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세 개의 시선
『과학과 근대세계』, A. N. 화이트헤드, 오영환 옮김, 2008, 서광사
#1
물론 나는 여기서 각 시대의 수학적 관념들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 사상사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 마치 『햄릿』(Hamlet)이라는 제목의 연극에서 주인공 햄릿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는 정도까지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오필리아” 역을 빼어 버린 것과 비슷하다. 이 비유는 특히 잘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오필리아”는 이 연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일 뿐만 아니라 아주 매력적인데다 약간의 실성기마저 있기 때문이다. 수학의 연구는 인간 정신의 광기이며, 우연적인 사건들의 온갖 요구에 즉시즉시 응해야 하는 고통스런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임을 인정하도록 하자. (49쪽)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는 수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300쪽이 넘는 책에서 수학 이야기는 겨우 30쪽. 그러니까 10분의 1이다. 차지하는 쪽수가 말해주듯, 과학으로 엮인 근대세계에서 수학은 ‘햄릿’이라는 주인공일 수는 없다. 그러나 『햄릿』에서 ‘오필리아’를 뺀다면 『햄릿』은 햄릿일 수 없다. 오필리아 없는 햄릿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 할까.
다른 한편으로 화이트헤드의 삶에서도 수학은 오필리아다. 화이트헤드는 영국 태생의 수학자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수학교수로 10년간 재직했다. 그리고 1924년, 64세의 나이에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교수초빙을 받는다. 과목은 수학이 아닌 철학! 『과학과 근대세계』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자로서의 삶을 여는 책이기도 하다.
수학자에서 철학자로의 변신. 낯설다. 그러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베르그손 등 많은 철학자들이 수학자다. 현대철학자인 들뢰즈나 바디우에게도 수학은 사유의 중요한 무기다. 이들 모두에게 수학은 자신의 철학을 하는 데 있어 오필리아였다. 그리고 그 오필리아의 광기, 그 광기가 그들을 철학으로 연결시키는 다리였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인 햄릿에게 살해당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광기란 수학이 가진 ‘추상성’이다. 추상성은 수학이 욕을 먹는 주된 이유기도 하다. 우리가 마주하는 구체적 현실을 등한시하는, 질을 사장시키고 양을 붙잡는 추상성이라고. 화이트헤드가 “우연적인 사건들의 온갖 요구에 즉시즉시 응해야 하는 고통스런 상황으로부터의 도피”라 말했을 때, 그건 수학에 대한 이런 비판이기도 하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수학의 ‘추상성’이 단순히 현실을 외면하는 광기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요컨대, 비겁한 ‘도피’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매순간은 다르다. 지금의 한 시간은 다음 한 시간과 다르다. 오늘은 내일과 다르고, 올해 겨울은 내년 겨울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들의 이질성 속에서, 한 시간, 하루, 일 년을 말하곤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의 흐름으로, 더 나아가 24절기로 일 년의 흐름을 잡아내기도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매듭들이, 그 매듭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흐름이 필요하다. 이 매듭들의 흐름은 우리가 좀 더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무기다. 24절기는 농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매듭들이다. 이런 매듭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마주치는 매순간들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그러나 그 매듭의 흐름들 덕분에, 우리는 즉자적 대처가 주는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요컨대, 그 매듭의 흐름이란 우리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보호막’이다.(‘도피’라고 번역된 refuge라는 말에는 이 ‘보호막’이란 뜻 또한 들어 있다.)
이 보호막을 만드는 힘이 ‘추상성’이다. 우리가 직접 마주한 것은 매순간 차이들을 보이는 자연이다. 그러나 그 차이나는 물질계를 살짝 걷어내면, 그 차이들을 이어주는 어떤 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 관련도 없어보이던 것들이, 겉껍질을 떼어내면 어떤 연관성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추상’이라는 작업이다.
좀더 단순히 말하자면, 추상을 통해 우리는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의 대표격이 수학의 ‘함수’다. 함수가 다루는 건, 관계다. 예를 들어 삼각함수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삼각형의 ‘변’과 ‘각’의 관계를 구성한 결과다. 함수란 아주 다른 두 사람이 한집살림에 들어가는 결혼과 같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게 수학의 추상성이다.
