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덩이의 순환
작년 여름 다시 시작한 육식 때문에 몸이 많이 무거워졌다. 평소 즐기던 달리기 중에 복통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에 몸을 좀 가볍게 만들었다. 살이 빠지고, 음식을 조절하기 시작하자 생각도 많이 가벼워진 것 같다. 그리고 전과는 좀 다른 감각도 생겼다. 체중이 빠질 때, 몸무게가 줄어든 다기 보다, “살”이 공기 중에 흩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살덩이가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것 같았다. 정말 살이 “빠져 나갔다”. 혹시 음식이란 살을 찌우는 수단이 아니라, 공기 중에 있는 “살”을 옮겨오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것이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들을 공간적으로 이동시키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살들이 이리 저리 움직여 다니는 꿈도 꿨다. 참 기묘한 상상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상상은 그림 그리기와 같은 것이다. 붓을 들고 팔레트에 있는 물감을 찍어 하얀 캔버스에 옮겨 놓는 행위란 음식을 통해서 공기 중의 “살”을 나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내 살이나 뼈 따위들이 그저 공기 중에 있는 것들의 이합집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영화 <터미네이터2>의 T-1000과 같은지 모른다. 액체금속으로 만들어진 T-1000은 다 녹아내렸다가 다시 형태를 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친구는 매번 자신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화가이다. 따라서 내 신체 구조를 바꾸는 것은 화가의 그림 그리기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지 모른다.
신체는 카오스에서 솟아났다
이런 생각을 실제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은 베이컨(Frnacis Bacon)이다. 또 이를 언어(『감각의 논리』)로 개념화한 사람은 들뢰즈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철학과 예술은 사유의 다른 표현형식이다. 철학이 개념을 통해서 ‘내재성의 평면’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감각을 통해서 그것을 한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다. 다만 철학만이 그 감각을 개념화할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을 가질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베이컨 뿐 아니라, 프루스트, 카프카, 영화, 음악 같은 것들을 개념화하는 작업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학과 예술은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카오스이다. 사유되기 이전의 세계, 다시 말하면 철학적으로 개념화되기 전의 세계, 감각적으로 구현되기 이전의 세계로서 카오스의 세계이다. 예술은 이 무한한 카오스의 세계를 유한한 작품 속에 표현하고자 한다. 카오스를 코스모스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그림1 <루시안 프로이트의 초상 연구(측면) Study of a Portrait of Lucian Freud Sideways, 1971>
베이컨은 이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림을 형상(figure), 윤곽(contour), 아플라(aplat)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한다. 그림1(<루시앙 프로이트 초상 연구>)에서 중앙에 있는 사람 모습이 첫 번째 요소인 이른바 ‘형상’이다. 그러나 이 형상은 우리들 머릿속에 흔히 재현되는 그런 일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얼굴은 심하게 뭉개져 있고, 몸체는 이상하게 비틀어져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주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베이컨의 전략적 표현 방식이다. 이것은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에 어떤 감각이 발생하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다. 따라서 당연히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다. 그런데 이 형상은 그림의 두 번째 요소인 ‘윤곽’ 위에서만 그려진다. 이미 일상적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예견된 사실이지만, 베이컨에게 있어서 그림은 서술적 재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은 어떤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 아니다. 베이컨은 이런 서술적 그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형상을 일정한 윤곽 안에 가둔다. 그래서 그림1의 형상은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은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성격을 피하기 위해서이다(『감각의 논리』 12p). 이런 격리는 재현과 단절하고, “일어난 일에만 매달리는 방식”(『감각의 논리』 13p), “모든 관객을 배제한 신체들의 극단적인 밀폐”(『감각의 논리』 25p), 즉 감각의 발생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상을 온갖 이야기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방안이다. 이제 세 번째 요소인 아플라. 이것은 윤곽 바깥에 단일한 색으로 평평하게 처리한 부분을 말한다. 여기서 베이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그 회화는 아마 일종의 구조화된 회화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말하자면 이미지들이 살로된 강으로부터 솟아날 것입니다. … 그건 마치 그들의 일상적인 순회를 하는 특정인들의 이미지가 살로 된 웅덩이로부터 솟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자기들의 중절모나 우산과 함께 자기 자신들의 살로부터 솟아나는 형상들을 만들어서, 이 형상들을 가지고 십자가형만큼이나 찌르는 듯한 형상들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각의 논리』, 16p, 주석5, 베이컨 인터뷰
요컨대, 윤곽 바깥의 단일 색조는 살로 된 강, 살로 된 웅덩이이다. 들뢰즈 자신의 존재론에 맞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잠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형상은 ‘현실적인 것’, 즉 존재자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플라와 형상은 존재와 존재자의 베이컨적 버전이다. 앞에서 내가 말했던 그 느낌, 즉 공기 중에 있는 살들(잠재적인 것)이 가시적인 신체(현실적인 것)로 구성되는 상상은 그냥 상상만이 아닌 것이다. 나는 살들의 강(존재)으로부터 솟아난 자(존재자)이다.
