌다. 실상, 실질은 늘 지금-여기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그 말은 과거의 특정한 맥락 안에서 사용된 것이므로, 현재 그 말을 사용하려면 맥락에 제대로 맞게 쓰고 있는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농암은 문맥을 살피지도 않고 앵무새처럼 앞선 시대의 언어를 그대로 모방하는 방식에 제동을 가한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 멋있는 말이라도 맥락에 맞지 않으면 그 말은 잘못 사용된 것이다. 현실의 문맥에 맞게 언어를 운용할 수 있어야만 진짜 문장가다. 그럴 때 그 언어는 꼭 우아하고 전아할 필요는 없다. 언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지나친 훈고는 언어의 지엽에 매달리게 하지만, 적절한 훈고는 언어의 길을 고민하게 한다.^^


비문(碑文)의 글이 잘못을 인습하여 우습게 되는 것은 ‘대자리를 바꾸었다[易簀]’는 말만 한 것이 없다. 대자리를 바꾸는 것은 사실 성현이 바르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다. 그러나 증자(曾子)의 대자리는 바로 계손(季孫)이 준 것으로 예법에 어긋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바꾼 것이니, 그 때문에 생을 바르게 마감한다는 뜻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찌 모두 계손의 대자리를 가져서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문장가들이 고사(故事)를 인용하는 것은 실로 이런 부류가 많다. 그러나 비문의 경우에는 그 성격이 본디 신중하고 엄격하여 이력과 생졸(生卒)을 서술할 적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그대로 써야지 옛말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비록 혹 고사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상세히 살펴 합당하게 해야 하니, 예를 들어 이불을 걷어 손발을 보라는 것과 대자리를 바꾼 것이 모두 증자의 일이기는 하나 이불을 걷어 손발을 보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대자리를 바꾸었다는 말은 사람마다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농암잡지』, 「외편」)


목재의 비문 중에 서울을 말한 곳은 대부분 장안(長安)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하다. 장안은 본디 관중(關中)의 한 작은 고을인데 한(漢)나라, 당(唐)나라 때에 그곳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서울은 연(燕) 지방인데 어찌 다시 관중의 한 작은 고을의 이름으로 그곳을 일컬을 수 있겠는가. 시문에 옛말을 인용할 경우 가차하여 써도 되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지명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시는 그나마 괜찮지만 문은 더욱 안 되고 다른 문장은 그나마 괜찮지만 비문처럼 일을 서술하는 문장은 더욱 안 된다.(『농암잡지』, 「외편」)


농암은 역책이란 말과 장안이란 말을 아무 때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역책’은 대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대자리를 계손씨가 증자에게 하사했기 때문에 대부가 아닌 증자가 그 대자리를 자기 직분에 맞는 대자리로 바꾸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는 증자가 자신의 직분에 맞는 예를 갖추고 죽었다는 의미였는데, 후대에 바른 죽음을 뜻하는 말로 확장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농암이 문제 삼은 것이다. 대부로서 대자리를 하사받은 일도 없는데 역책을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장안도 마찬가지다. 장안은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서울인데, 어찌 명나라 때의 서울도 장안이라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 것이다. 명나라는 실질에 맞게 그 서울을 연경이라 일컬으면 되는데, 굳이 장안이라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은 것이다. 과거는 과거의 상황에 맞는 언어로, 현재는 현재의 상황에 적확한 언어를 사용할 것, 그것이 글쓰기의 도다.   


장안은 당나라때의 도읍이다. 당시 로마와 비견할 정도의 국제적인 도시였다. 수도(首都)를 가리키는 말인 '장안'은 오래된 도읍인 장안에서 따온 것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던 상태였다.



선현을 칭찬할 때에는 모름지기 진실하여 사실에 부합해야 하니, 만약 오로지 추존(推尊)하기만 하고 사실 여부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도리에 맞지 않게 된다. 비유하자면, 사람 얼굴을 그릴 때에 실물과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를 막론하고 오로지 아름답게 그리려고만 하면 그 그림이 아름답기는 하나 그 사람이 아닌 것을 어찌하겠는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이소재 이중호(履素齋 李仲虎))의 행장을 논하면서 이러한 뜻을 매우 분명히 말했는데, 근세 유현(儒賢)들의 비문(碑文)이나 지문(誌文)을 보면 오직 계곡 장유(谿谷 張維))가 지은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비문만이 매우 간략하면서 사실에 부합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퇴계의 비판을 면치 못할 듯하다.(「내편」 2) 


언어만이 아니다. 농암은 내용도 사실에 부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추존하는 글이라 할지라도 사실에 부응해야지 억지로 아름답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저 아름답게만 그리려 한다면, 그 글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지 그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 글은 가짜다. 이것은 실물과 닮았느냐 닮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대상의 특징과 개성이 제대로 드러난 글인가 아닌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농암은 사실과 다르게 높이고, 확대하고, 부화하는 글을 경계할 뿐이다. 실상에 맞게 쓰기, 그래야 글이 거짓이 되지 않는다.
 


