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 산책길에서 만난 남산 이야기
참 이상한 일이다. 왜 하루 24시간 중에서 유독 오전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일까. 출근하고 무언가를 하다 보면 어느새 시계바늘이 열두 시를 가리킨다. 마음은 ‘아니 벌써?’라고 놀라지만 배꼽시계는 정직하게도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아침에 챙겨온 도시락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속이 더부룩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오후 반나절을 절전모드(?)로 보낼 게 뻔하다. 소화도 시키고 잠도 깰 겸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타워까지 오르기로 한다.
출발~~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꼭대기까지 등산을 하겠다니! 점심산책 치고는 좀 과한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산은 동네 야산이 아니다. 남산에는 점심시간 한 시간이면 충분히 서울타워를 보고 내려올 수 있을 만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나는 최단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분수광장↔서울타워 계단’을 이용하기로 한다.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근처의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간혹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사람도 보인다. 그런데 내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슬쩍 돌아보니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들이다. 점심시간만큼은 혼자 보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재빨리 속도를 내서 선생님들과의 간격을 유지한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 보니 배가 땅긴다. 밥을 먹고 급하게 움직인 탓이다. 잠시 서서 한 숨 돌리는데 눈앞에 ‘잠두봉 포토아일랜드’라는 알림판이 보인다. 이곳은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잠두봉은 한자로 누에 잠(蠶), 머리 두(頭)라고 쓴다. 풀이하자면 누에의 머리. 이런 특이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옛사람들이 남산을 거대한 누에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잠두봉은 남산이라는 거대한 누에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왜 하필 누에였을까? 누에는 과거 남산이 지녔던 중요성에 비해서 한참 격이 떨어지는 비유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다. 고대부터 누에는 매우 귀중한 살림 밑천이었다. 이유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옷감을 짰기 때문이다. 궁중의 임금에서부터 저자의 백성들까지 모두 누에를 쳐서 옷을 해 입었다. 그래서 조선의 태종시대부터는 왕비가 직접 누에에게 뽕잎을 주며 잡업(누에 치는 일)을 권장하는 행사인 친잠례(親蠶禮)를 행했고, 세조는 가구별로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 심는 양을 정해주고 뽕나무를 베었을 때는 처벌하기까지 했다니 누에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거기다 누에 번데기는 맛이 고소하고 영양가가 높아서 백성들에게 유익한 음식이었다. 이와같이 누에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고마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바로 잠두봉이다.
한양에 사는 사람들에게 남산은 꼭 누에와 같았다.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자리 잡고 앉아서 한강의 강바람을 막아주는 따듯한 솜옷이었고(겨울에 백성들은 불법이었지만 남산에서 나무를 해서 떼기도 했다), 외적으로부터 도성을 지켜주는 천연의 갑옷이었다. 하여, 조선왕조에서는 남산에 성곽을 둘렀다. 지금도 성곽은 남산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일부가 남아 있다. 예전에는 도성을 지키던 성곽이 지금은 사람들이 계단에서 산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펜스 역할을 하고 있다. 뭐... 어쨌거나 성곽으로써 사람을 지키는 본분은 다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 계단 한 계단 걸음을 옮긴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그런데 저 멀리서 사람이 북적이는 소리가 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외국인 관광객 무리다. 얼떨결에 그들에게 휩쓸려서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올라간다. 한참을 가다 보니 어느새 눈앞을 답답하게 가리던 층계가 사라지고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정상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 것은 남산봉수대다.
남산봉수대는 조선시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국가안보통신시스템(?)’의 중심축이었다. 말로만 거창한 게 아니라 실제로 봉수는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국가의 긴급한 사태를 알리는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조선팔도 어디든 급박한 사태가 벌어지면 해당 고을의 사람은 봉수를 올렸다(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 그러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된 다른 지역의 봉수대로 릴레이식으로 전해진 뒤 최종에는 도성에 위치한 남산봉수대로 집결되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퍼시벌 로웰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자.
남산 꼭대기에 감시인이 살고 있는 보잘것없는 오두막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앞에는 다섯 개의 돌무더기가 세워져 있는데, 그 위로 횃불이 조선왕국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끝단까지 전달된다. 즉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안전이 이 다섯 더미의 돌에 달려 있어 어두워진 밤, 적막 속에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는 것은 아름답고 기묘한 모습이었다. 조선에 지정된 모든 봉우리에서 이와 같은 횃불신호를 보내면 왕은 수도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계속 파악하고 있다.
─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낮에는 연기를 이용해 상황을 알린다.
그 옛날 선조가 왜군을 피해 한양을 버리고 북방으로 몽진할 때도, 인조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옮길 때도 남산봉수대는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불과 연기로 다급하게 위험을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남산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 그 기능을 잃었다. 봉수대를 대신할 전화·전보와 같은 통신수단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졌다가 최근에야 일부가 복원되었다.
