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만난 남산
오후 6:00 정각, 이미 10분 전부터 퇴근할 준비를 마친 나는 오늘도 칼퇴근을 한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퇴근길은 어둡다. 눈으로 얼어붙은 삼순이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내가 자주 퇴근길로 이용하는 ‘남산 북측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산은 한겨울 특히 오늘처럼 눈으로 빙판길이 되는 날에는 인적이 드물다.
퇴근하자~~~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남산은 어디를 가도 지척에 사람이 사는 동네가 있고,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호랑이도 출몰했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인간친화적인’ 남산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게다가 북측 산책로는 중간 중간 공공기관의 건물이 있어서 더 마음이 놓인다. 물론, 이 건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대체 이 건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의외의 소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돌파해서 화제를 모은 영화 <변호인>. 영화 개봉초기부터 입소문이 자자했던 탓에 나도 천만 관객의 대열에 합류해서 영화를 봤다. 곧 영화를 볼 사람에게는 예의가 아니지만, 글을 전개하기 위해서 조금만 스포일러(?)를 하겠다. 변호사 송우석은 평소 알고 지내던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 진우가 불온서적을 읽고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감금·고문당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진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진우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진우가 ‘정기적인 모임’에서 읽었던 이른바 불온서적들을 읽는다. 그리고 그 책들은 불온서적이 아니며 정부가 억지로 청년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조작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송우석은 진우가 읽었던 책을 불온서적이라고 판단한 정부기관의 담당자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운다.
내가 볼 때,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법정씬이다. 송우석이 검사 측과 그에 동조하는 증인에게 경상도 사투리로 그 어려운 법정용어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심문할 때는 감동을 넘어 희열(?)을 느낀다. 이건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은 공감하시리라. 그런데 한편으로는 법정에서 저렇게 감정적으로 대처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워낙 대사가 빠르고 많아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기억 속의 법정씬을 재구성하면 대략 이러하다.
송우석 : (불온서적을 감정한 사람에게) 증인은 ‘정기적인 모임’에서 읽었던 책을 불온서적으로 판단했습니다. 맞습니까.
증인 : 네 맞습니다.
송우석 왈 : 증인이 일 한 곳이 어디죠? 중정(중앙정보부)의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증인 : 잘 모르겠습니다. 근무하는 곳이라고 해서 꼭 주소를 외울 필요는 없죠.
송우석 : 서울시 중구 예장동 4-5번지 아닙니까.
검사 :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국가기관의 기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손에 땀을 쥐면서 영화를 보고 있던 내게 너무도 익숙한 주소가 들렸다. 증인이 불온서적을 검사한 곳. 다시 말해 무고한 젊은이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던 장소인 중앙정보부. 우리에게는 안기부라고 잘 알려진 국가기관이 있던 ‘서울시 중구 예장동’은 내가 사는 필동과 이웃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연구실이 필동으로 이사하면서 근처 어딘가에 과거 안기부 건물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남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몇 군데 추측한 곳도 있었지만 관심 있게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공간들이 주는 무게도 무게지만 은연중에 역사적인 장소들은 왠지 특별한 곳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호인>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궁금한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이게 웬걸? 과거의 흔적들은 너무도 가까이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앞서 「나의 출근길 이야기」에서 우리는 남산의 북측자락이 일제시대 일본인의 본거지였던 왜장대라는 것을 살펴보았다.('나의 출근길 이야기'를 참고하세요.)일본인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고 수탈했다. 하여, 왜장대는 조선 사람에게 공포와 분노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을 치르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이 땅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주인은 이전의 주인이 그 땅에 덧씌워놓은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오죽하면 이름도 ‘왜장동’을 살짝 변형시켜 ‘예장동’이라고 했겠는가.
1961년 5월 16일, 사회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이 떠난 이 자리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한다. “국가안정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수사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던 학생, 민주 인사, 양심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고문과 협박이 자행됐다.
이것 벗어!" 하면서 팬티까지 다 벗깁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두들겨 패는데, 그냥 패는 게 아니라 침대목으로 패는데, 온몸을 시퍼렇게 짓뭉갰습니다. (중략) 군홧발로 막 걷어차고, 짓이겨져서 바닥에서 벌벌 기는 겁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너 여기서 죽여도 아무도 몰라!" 공포감을 줍니다.