화이트헤드가 수학을 ‘인간 정신의 광기’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광기는 신적인, 또는 신성한 광기다. (안타깝게 번역에는 그 ‘신적인/신성한’이라는 표현이 빠져있다.) 이를테면 그 광기란 일종의 ‘영감’ 같은 거다. 화이트헤드는 이 영감을 “수학적 지식에 의해 자극을 받아 유도된 지각”이라 표현한다. 내 눈 앞에 지각되는 것 말고, 어떤 또 다른 세계를 지각하게 만드는 광기! 이 영감으로서의 광기가 수학이다.
분명 수학이란 전적으로 우리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학이란, 다른 사유, 다른 상상력의 창안이다. 이로 인해, 수학이 과학과 밀접해 지는 시기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상을 만들어내고자 할 때다.
수학의 상상력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 +_+
그리고 다시 이 지점에서 수학은 철학과 만난다. 새로운 수학을 통한 실험과 그것이 유도하는 지각. 그 새로운 감각은 자연을 새롭게 매듭들과 연결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 내게 과학과 수학이 재미난 이유도 이때문이다. 과학이나 수학의 전문가가 되겠다기보다는, 그것들이 인도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나를 매혹시킨다. 그 상상력은 지금 내 사유의 한계를 뚫고 또 다른 세계들로 나를 인도한다.
학창시절, 수학은 전혀 이런 매혹과는 상관없는 과목이 되곤 한다. 아니 수학은 많은 학생들을 괴롭히는 과목이다. 어렵기만하고 지루하며 재미없는 과목. 그러나 수학이 그런 느낌을 주는 이유는, 수학이 오필리아로서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오필리아가 가진 그 신성한 광기. 그 광기의 매혹을 수학이 되찾을 수 있기를….
신근영(남산강학원)
#2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라는 고대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물음에 대하여 17세기의 천재들은 세계란 질료나 물질의 순간적인 배치구조들의 계기라고 답하였던 것이다. …… 순간적인 물질적 배치구조의 단순 정위(simple location)는 그것이 시간에 관련되는 한,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 자연의 근본적 사실로 간주되는 한, 베르그송이 강력하게 비난했던 개념이다. 그는 그것을 지성에 의한 실재의 ‘공간화’에 기인하는 자연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베르그송의 비난에 동의한다. …… (나는) 이러한 공간화란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매우 추상적인 논리적 구조물의 형태로 표현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사실 여기에 하나의 과오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데서 오는 우연한 과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라 부르려고 하는 것의 한 가지 사례이다.(94쪽)
올 가을부터 무빙비전탐구(MVQ)라는 블로그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공부의 폭을 글로벌하게 넓히려는 시도로 다양한 글들이 올라온다. (깨알홍보^^) 블로그 글엔 그림이 중요한데, 적절한 그림이 한 방씩 들어가면 글도 확! 살고 읽기도 훨씬 편해진다. 하지만 딱 맞는 그림 찾기가 정말 어렵다. 이런 그림, 저런 사진들을 뒤적여 봐도 글을 읽은 느낌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그림이 드물다.
그런데 종종 추상화가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다. 이상한 선이나 물감들이 널브러진 그림이지만, 아주 정확하게 글의 의미를 전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예술에 완전 깜깜한 나로서는 추상화도 쓰일 때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의문이 들었다. 추상화는 정말 추상적인 그림인걸까? 아무리 섬세한 정물화도 보여줄 수 없는 느낌을 적확하게 전달하는 추상화라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구체적인 그림이지 않을까? 추상과 구체, 그 기준이 묘해졌던 것이다.