답습과 표절은 NO, 문장의 생기를 찾아라!


언어의 적확한 사용을 따졌던 농암은 표절을 극력 배격한다. 자신의 언어, 자기 시대의 언어로 글쓰기를 하라고 말한다. 표절을 반대하고 독창적 언어 사용을 주장한 이유는 17세기 문단을 휩쓸었던 의고문파들의 답습 행위를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의고문파가 시작된 연유도 그 이전 문학의 폐단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은 16세기 후반 무렵 고문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한문학의 전범이 되는 텍스트 예컨대 사서오경과 『사기』와 같은 한나라 때의 역사서, 그리고 당시 등의 창작 정신을 살려 기성 문학의 형식주의를 타파한 운동이다, 일종의 문학 정풍운동이라 할 수 있다. 고문파들은 명의 의고문파가 내건 문학 정신에 공감하여 당시의 문단의 구태를 비판했다. 의고문파는 16세기 명나라의 이몽양, 왕세정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복고적 문학 운동이다. 이들은 ‘문장은 반드시 선진과 양한을 본받아야 하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고 주장했다.


명말청초 중국의 문단은 의고문파, 당송파, 공안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성행하고 있었다. 의고문파는 선진 양한의 고문을 모방하기를 주장하는 바 이몽양, 하경명, 이반룡, 왕세정 등의 전후칠자가 주축을 이루었고, 당송파는 당송시대의 한유, 유종원, 구양수, 증공 등의 고문을 모방하는 바 당순지, 왕신중, 모곤, 귀유광이 주축을 이룬다. 공안파는 답습한 글쓰기는 진부할 뿐 아니라 죽은 글쓰기라 배격하면서 성령(자연스런 인간의 성정)을 담은 글쓰기를 주장했다. 초횡, 원중도, 원굉도, 원종도가 여기에 속한다.


중국 문단의 경향을 모두 섭렵했던 농암은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의고문파의 글쓰기의 폐해를 지적했는데, 그 비판은 공안파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시는 성정(性情)의 발현이자 타고난 천기(天機)가 동한 것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이 점을 터득하고 시를 지었기 때문에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을 막론하고 대체로 다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성음과 모습을 모방하고 분위기와 격식에 힘써 옛사람을 따르려고 하는데, 그 성음과 면모가 비록 혹 비슷하기는 하나 기상과 흥취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명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다.(『농암잡지』, 「외편」)


시는 실로 당(唐)나라 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또한 당나라 시를 닮을 필요는 없다. 당나라 사람의 시는 성정이 일어나 담기는 것을 위주로 하고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일삼지 않았는데, 이것이 본받을 만한 점이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 서로 간의 시간적 거리가 천백여 년이나 되는데 성음과 기상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는 이치와 형세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억지로 비슷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같은 것이 될 뿐이니, 형체는 비록 흡사하다 할지라도 그 천진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농암잡지』, 「외편」)


중국의 유명한 시인 중 한명인 이백. 술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이 있어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늘 달과 술이 함께한다. ^^



농암은 지금의 글쓰기는 단지 선진의 문장과 성당의 시의 성음과 모습, 분위기와 격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진부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한다. 남의 시와 문장을 표절한 까닭에 나무인형이나 진흙인형과 같아서 전혀 생기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하여,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의 시와 문장을 써야만 한다. 시공간이 다른데 똑같은 시와 문장을 쓴다면 그 시와 문장에서는 생명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생동하는 기운이 없는 글은 죽은 글과 같은 것이다. 농암의 말로 한다면 현재의 글쓰기는 의고문파를 답습하느라 ‘자연스런 성정이 발현되어 있지 않고 타고난 천기가 작동하지 않는’ 글쓰기에 불과하다.     


천기(天機)는 『장자』에서 기원한 말로 천지조화의 오묘함, 생생하는 자연의 상태, 그리고 인간이 타고난 천진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천기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연스런 내부의 시스템,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기관이란 말이다. 곧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발동을 가능케 하는 본래적 시스템이다. 윤리적 추상화를 거치기 이전의 자연의 활발발한 시스템의 작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천기는 천리(天理)와 다르게 선악시비라는 도덕적 판정 이전의 본성을 말한다. 인간에게도 있고, 외부-자연에 존재할 수도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천기의 속성이다.