─ 민주화 운동 원로 이해학 목사의 체험담
당시 “남산에 간다는 말은 고문 받아 병신이 된다는 말과 동의어”(아시아 경제, 오진희, <남산, 안기부 '고문의 현장' 흔적찾기>, 2012.07.13)로 쓰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엄혹한 공포의 공간이 다른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나들이 장소였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테마파크와 유원지가 개발되기 전까지 남산은 서울시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놀이 공간이었다. 하나의 장소에서 비명과 웃음이 함께 터져 나왔던 것이다. 아마 남산에 놀러 나온 사람들은 애써 안기부가 있는 북쪽자락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안기부는 남산에 군림하면서 2만 4,800여 평의 부지에 총 41개 동으로 확장됐다. 하나의 마을을 만들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이 땅마저 부족했나 보다. 1995년 안기부는 남산의 공개성과 협소성을 이유로 내곡동 대모산 근처로 청사를 옮긴다. 그리하여 남산의 안기부 건물들은 서울시 소유로 넘어갔다. 이제 더 이상 이곳은 ‘국가기밀’이 아니다. 서울시민의 소유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 그 유명한 안기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안상의 이유로 많은 수의 건물들이 철거됐고 남아있는 건물들은 과거를 짐작할 수 없는 용도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지나쳤던 소방재난센터, TBS교통방송국, 대한적십자사 모두 과거 안기부에 속했던 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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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 나를 가장 뜨악하게 만들었던 것은 안기부의 심장! 본관의 변신이었다. 안기부 본관은 내가 퇴근 후 연구실로 향하는 산책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앞에 서울 최고의 번화가인 명동이 내려다보이지만 남산 골짜기 깊숙이 위치한 탓에 사람의 발길은 드물다. 그런데 이곳에 매일 밤 지방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짐을 푼다. 서울유스호스텔로 건물의 이름과 용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끔 출근하다 늦으면 지름길 삼아 이곳을 지나간다. 그러다 부지런히 서울구경을 하기 위해 부스스한 얼굴로 버스에 오르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이 아이들은 과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을까? 아니 안다면 저렇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너무도 중요한 역사적인 무대가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 퇴근길이라고 너무 여유를 부렸다. 핸드폰을 보니 벌써 6시 15분이다. 칼바람이 부는 탓에 몸을 옹송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엊그제 내린 눈으로 길이 꽁꽁 얼어붙었다.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조심조심 걷고 있는데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이즈를 입은 아저씨가 나를 추월해서 달려 나간다. 경이로운 눈으로 멀어져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참을 가다 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음기가 작렬하는 기와집들이 골짜기를 따라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목멱산 와룡묘’라고 적혀있다.
목멱산은 「점심시간 - 산책길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미 익숙할 것이다.('점심시간 - 산책길 이야기'를 참고하세요.) 조선의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남산을 목멱대왕에 봉했고 남산 꼭대기,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국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즉, 목멱산은 남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와룡묘는 무엇일까? 와룡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호(號)다. 정리하자면 ‘목멱산 와룡묘’는 목멱산에 있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 지금은 제갈량 뿐만 아니라 단군과 보살도 함께 모시고 있다.
남산 중턱 골짜기에 위치한 와룡묘
남산은 예부터 온갖 신들이 거처하는 신들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제갈량의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게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남산에 유독 와룡묘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왜 하필 와룡묘만 남은 것일까?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선조 때에 평안도 영유에 와룡묘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 귀신은 평양에 주둔했던 명나라 군대를 따라왔는데 뛰어난 지략으로 적들을 물리쳤듯 왜적을 물리쳐주길 바라는 민초들이 와룡묘를 숭배했다. 그런데 구한말 또다시 왜적들이 몰려들자 이번에는 서울의 남산 중턱 골짜기에 와룡묘라는 작은 사당이 생긴다. 이 와룡묘가 만들어진 배경은 몇 백 년 전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번에는 좀 더 전략적인(!) 이유가 포함되었다. 전략이란 바로 와룡묘가 위치한 장소성에 있었다!
남산 전체가 신들의 땅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핫스팟은 있었으니 바로 잠두봉과 그 인근이다. 다시 말해 남산의 머리 부분이 신들이 선호하는 자리였고 힘 좀 쓴다는 신들은 모두 이곳에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목멱대왕의 국사당이 그랬고, 일제시대 일본 건국신과 메이지 천황을 모신 조선신궁이 그랬다. 물론 신들은 서로 공존하지 못했다. 일본 귀신에 의해 목멱대왕은 남산에서 추방당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셈이다. 조선인들의 충격은 컸다. 그래서 그들은 조용히 복수를 꾸민다. 남산 깊숙이, 외딴 곳에 와룡묘를 세운 것이다. 와룡묘는 그 크기는 작았지만 위치만큼은 핫스팟 안에서도 핫(hot)했다. 조선신궁의 목덜미를 내리누르는 자리에 위치한 까닭이다. 조선인들은 제갈량의 귀신을 불러서 일본 귀신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그 결과, 어찌하였든 조선인들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제갈량이 남산을 차지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다.
