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길 위에서 만난 역사

곰진의 남산 답사기 - ① 나의 출근길 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 9.

곰진이가 출퇴근길에 만난 남산 이야기!



남산, 이곳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거남리. 이곳은 내가 19년 동안 살았던 집 주소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행정단위인 거남마을의 주민이었다. 쉽게 말하면 시골 촌놈. 가장 가까운 도시는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나가야 닿을 수 있는 대구였다. 그런 깡촌(!) 출신인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온 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서울은 굳이 특별한 장소가 아니어도 나의 시선을 끌 만했다. 모든 게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전쟁기념관을 구경하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선생님이 순간 소리를 지르셨다. “애들아 저기 남산이랑 남산타워 보인다. 구경해라!” 그 말에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순간 남산타워 쪽으로 쏠렸다. 순간 나는 저녁 어스름에 우뚝 서 있던 남산타워가 쓸쓸하고 적막하다고 느껴졌다.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낯선 서울의 밤이 무서웠다. <서울 이곳은>의 가사처럼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난 돌아가야겠어’가 나의 심정이었다. 서울은 나에게 너무 먼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서울에 살고 있다. 연구실(남산강학원, 감이당)이 필동으로 이사 오면서 자연스럽게 남산의 북쪽 자락에 거취를 정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렇게 낯설던 남산이 이제는 친근한 동네 뒷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젠 나도 어엿한 서울특별시 시민으로 남산에 위치한 교육기관(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공익복무 중이다. 출퇴근길도 남산 산책로를 이용하는 탓에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남산에서 보낸다. 그러다 보니 남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둘 듣게 되었다. 내가 주로 남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통은 남산을 산책하는 아주머니들이다. ‘옛날에 저 자리에 뭐가 있었고, 저 건물이 옛날에는 어떻게 쓰였고’ 그런 얘기를 귀동냥하다 보면 마치 문화재 해설을 듣는 것처럼 재미가 쏠쏠하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곳들이 알고 보니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현장이었다. 남산은 6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나라의 수도를 품었던 산답게 다양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오늘부터 3회에 걸쳐서 내가 출퇴근길에 보고 듣고 만났던 남산의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고 한다. 오늘은 먼저 출근길에 만난 남산의 이야기다.


episode1. 출근길에 만난 남산!  


오전 8시 25분, 남산강학원 주방에서 장금샘, 소민이와 함께 조촐한(!) 아침을 먹은 나는 공익 복무 기관으로 출근하기 위해 연구실을 나선다. 평소에는 남산 산책로를 이용하지만 가끔 사람구경이나 시내구경을 하고 싶을 때면 충무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오늘은 충무로로 가자. 지하철 3, 4호선 충무로역을 지나 명동 방향으로 가다 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인들로 거리가 북적거린다. 한국의 집과 한옥마을을 구경 온 관광객이다. 대륙의 위력인 걸까? 관광버스 다섯 대를 나눠 타고 온 중국인들이 출근하는 시민보다 더 많아 보인다. 


연구실 -> 한국의 집

한국의 집은 그 이름답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곳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곳에 조선 시대 충신의 아이콘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집이 있었다. 박팽년,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지만 이름만 듣고 얕볼만한 인물은 아니다. 박팽년은 학문과 문장·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을 만큼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학자였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성삼문과 함께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참여했던 박수찬으로 나온다. 드라마대로라면 얼굴과 재능이 모두 뛰어난 엄친아였던 셈이다. 거기다 절개까지 굳은 인물로 훗날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을 때 끝까지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사람의 팔자만큼 땅의 팔자도 참 기구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바로 이곳에 조선총독부 No.2였던 정무총감의 관저를 세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최고의 충신이 살던 집터에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 제국주의의 거물들이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 문화를 알리는 한국의 집이 들어선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매번 다른 기운의 리듬을 타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게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의 집 -> 서울유스호스텔 밑




8시 30분, 꾸물거리다가 늦겠다. 잠깐 사이에 놓친 정신을 수습하고 명동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하다가 소방재난본부와 TBS 교통방송사가 보이는 남산 언저리로 방향을 돌린다. 여기서 TBS 교통방송사를 끼고 남산 애니메이션 센터 방향으로 쭉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잠깐! 출근길 경로를 조금 이탈해야 하지만, 서울 유스호스텔 방향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다 보면 넓은 공터에 오롯이 서 있는 표지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표지석에는 ‘통감 관저터’라고 적혀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 총독의 관저가 있던 곳이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경술국치의 역사적 현장이다.