잭슨 폴록, 「nember 30」, 1950
반갑게도 화이트헤드가 근대과학에 대해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근대과학은 진정 구체적인 사실을 다루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이 너무나 새로웠다. 과학은 사실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상식이다. 이 상식 때문에 과학은 인문학이나 예술과 다르며, 우리 시대 과학만이 갖는 독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니 화이트헤드가 던진 질문은 ‘추상과 구체’에 대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근대과학의 뿌리를 찌르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화이트헤드는 근대과학이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밝힌다. 과학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위치를 잘못 놓아두고 헷갈리고 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실은 추상적인 것, 심지어 하나의 추상‘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추상적 관념들의 체계라는 놀라운 선언! 화이트헤드의 이야기는 근대과학이 찬란하게 피어난 17세기에서 시작한다.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이 질문은 인류 역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질문이다. 여기에 17세기 과학자들은 ‘물질들의 순간적인 배치구조’라고 답했다. 물질들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가 세계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물이나 불, 공기와 비교하면 근대과학의 답은 매우 혁신적이다. 어떤 요소가 아니라 공간에 펼쳐진 구조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과학의 관심은 구조를 밝히는 방향으로 나간다. 지구의 구조, 원자의 구조, 인체의 구조 등등, 이 공간화된 물질구조를 아는 것이 과학적 앎이며 이를 두고 우리는 구체적 사실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사실’이란 물질에게서 다른 물질이나 시공간과 맺는 관계를 모두 제거한 결과일 뿐이다. 실험이 꼭 그렇다. 실험은 엄격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이뤄진다. 이는 실험대상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모두 제거하고 과학자가 원하는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과학적 사실은 물질이 맺는 다양한 관계들을 지워버리면서 만들어진다. 관계의 특정한 부분만을 뽑아내는 것, 곧 추상이다. 그리고 물론 추상은 관념적인 것이다. 실제로 관계가 모두 끊어진 삶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나홀로 살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과학적 사실이 추상관념이라면, 과학은 여러 추상관념들이 맺고 있는 논리적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 사실을 다룬다는 지위에서 추락한 것이다. 물론 근대과학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과학은 제한된 관계에만 집중했기에 지금과 같은 놀라운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이 보다 넓은 영역들 다루기에는 부족한 추상적 체계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화이트헤드는 다양한 관계들이 응축되어있는 존재로서 물질을 바라본다. 물질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물질들, 다른 시공간과의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관계 자체다. 아주 작은 물질조차도 온 우주를 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장엄하고 웅장한 물질들이야말로 진정 구체적인 것이다.
얼마 전 도법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스님은 ‘생명평화’ 그림이라고 하는 추상화를 보여주셨다. 이것이 뭐로 보이냐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이상한 선들이 그어진 것처럼 보였다. 스님의 강의를 다 듣고 나니 그것이 우주와 생명 전체를, 만물이 모두 하나의 존재임을 담고 있는 그림임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구체적일 수 없고 이보다 명확할 수 없다.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제대로 놓기, 내가 읽은 화이트헤드의 묘미였다.
박영대(남산강학원)
#3
우리는 자연을 여러 파악적 통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로 간주하는 잠정적 실재론에 만족하기로 하자. 공간과 시간은 그러한 파악태들의 상호 연결된 여러 관계의 일반적 도식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 어느 파악태도 그것의 전체적 연관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하나하나는 모두 그 복합체 전체가 가지는 실재성을 온전히 갖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그 전체도 하나하나의 파악태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실재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각각의 파악태는 자신의 입각점에서 전체의 각 부분에 부여해야할 여러 양태성을 통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악이란 통일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파악에서 파악으로의 필연적인 전이를 통한 팽창적 발전의 과정이다. …… 이처럼 자연은 발전하는 여러 과정의 조직체이다. 실재는 과정이다. 불은색의 실재 여부를 묻는 것은 난센스다. 붉은색의 실현 과정에 있는 하나의 요소이다. 자연의 실재들이란 자연에 있어서의 여러 파악태, 즉 자연에 있어서의 여러 사건들인 것이다. ……내가 이 말(파악)을 끌어들였던 것은 한 사건의 본질적 통일성, 즉 여러 부분이나 여러 구성 요소의 단순한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의 사건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131쪽)
산에 자주 다닌다. 산에 오를 때마다 매번 쉬어가는 장소에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다. 신기한 건 그 나무가 매번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태양을 향해 자신의 몸을 쫙 펼치려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힘이 빠진 채 가지를 축 늘여뜨리기도 한다. 따스한 봄날에는 꽃봉우리에서 꽃이 막 터져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 나무를 만나며 시시각각 달리 얻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무의 변화를 광합성 과정의 그래프, 잎의 삼투압 공식 등등 과학의 추상적 개념으로 따져보고 나면 이런 감흥은 싹 사라진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왜 이렇게 자연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까?’, ‘과학은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의 특이한 모습들은 고려조차 안하는 건가?’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자연의 특이하고 생생한 모습을 과학이 포착해내면 안 되는가?’ 그 느낌 아니까~
르네 마그리트, 「지식의 나무」, 1929
화이트헤드 역시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과학의 추상적 개념을 통해 자연을 무미건조한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과학에서는 매순간 변하는 나무의 특이성을 모두 제거한 채, 불변하는 나무의 속성들로만 추상적인 나무를 구성해내지 않던가. 단지 잎, 줄기, 뿌리가 있고 광합성을 하는 일반적인 종으로 말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과학개념은 자연을 시간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만들어졌다. 나무는 시간도 흐르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어떤 추상적 공간에 외로이 박제되어 있었다. 왠지 소독약 냄새와 알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과학적 감각으로는 나무와 마주했던 느낌은커녕 그 질적 특이성에 대한 감각을 못 가질 수밖에. 과학적 감각이 너무 협소한 거 아닌가.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의 협소함을 반드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과학에게 근본적으로 새롭고 근사한 세계관을 제시하는 일이며 과학과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첫 시작은 바로 자연을 시간의 흐름과 결부된 존재로 파악하는 일이었다.