와룡묘를 뒤로하고 계속 걷다 보니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남산 1호 터널이 내려다보인다. 남산 1호 터널 톨게이트에 붙어 있는 시계를 보니 시간이 6시 25분이다. 추운 날씨인데도 30분가량을 걷으니 몸에서 땀이 난다. 남산에는 총 3개의 터널이 있다. 터널 이름은 제1호, 2호, 3호 터널로 참 정직하고 특색이 없다. 이 작은 산에 무려 3개의 터널이 뚫리다니.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는 탓에 이런 수난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3개의 터널 가운데 제1호와 2호는 단순히 강남과 강북을 잇는 가교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터널은 휴전이라는 우리나라만의 역사적 사건이 만들어낸 특수한 구조물이다.
1969년 남한정부는 북한에 위협에서 서울을 지키기 위해 ‘서울요새화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남산요새화계획’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남산은 수도를 수호하기 위한 최전선이 된 것이다. 남산요새화계획의 핵심은 1970년대 말까지 전쟁 시 30~40만 명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수용시설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남산 제1호, 2호 터널이다. 사실 남산터널은 교통의 편의보다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방공호인 셈이다.
덧붙여, 지난 시간 이미 살펴본 서울타워도 사실 북한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군사시설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지만 서울타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구파발과 불광동 같은 서울의 북부지역에서는 북한의 TV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고, 서울 시내 어디서든 북한의 라디오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TV나 라디오 같은 미디어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시대에 그것은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한으로부터 송신되는 전파를 차단하고 혹시 모를 북한으로 전파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방패가 필요했다. 당연히 최적의 장소는 남산이었고 남산꼭대기에 서울타워가 떡하니 들어서게 되었다.
남산터널을 지나면 눈앞에 너무도 익숙한 필동 골짜기가 들어온다. 연구실에서 저녁 시간에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북측산책로와 필동을 이어주는 ‘필동 가는 길’로 내려가서 연구실로 향하겠지만 오늘은 프로그램이 없는 날이기 때문에 조금 더 산책을 하기로 한다.
오후 6시 40분, 이순신장군도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석호정을 지나 산책로의 끝에 다다르면 국립극장에 도착한다. 내가 처음 국립극장을 본 것은 TV로 중계되는 영화제 시상식을 통해서였다. 화려한 조명을 밝힌 극장 앞에 레드카펫이 깔려있고 수많은 연예인들이 레드 카펫을 따라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국립극장에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막상 국립극장에 행사가 있어도 별로 구경 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서울사람들이 정작 남산이나 경복궁에 가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국립극장은 각종 공연이 열리고 영화인들의 축제를 벌어지는 문화의 공간이라고만 인식된다. 하지만 과거에 이곳 또한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무대였다.
1974년 8월 15일, 당시 국립중앙극장이었던 이곳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자. 갑자기 극장 안에 총성이 울려 퍼졌고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다.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남산은 민중들 뿐 만 아니라 권력자에게도 아픔의 기억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또 하나 아이러니 한 점은 육영수 여사가 생을 달리한 이곳에서 육영수 여사의 삶을 그린 뮤지컬이 공연됐다는 사실이다. 참... 남산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공간과 사람이 맺는 관계는 참 기묘한 것 같다. 사람의 팔자만큼 땅의 팔자도 흥미진진하다. 자 이제 7시 정각이다. 이제 더 걷기에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빨리 연구실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어야겠다.
오랜 세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남산!
지금까지 출근길 - 점심시간 산책길 - 퇴근길에서 만난 남산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옛날 조선의 사대부들은 집안에 수여남산(壽如南山)이라는 글을 적어 걸어 두었다고 한다. 남산과 같이 긴 수명을 누리라는 의미였다. 이처럼 남산은 오랜 세월 다양한 모습으로 변천했지만 언제나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긴 수명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곳곳에 그토록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있다니!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캐내는 동안 나의 남산 탐방은 너무도 재밌는 놀이가 되었다. 추운 겨울! 날씨 탓에 남산을 산책할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남산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매일 보는 익숙한 남산 조금은 새롭고 재밌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까지 곰진의 남산탐방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월 6일부터는 ‘혈자리 서당’이 돌아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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