그런데 복원된 대부분의 유산들이 그렇듯 남산봉수대 또한 하나의 기념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남산봉수대는 남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봉수대라는 과거의 흔적을 소개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배경이 되었다. 서울성곽과 마찬가지로 남산봉수대도 더 이상 수도를 방어하는 최전선이 아니다. 봉수대를 뒤로하고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곳은 팔각정이다. 지금 팔각정은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한숨 쉬어가는 곳이지만 과거에는 이곳의 주인이 따로 있었다.
국사당(國社堂)이 그 주인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太祖) 4년(1395년) 12월 29일에 이조(吏曹)에 명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경대부(卿大夫) 및 선비와 서민들은 제사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목멱대왕에게 제사지내는 사당을 바로 국사당이라고 한다.(그래서 남산을 목멱산이라고도 부른다.) 태조는 국사당을 세워서 나라의 안녕을 빌었고 고종 때까지 기우제, 기설제, 국왕의 쾌유를 비는 국가적 제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경대부 및 선비와 서민들은 제사하지 못하게’하라는 왕명이 무색하게도 국사당은 곧 무속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지엄한 왕명보다 신에게 복을 바라는 마음이 더 힘이 센 탓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영빨(!)이 정말 세거나! 무엇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닌가. 나중에는 조정에서도 이를 금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남산은 수많은 신들의 거처가 되었다.
과거 남산에 있었던 국사당
그런데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일은 신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가 보다. 이 땅의 주인이 바뀌자 신들의 터전인 남산도 덩달아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앞서 살펴봤듯 남산자락에 일제가 세운 조선신궁이 들어선 것이다.(조선신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의 출근길 이야기'를 참고해주세요). 새로운 주인은 곧 옛 주인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국사당의 위치가 문제였다. 불경하게도 미개한 식민지의 잡신들이 제국의 건국신을 내려다보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사당은 남산에서 경복궁의 오른쪽에 위치한 인왕산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름도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곳에서(國社堂)에서 태조의 스승 무학대사를 기리는 사당(國師堂)으로 격하됐다.
일제시대 남산은 오직 일본 신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신도 남산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신들이 떠난 자리는 인간들의 차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은 조선신궁의 자리에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국사당 터에는 우남정이라는 자신의 호를 딴 정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신들의 거처를 모욕한 탓일까 아니면 너무 과욕을 부린 때문일까. 이승만은 하야했고 동상과 정자는 모두 철거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국사당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국사당 터에는 또다시 팔각 모양의 정자인 팔각정이 뜬금없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때, 남산은 신들의 땅인 동시에 금기의 땅이었다. 지금도 남산 정상에서는 서울시내는 물론 저 멀리 경복궁과 창덕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이러한 전략적인 이유로 조선시대 남산은 일종의 군사보호구역이었다. 그리고 풍수적으로도 남산은 군주의 책상에 해당하는 산으로 지력이 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입산을 통제하고 벌목과 매장을 법적으로 금했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산천을 뒤덮고 있는 무덤을 남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일제시대에도 남산은 신사와 일본인의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에 치안이 삼엄했고 조선인들이 함부로 쏘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산은 서울시민들을 위한 도심 속 유원지로 개발된다. 특히 1971년 서울타워(남산타워)가 완공되면서 남산은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산이 되었다.
서울타워는 팔각정 바로 옆에 위치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서울타워를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서울타워의 역할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서울타워는 방송국에서 설립한 종합전파탑으로 지금도 서울시내의 텔레비전 방송을 책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1971년, 초기에 완공된 서울타워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전망대 없이 탑만 삐죽하게 서 있는 단순한 모양인데 1975년 전망대가 완성되고 나서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전망대가 생기기 이전의 남산타워
서울타워 아래를 둘러보니 그 유명한 사랑의 자물쇠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색색의 자물쇠들이 펜스에 걸려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오글거리는 말(!)들이 자물쇠마다 적혀 있다. 마치 누가 더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신에게 축원을 드리던 장소가 지금은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시대가 바뀌면서 남산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조선시대 남산은 인구 30만의 중세도시 한양의 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 1,000만에 이르는 거대한 콘크리트 정글 서울의 중심이다. 남산은 이제 정말 산이라기보다는 공원에 가깝다. 더 이상 금기도 신성도 사라져버렸지만 대신 더없이 친근하고 푸근한 ‘남산공원’.
이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참 신기한 건 오전 시간만큼 점심시간도 굉장히 짧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아... 짧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어 다닌 탓일까. 왠지 뜨거운 히터 아래서 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음 시간에는 ‘퇴근길에 만나는 남산이야기’로 스산한 겨울 저녁에 어울리는 으스스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겠다.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지난 연재 ▽ > 길 위에서 만난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진이 남산 답사기 최종회 - 퇴근길에 만난 남산 이야기 (4) | 2014.01.23 |
---|---|
곰진의 남산 답사기 - ① 나의 출근길 이야기 (8) | 2014.01.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