나무는 시시각각 변한다. 단풍이 들거나, 가지만 앙상하거나 잎이 무성하거나. 이런 변화를 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무가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하는 것 같지 않은가?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자연은 언제나 운동한다. 만약 나무가 운동하지 않는다면 땅 속에서 영양분과 물을 흡수할 수도 없고 그 물을 잎으로 올려 보낼 수도 없다. 아예 살 수 없다. 나무가 먼저 존재하고 시간에 흐름에 따라 운동하는 게 아니라, 운동해서 나무인 것이다. 바로 운동 과정 자체가 나무라는 존재이다. 과정이 자연의 실재인 거다. 이러한 세계상 속에서 스케일 크고, 근사한 자연이 펼쳐진다.
운동과정이 곧 존재지만, 그 양상은 각기 다르다. 봄날에 막 싹을 틔우려는 나무와 겨울에 가지만 앙상한 나무의 운동 양상(속도)은 분명히 다르다. 봄의 나무가 훨씬 겨울의 나무보다는 왕성한 활동력을 가지고 약동한다. 이러한 운동의 양상 혹은 운동의 속도에 따라 나무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질적으로 다른 양상의 나무를 어느 시점의 특이성을 지닌 나무를 본다. 이렇게 운동과정으로서의 존재하는 나무는 매순간 다른 나무의 특이성들을 한 몸에 품으며 복합체로서 지속한다. 꽃이 피거나 가지만 앙상하거나 잎이 무성하거나 등등, 이런 특수한 양상들의 연쇄, 이것이 나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무는 돌, 흙, 물, 다른 나무들 등등 주변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는 복합체이다. 나무의 운동과정 속에는 이것들마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과정으로서의 나무는 어떤 특정한 시공간의 양상들을 모두 품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무=과정’라는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느낌 팍팍 오는 특정한 시공간의 나무를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이 전체적인 과정을 떠나서 나무를 파악할 수 없다. 일례로 우리가 언제 시간 흐름 속에서 동떨어진 나무와 만났던 적이 있단 말인가. 지속의 과정 속에 포함되지 않는 나무란 추상적 개념일 뿐, 그러한 나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겨울나무와 파란 이파리로 만개할 여름나무 사이에 있는 어느 봄날의 나무를 만날 뿐이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에게 자연을 지각한다는 것은 전체성 속에서 특이한 존재로 드러나는 것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과정 전체 속에서 다른 운동양상으로 드러나는 나무들의 질적 특이성, 시시각각 변모하는 모습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질적 특성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정적 존재로서 나무와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생생한 자연의 객관적 모습이다. 싹이 움트고, 냇물이 흐르고,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느낌과 힘, 그리고 이들의 질적 특이성들을 과학에서 다룬다고 하면, 정말 근사하지 않을까.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새로운 세계관은 새롭고 풍부한 시각을 지닌 과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바람대로라면 우리는 자연을 단지 시적 은유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언어로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철현(남산강학원)
추상과 구체 사이를 '운동'하는 방식으로서의 "과학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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