─강명관, 『농암잡지평석』, 소명출판, 2007년, 87~99쪽


농암은 천기를 대체하는 말로 천진(天眞), 천질(天質)을 사용하기도 한다. 농암은 누구나 답습해서 쓰는 진부한 말이나 특정한 격식과 관습에 매몰된 스타일을 벗어나서 그 시대, 그 사람, 그 공간만의 특이성을 담은 시와 문장 스타일을 천기와 천진과 천질이 드러난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볼 때 천기는 그 어느 것도 표절하거나 모방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독창적으로 표현한 형식과 내용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대상을 표현하는 언어도, 그 언어를 담아내는 스타일도 그 어떤 격식과 관습에 구애되지 않을 것. 농암은 그 결과 풍정(風情) 즉 풍모와 정취가 생동하는 빛깔(生色)을 발하는 그런 시와 문장을 구성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한퇴지(韓退之)는 문장을 지을 적에 되도록 진부한 말을 제거하였는데, 진부한 말이란 비단 저속하고 평범한 말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옛사람이 이미 한 적이 있는 말이면 모두 그에 해당한다. 예컨대 『춘추좌씨전』, 『국어』(國語), 『한서』(漢書), 『사기』의 문장이 비록 아름답고 특이하기는 하나 한 번이라도 혹시 그대로 답습하여 사용한다면 모두 진부한 말인 것이다. 지금 한유의 문집에 실린 수백 편의 문장을 읽어 보면 한마디도 옛사람의 성구(成句)를 그대로 답습하여 쓴 말이 없다.(『농암잡지』, 「외편」)


송나라 사람들은 비록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하기는 하였으나 축적된 학문과 가슴에 맺힌 뜻이 뭔가에 감격하여 촉발되고 솟구쳐 나와서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관습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상이 호탕하고 힘이 넘쳤으며 때로는 타고난 기지가 발하는 데에 가깝기도 하였으니, 그 시를 읽노라면 그래도 성정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격식에 얽매이고 걸핏하면 모방을 일삼아 전체적인 맥락에 맞지도 않는 것을 본뜨려고 애쓰다가 더 이상 천진함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그들이 도리어 송나라 사람들보다 못하게 된 까닭일 것이다.(『농암잡지』, 「외편」)



문장비평가 김창협


우리는 이즈음에서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난감한 사실에 봉착하게 된다. 천기의 작동으로서의 글쓰기와 사상으로서의 주자학이 과연 병존할 수 있는 것인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순간이다. 농암이 경전 해석에서는 주자학을 고수하여 다른 해석을 이단으로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서는 양명좌파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 당위적 법칙, 윤리적 추상화를 거친 천리가 아니라, 천기라는 천리 이전의 자연스런 시스템의 작용을 운운한 것은 이미 주자학의 사상적 범주를 넘어서는 것일 터. 이 병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나의 진리나 도덕적 이념이 아니라, 만물 각각의 혹은 글을 쓰는 사람 각각의 진실이 더 중요한 창작동인으로 떠올랐음에도 농암은 이런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 것일까? 


앵무새와 같은 글쓰기는 그만! 글쓴이의 진심과, 시대의 언어와 형식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글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농암 김창협.



결론부터 말하자면 농암이 일부러 알면서도 은폐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농암 자신은 이것을 모순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 같다. 숨긴 것이 아니라 그런 파장과 탈주를 예상치 않은 듯하다. 양명좌파의 사상을 이단으로 취급했지만 그들이 펼친 독창적인 문장론은 별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농암은 장자의 사상은 비판하면서도 장자의 호방한 문장에 호감을 갖고 있었고, 왕양명의 사상에는 반기를 들면서도 왕양명 시문의 장점을 긍정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농암이 중요하게 생각한 바는 실상에 맞는 가장 적확한 언어 사용과 해석 방식이었던 것처럼, 경전은 주자의 해석을 따르되 문장은 가장 자연스런 문체와 정서의 발현이어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 전혀 모순이 일어난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농암은 글쓰기의 비평에서도 이념상의 균열이나 주자학의 가치를 해체하기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농암이 배격한 것은 오직 표절과 답습이다. 농암이 표절과 답습을 문제 삼은 이유는 앞선 시대의 글쓰기의 격식과 정취를 모방하는 데 치중하면 글 쓰는 이의 진심과 생기를, 이 현재의 시공간의 실상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농암은 앵무새처럼 모방하기를 거부했다. 다만 주자 시대의 실상을 통해 주자학의 원의를 따져 들어가듯, 나의 진심과 나의 시대의 언어와 형식이 지닌 고유성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글쓰기를 주장했을 뿐이다. 농암은 그 누구와도 다른 글쓰기를 강조했다. 이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내가 깨달은 대상을, 나의 글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독창적인 스타일의 글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 가능하겠는가?


이 독창적인 글쓰기의 불온성, 즉 도덕적 가치판단에 균열을 일으키고 이념적 경계를 해체하는 폭발력은 농암에게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농암이 문장을 실험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암잡지』 속의 농암은 문장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장 비평가에 가깝다. 농암은 글쓰기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문체를 선보이지는 못했다. 농암의 단계에서 할 수 있었던 역할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18세기 독창적인 글쓰기의 입법자는 농암이었고, 창신(創新)하고 기궤한 글쓰기는 후배 문인들의 몫이었다.  
 

글. 길진숙(남산강학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