조선을 손아귀에 거머쥔 그 날 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데라우치가 뒤에 한 꼭지에 덧붙이길, '합병문제는 여차히 용이하게 조인을 완료했다'고 하고, 뒤에 두 글자를 덧붙였습니다. 표현상으로 가가(呵呵)에요. 이게 뭐냐면 '가가대소(呵呵大笑)'란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깔깔깔 웃는 표현이거든요? 오늘날로 비유하면 'ㅋㅋㅋ' 같은 건데, 당시 '합병조약'을 조인하고 난 데라우치의 기고만장함과 기쁨이 표현된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오마이뉴스, <남산에 케이블카만 있는 줄 아셨다면... 놀라실 겁니다>, 강선일 기자, 13.10.15


‘아 드디어 조선을 병합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일국의 대신을 깨방정떨게 할 만큼 일본의 조선침탈은 오랜 비전이었다. 그래서 소망을 이루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너무 흥분한 탓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통감관저 아니 이제는 총독관저의 앞마당을 밤새 서성이지 않았을까. 관저 터 가까이에는 100년 전 그날, 마당을 서성이던 데라우치를 내려다보았을 400살 먹은 아름드리나무가 지금도 묵묵하게 자리하고 있다.    


관저 터 ->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8시 42분, 다시 TBS 교통방송사로 내려와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이제부터는 오르막이라 숨이 찬다. 조금 가다 보니 각종 애니메이션 전시, 관람 홍보가 붙어있고 손오공, 둘리, 장금이(!) 등 다들 텔레비전에서 한 번씩은 보았을 법한 캐릭터들이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다.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그 캐릭터들 사이에 조그만 표지석이 숨어있다.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표지석에는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터’라고 적혀있다. 일제 강점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자리했던 이곳에 지금은 만화 캐릭터들이 웃으면서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1926년, 경복궁 안으로 이전한 조선총독부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 있었던 것 아닌가?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철거된 조선총독부의 상단 머리 부분을 독립기념관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럼 여긴 뭐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이 필요하다. 일제는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맺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1906년에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센터 자리에 조선통감부(한국통감부)를 설치한다. 이곳에서 앞서 살펴본 1910년 경술국치를 준비하기 위한 모든 활동이 벌어졌다. 경술국치(한일병합) 이후에는 조선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개칭되었고 1926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 안의 새로운 건물로 옮겨갔다. 이를테면 이곳은 구(舊) 조선총독부가 있던 터가 되겠다.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일제의 심장이었던 이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출신의 김익상 의사가 일제의 침략과 압제에 대한 복수와 경고로써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잊혀져버린 김익상 의사를 기리는 소박한 표지석 하나가 애니메이션센터 바로 옆에 위치한다.

이제 더 허둥대다가는 지각이다. 오르막길을 헉헉대면서 걷다 보니 남산타워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오고, 그 너머로 과거 한양 도성의 사대문 안이었던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옛날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줄지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거대한 빌딩이 숲처럼 뒤덮고 있다. 안개 때문인지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 탓인지 빌딩 사이로 보이는 북한산은 흐릿하기만 하다.