또 형상을 감각으로 치환한다면, 그림은 감각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카오스적 힘을 주체가 형성되기 전에, 사유되기 전에 포착하고자 한다. 그것이 성공적이라면 그림은 정말 감각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그림이란 살덩이들이 구성되는 그 현장, 어떤 서사에도 의존하지 않는 그 현장에서 어떤 힘의 꿈틀거림일게 분명한 그 형상 X를 포착함으로써 감각을 발생(=창조)시키는 작업이다.
신체는 다시 빠져나가려 한다
그런데, 신체가 아플라로부터 솟아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형상은 자신으로부터 물질적 구조인 아플라로 향해 빠져 나가기도 한다. 그림2(<세면대에 서 있는 형상>)에서, 세면대의 타원형에 매달려서 배수구 구멍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신체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빠져 나가기 위해 용쓴다. 들뢰즈는 이런 노력이 “나의 자아”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림2 <세면대에 서 있는 형상 Figure at a washbasin, 1976>
처음부터 형상은 신체이고 그 신체는 동그라미 안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신체는 구조로부터 무언가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도 무언가를 기다린다. 이제 바로 이 신체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는 움직임의 근원이다...엄밀히 말해 신체는 빠져나기기 위해 용쓰거나 기다린다. 내 신체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신체 스스로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 한마디로 일종의 경련이다.
─『감각의 논리』, 25~26p
카오스 속의 어떤 힘을 포착한 것이 형상이었다면, 그 형상은 다시 어떤 구멍-세면대 구멍, 교황의 입(그림3<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을 통해 다시 그 형상을 빠져 나와 아플라로 되돌아가려한다. 그것은 교황의 외침과 같은 히스테리이다.
그림3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 Study after Vela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
결국 그림 속의 운동인, 신체의 운동은 구조로부터 형상이 솟아나는 운동과, 형상으로부터 구조로 빠져 나가는 운동이 있다. 사실 이 두 가지 운동은 구분 불가능하다. 들뢰즈는 그림4(<회화>)를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체를 쥐어짜는 수축은 구조로부터 형상으로 향하고, 신체를 펼치고 흩뜨리는 팽창 운동은 형상으로부터 구조로 향한다. 그러나 신체가 더욱더 잘 갇히기 위하여 늘어날 때 이미 팽창은 수축 속에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신체가 사라지기 위해 수축될 때에 이미 수축은 팽창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신체가 사라질 때에도 신체는 자신을 주변으로 보내기 위해 그를 잡아 문 힘들에 의해 수축되어 있다. 그림 속에서의 이러한 모든 움직임들의 공존, 그것은 바로 리듬이다.
─『감각의 논리』, 45p
그림4 <회화 Painting 1978>
그림4는 묘한 모습이다. 문에 박힌 오렌지색 윤곽은 앞서 말했다시피 형상을 가두는 장치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신체가 더 잘 갇히기 위해, 즉 윤곽 속에 들어가기 위해 발끝은 문 쪽 구멍으로 늘어나고 있다. 사실 늘어난다는 것(=팽창)은 형상이 구조(아플라) 쪽으로 운동할 때의 형태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늘어나는 것이 오렌지색 윤곽에 갇히는 것과 동시적이다. 팽창하면서 수축되고 있는 셈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신체가 문 쪽 구멍으로 사라지기 위해 형상은 수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윤곽에 더욱 갇힐 뿐이다. 다시 말하면 수축-팽창이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이 그림4에서는 신체로 솟아나는 것과 신체가 사라지는 것은 구분불가능하다.
이 사실은 존재와 존재자가 같은 평면에서 구분불가능하게 뒤엉켜 있다는 말과도 같다. 무엇이 존재이고 무엇이 존재자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분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공존한다. 또 엄밀히 말하면 어떤 운동이든 존재가 존재자로 솟아나고, 존재자가 존재로 되돌가는 운동을 양면적으로 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이중의 운동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세계, 바로 그것이 사유 이전의 세계이며, 예술이 표현해야 할 그 세계인 것이다.
그림5 <회화 Painting 1946>
살덩이들은 살들의 강에서 솟아나고, 다시 살들의 강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삶의 신비주의이다. 그렇지만 매우 실감나는 신비주의이다. 훗날 베이컨은 삼면화를 통해서 긍정운동을 추가함으로써, 영원회귀를 구현해낸다. 그야말로 살덩이들의 거대하고 무한한 순환이다. 그 바깥은 없다. 오로지 살덩이들이 수축하며 솟아나서 생이 만들어지고, 다시 팽창하여 분산되며 그 강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수축하고, 또 팽창하기를 거듭하는 장(場)만 있을 뿐이다. 오로지 그 살덩이들이, 그 고기들이 순환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베이컨이 말한 “고통 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같은 책, 34p, 그림5)라는 말이 이해된다. 동시에 “화가는 도살자이다”(같은 책 34p)라는 들뢰즈의 말도 분명해진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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