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않고 배운다
지난 달 아이들과 부여에 갔다. 나에게도 애들에게도 백제는 낯선 나라다. 신라나 고구려보다 왠지 왜소하다는 통념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간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예상보다 훨씬 웅장하다. 층마다 하늘로 향한 지붕 끝이 중력을 거스르려는 듯 경쾌하다. 부소산성(옛 사비성)의 숲길은 한 순간에 번잡한 세계를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낙화암에서 올라 탄 금강 뱃길은 한없이 흘러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귀 기울이면 금동대향로 첩첩 산길에서 울렸음직한 거문고 소리도 들릴 것 같다. 부여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고대적이다.
신동엽 생가도 여기에 있었다. 시험공부 때문에 제목 정도나 암기했던 그 시인이다.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는 뭔가 뜨겁다. 하지만 노을과 뒤엉킨 생가는 좀 적적해 보인다. 시와는 반대로 ‘껍데기’만 뎅그러니 서있는 듯하다. 그런데 생가 뒤편에 신동엽의 시 구절들로 만든 설치미술 작품이 서 있다. 하늘 위로 시어(詩語)들이 날아간다. 그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보면 세계가 실로 시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다. 어쩌면 신동엽은 아사달과 아사녀, 동학과 사월혁명만 남기고 나머지 껍데기들을 시어로 날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대 백제는 껍데기를 날려버린 신동엽의 현대시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신동엽의 시는 현대의 고대시다.
이걸 보노라니 생각나는 사람이 연암이다. 연암이야말로 껍데기는 가라고 말했던 문장가였다. 그가 유머러스하다고해서 그저 두루뭉술하다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문장에 대해 논하고 평하는 장면들은 예리하기 그지없다. 알맹이만 남기고 껍데기를 날려버린다.
알맹이만 남기고 껍데기를 날려버리는 연암의 예리한 문장들!
속 빈 강정은 가라
연암의 <순패서(旬牌序)>를 보면 소천암이 그에게 찾아가 했다는 강정 이야기가 나온다. 강정은 찹쌀가루를 술로 반죽해서 그늘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 만든다. 꿀이나 고물이 묻혀 있어 모양도 예쁘고 맛도 좋다. 주전부리에는 딱이다. 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더군다나 잘 부서져서 훅 불면 눈처럼 잘 날아가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있는 과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모습은 예쁘지만 속이 텅 빈 것을 ‘속 빈 강정’이라고 놀린다. 반면 개암과 밤, 찹쌀과 멥쌀은 그 반대다. 겉모습은 아무래도 강정보다 못하다.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하찮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강정과 달리 속이 꽉 차 있어서 먹으면 배가 부르다. 더군다나 제사지낼 때도, 큰 손님이 왔을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소천암은 글도 밤, 개암처럼 써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말하자면 ‘밤 같이 알찬 문장’이다. 이를 듣고 연암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는 말은 믿지 않을 수 없지만, 한(漢) 나라 때의 장수 이광(李廣)이 쏜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끝내 의문을 남긴다네. 왜냐하면 꿈이라는 것은 직접 보기 어려운 것이고, 반면에 실제로 눈앞에 일어난 일은 징험하기가 쉽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그대는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조사하고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집하였으므로, 평범한 남녀들의 가벼운 웃음거리와 일상적인 생활사들이 어느 것 하나 눈앞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눈이 시도록 보고 귀로 실컷 들어서 성단용노(城旦庸奴)라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들이네. 그렇기는 하지만 묵은 장(醬)이라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입맛이 새로워지듯, 늘 보던 것도 장소가 달라지면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달라지는 법이지.(恒情殊境 心目俱遷).
-박지원, <연암집-순패서(旬牌序)>
한나라 이광이라는 사람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호랑이가 웅크려 있기에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봤더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다. 장주가 나비가 되었다고 한 말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꿈 속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이광이 바위를 쏜 것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소천암의 글은 우리나라 민요와 민속, 방언들을 기록해 둔 글이다. 우리 바로 곁에서 일어난 일이다. 너무 평범한 일이어서 일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야말로 담백한 사실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암은 소천암의 글들은 이광의 화살과 같다고 말한다.