8시 55분, 이제 마지막 관문(!)만 넘으면 종착지에 도착한다. 마지막 관문이란 바로 삼순이 계단!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엔딩을 장식해서 유명해진 계단이다. 아침부터 중국인이나 일본인 관광객들이 계단을 배경으로 삼순이 삼식이 포즈로 사진 찍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가끔 외국인 커플이 지나가는 나의 손에 살포시 카메라를 쥐어주면서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커플들에게는 가끔 오는 낭만적인 데이트장소지만 2년을 매일같이 출근하는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깔딱 고개다. 하지만 깔딱 고개만 넘고 나면 눈앞에 광장(분수광장, 남산공원주차장, 백범광장)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내가 근무하는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은 그 넓은 땅의 한 켠, 삼순이 계단 바로 옆에 위치한다.

처음 나는 이곳의 풍경이 조금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남산 중턱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분수대가 주위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공간과는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위인들의 동상(백범김구 동상, 이시영 동상, 김유신 동상, 정약용 동상, 이황 동상)이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마치 억지로라도 이 자리를 채우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 센터 ->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


그러다 이곳이 일제시대 조선 신궁이 있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제는 조선 전역에 일본 신을 모시는 신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져있던 신사를 하나로 묶는 총본부를 바로 이곳 남산에 세운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약 5년 동안 156만 4천 852엔이라는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공사비를 들여서 총면적 12만 7천 9백여 평(여의도의 두 배)에 이르는 조선 신궁을 조성하고 조선인들의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남산에 위치했던 조선신궁의 모습


하지만 남산의 중턱을 깎아 만든 조선 신궁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은 스스로 신궁을 폐쇄하고 신궁에 봉안되었던 신물들을 일본으로 옮겼다. 짧은 시간 성지(聖地)로써 추앙받던 이 땅의 팔자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해방 이후 정부에서는 이 장소의 신성을 걷어내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었는지 몰라도 이곳에 스키장, 야외 음악당, 어린이 회관, 식물원 등 유원지를 세웠다.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도 원래는 어린이 회관 건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생기고, 백범광장이 만들어지는 등 또다시 이 공간에 신성화작업이 진행되는 것 같다. 성역에서 유원지로 그리고 다시 성역으로. 내가 볼 때는 땅도 화(禍)와 복(福)이라는 팔자의 부침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땅의 팔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출근길에 만나는 남산의 흔적들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아마 눈치 챘으리라. 내가 지금까지 살펴봤던 흔적들이 모두 ‘일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 일제 시대 남산은 조선침략의 거점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남산이었을까? 일본과 남산의 궁합이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일까?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명치성대(明治聖代)로부터 가장 관계가 깊은 경성부 내의 정지(淨地)를 선정하여 신역(神域)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 조선총독부가 펴낸 <시정(始政) 30년사>


일본이 보기에는 조선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경성,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길한 정지(淨地 : 맑고 깨끗한 곳. 사원 따위가 있는 곳)가 바로 남산이었다. 일본에게 남산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무척 중요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했던 왜성대가 바로 남산에 있었고 군대가 주둔한 전략적 요충지답게 남산에서는 경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남산의 북쪽 자락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지금의 충무로에 혼마찌(本叮) 즉, 일본인 마을을 만들었다. 신문물과 재화가 모여드는 이곳은 경성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조선왕조가 자리한 북악산과 종로 일대가 야만과 미개의 거리였다면 일제가 자리한 남산과 혼마찌 일대는 문명과 개화의 거리였다. 당시 경성은 조선과 일본이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물론 상황은 일본이 우세했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역사적 흔적이 창덕궁에서 한국의 집(정무총감 터)까지 이르는 도로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만든 이 도로를 통해 순종황제는 신년이 되면 조선총독부로 향했다. 일본 천황에게 신년하례 전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역사적 아픔이 남아 있는 탓일까.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혼마찌가 있던 이곳에 충무로라는 모순적인 이름을 붙였다. 다시는 일본인들이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였다.
 

클릭하세요!


이처럼 내가 무심코 지나가는 출근길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과거에는 어떤 장소였을까? 어떤 재밌는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까. 여러분들도 함께 생각해보시라. 지루한 출근길이 흥미로워질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점심시간 – 산책길에 만난 남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