화살같은 글만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너무 평범해서 자칫 질려버릴 수 있다. 매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화자는 매번 안전한 말만 하게 된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것이다. 아마 처음엔 새로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똑같이 반복하다보니 갈수록 답답해진다. 그래서 글들에 ‘우근진(右勤陳=다음과 같이 삼가 아뢴다)’, ‘왈약계고(曰若稽考=옛날에 상고하건대)’, ‘여시아문(如是我聞=나는 이렇게 들었다)’ 같은 숱한 투식(套式)이 남발된다(박지원, <연암집-영대정승묵 자서(映帶亭승墨 自序)>).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전부 남들이 보고 말한 것만 인용하기 급급하다. 속 빈 강정, ‘우근진’으로 가득 찬 글들은 어느새 ‘묵은 장’이 되어 버렸다. 그저 그렇고 그런 맛이다. 맛이 없다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맛은 아니다. 매일 똑같은 반찬에 밥을 먹는 느낌이다. 속이 비어 버렸다.
경계가 달라지는 마음과 눈
그러면 어떻게 우근진, 왈약계고에서 벗어날까?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잠깐 연암이 소개한 재래도인의 말을 들어보자.
석양 아래 작은 돛단배가 갈대숲 속에 살짝 가리워지니, 사공과 어부가 모두 텁수룩한 수염에 구레나룻이 험상궂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건너 물가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곧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박지원, <연암집-순패서(旬牌序)>
육노망(陸魯望)은 당나라 때 시인으로 보리에 은거하면서 강호를 돌아다녔다고 해서 보리선생, 강호산인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재래도인은 유심히 보다보면 늘 보는 뱃사공과 어부도 당나라 시인 육노망으로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 시선의 경계가 달라지는 시점이다. 그 순간에 가면 마음과 눈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매일 보던 것들도 다르게 보인다. 험상궂은 사람들이 갑자기 당나라 시인 육노망처럼 보인다. 그래서 뱃사공과 어부가 석양 무렵 강호를 떠도는 시인이 된다. 대상의 극적인 전환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갈대숲과 물결이 일순간 새로워진다. 저 시인은 도대체 무슨 사념에 잠겨 있는 걸까? 이제 모든 것이 시인들의 움직임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렇게 보인다. 마음과 눈은 동시에 일순간 바뀐다.
이런 마음과 눈으로 쓴 연암의 짧은 글이 있다. 어떤 사람이 ‘남(南)’이라는 글자를 쓰는 장면이 정말 생생하다.
정옹은 술이 거나해질수록 붓이 더욱 굳세어졌었지요. 그 큰 점은 마치 공만 하였고, 먹물은 날리어 왼쪽 뺨으로 떨어지곤 했더랍니다. ‘남(南)’자를 쓰다가 오른쪽 내려 긋는 획이 종이 밖으로 나가 방석을 지나자, 붓을 던지더니만 씩 웃고는 유유히 용호를 향해 떠나갑디다.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박지원, <연암집-답창애지구(答蒼厓之九)>
이 글은 한자로 42자에 불과하다. 오른쪽으로 내려 긋는 획을 설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획 그 자체다. 아마 영화도 이렇게 표현 못할 것이다. 언어가 갖는 역량이 최고치로 발현되었다. 영화나 음악 같은 매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계’에 도달하였다. 오로지 언어의 마음과 눈이다. 그림으로는 느낄 수 없는 느낌이다. “종이 밖으로 나가 방석을 지나는 획”과 “유유히 용호를 향해 떠나는 정옹” 사이에는 그림으로 절대 표현 못하는 정감이 있다. 그는 종이를 넘어서는 획처럼 세상을 떠난다. 거기에는 그림으로는 절대 표현될 수 없는 무한한 장면들이 한 순간에 오버랩되어 있다. 정옹의 장대한 캘리그라피(calligraphy=서법), 정옹의 취기어린 행동, 옆으로 튀긴 먹물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유유히 떠나는 자의 해탈이 글 사이로 이리 저리 솟아난다. 그것들은 그림이나 음악으로 환원 불가능한 글만의 고유한 표현 역량이다. 연암은 글 고유의 역량, 즉 글만 갖고 있는 경지, 경계를 포착한 것이다.
연암이 말하는 문장의 진맛은 무엇일까?
배우지 않고 배운다
그럼 그런 경계에 어떻게 이르는가? 연암은 재미있는 말을 한다.
무턱대고 배우지는 아니하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여긴 것은 혼자 살던 노(魯) 나라의 남자요, 아궁이를 늘려 아궁이를 줄인 계략을 이어 받은 것은 변통할 줄 안 우승경(虞升卿)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비록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들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물(靈物)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버섯이 무럭무럭 자라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박지원, <연암집-초정집서(楚亭集序)>
옛글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도 아니고, 또 그저 신기하게 쓰는 것도 아니다. ‘법고(法古)’만해도 안 되고, ‘창신(創新)’만해도 안 된다. 그렇다고 법고와 창신을 어정쩡하게 섞으라는 소리도 아니다. 여기서 연암이 제시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고 배운다”이다. 배우지 않으니 법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배우게 되는 것이므로 법고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법고하지 않으면서 법고한다. 하지만 그것은 장구한, 다시 말하면 전혀 변함없는 하늘과 땅, 해와 달에서 새로운 것을 내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니므로 창신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기어이 새로운 것을 내니 창신이다. 다시 정리하면 창신하지 않으면서 창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지 않고 배운다”는 말은 법고하지 않으면서 법고하고, 창신하지 않으면서 창신하는 것이다.
연암은 이를 우승경과 어떤 노나라 남자로부터 찾아낸다. 손빈은 제나라 사람들을 겁이 많다고 생각하는 위나라 사람들의 통념을 역이용한다. 아궁이수 줄이는 시늉을 하여 제나라 군사들이 도망간 것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후한의 우승경은 이를 뒤집는다. 즉 오랑캐에게는 위나라 사람들과 통념이 달랐다. 그래서 거꾸로 아궁이를 늘려 후한의 원군이 더 늘어나는 듯이 보이게 하였다. 따라서 우승경은 손빈의 작전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지만, 상대의 통념을 뒤집어 싸운다는 손빈의 뜻은 따랐다. 배우지 않았지만 배운 것이다. 바로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이다.
또 노나라 남자 이야기다. 옆집 과부가 집이 무너져서 자기 집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60세 이전에는 남녀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유하혜는 성인이라 능히 여인을 재워주고 스스로를 보존하였지만, 자신(노나라 남자)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유하혜와는 다른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행동 면에서는 새로운 것이지만, 유하혜가 추구했던 절개를 자신도 지켰기 때문에 유하혜와 그 뜻에서 다를 바 없다. 이 노총각은 유하혜를 배우지 않으면서 배웠다. 바로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다.
통념을 뒤집는 한 장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요컨대 법고창신은 통념을 뒤집는 것으로 옛 것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법고이지변’)이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 대한 긍정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부정의 정신을 길어내는 것(‘창신이능전’)이다. 법고창신은 통념이라는 껍데기, 일편향적인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다. 그것은 긍정하는 방식으로 부정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긍정한다. 긍정의 끝에서, 부정의 끝에서 솟아난 절묘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 밤 같이 알찬 문장이 나오고, 정옹의 종이를 넘어서는 획이 그어지고, 우승경의 묘책이 구사되고, 유하혜의 절개가 지켜진다. 그러고 보니 백제의 금동대향로도, 정림사지 오층석탑도, 신동엽의 시어들도 모두, 껍데기가 사라져버린 자리에서 솟아난 절묘한 순간들이다. 고대 석탑의 지붕이 햇빛과 부딪히는 순간, 아사달과 아사녀가 맞절하는 순간, 동학군이 진군하는 순간, 4월 시위대가 광장을 달리던 순간, 금동대향로의 산속에 거문고가 울려퍼지던 순간, 순간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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