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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별자리서당

탄생과 건강의 별, 생명의 별! 두수(斗宿)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6. 13.

은하수의 물을 길어 올려라
생명의 별 두수



은하수의 강물은 어디서 샘 솟는가



어느덧 하지(夏至)가 가까워오고 있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지는 때, 양기가 최고조에 달하여 만물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오르는 때, 바야흐로 태양의 전성시대다. 태양이 방사하는 생성의 기운에 힘입어 만물은 성장의 국면에 접어든다. 누가 뭐래도 이 시기의 주인공은 단연, 태양이다. 그렇다면 태양이 저물고 난 밤하늘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게 될까? 지표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시간, 왕성하게 펼쳐진 초목의 잎들이 잠시 그 맹렬한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시간. 그대, 여름 밤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는가?

여름 하늘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은하수다. 무수히 늘어선 별들의 무리가 눈부신 강물처럼 부서지는 하늘 위의 강물. 낮에 끓는 열기가 대지를 뒤덮었다면, 밤에는 은하수의 강물이 하늘을 뒤덮는다. 은하수가 시작되는 길목 어귀엔 여름 하늘의 주재자 북현무의 별자리들이 포진해 있다. 낮에 남방의 화(火) 기운이 세상을 주름잡았다면, 밤에는 북방 수(水) 기운의 주재자인 북현무의 별자리들이 하늘을 장악하는 셈이다.

그중 북방 현무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두수(斗宿)다. 두수는 남쪽 하늘 나지막한 곳에 자리해 있다. 그렇기에 서울 하늘에서는 어지간해선 만나기 어렵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이 별을 만나게 된다면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되리라. 두수의 자리는 은하수가 샘솟아 오르는 발원지와도 같다. 깊은 샘터에서 전해오는 영명한 기운이, 이 별에서 전해져 온다.



생명의 약동을 담은 별자리

(斗)는 곡식을 계량하는 도구인 ‘말’을 칭하는 글자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두수란 곡식을 재는 됫박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넓적한 바가지에 긴 손잡이가 달린 모습, 우리에게 익숙한 북두칠성과 닮은꼴이다. 그런데 별의 개수는 여섯 개다. 이를 북두칠성과 구분하기 위해 남두육성(南斗六星)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두성은 은하수의 강물을 퍼 올리는 바가지이다. 두성은 하지(夏至)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였다. “하지가 지나면 구들장마다 비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듯이, 두성이 나타나는 시점이 되면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들었다고 한다.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하지 무렵 내리는 비는, 논물을 채우는 데 쓰이는 긴요한 생명수였다. 따라서 두성이 뜰 무렵, 농부들은 저 하늘의 두수를 향해 기원했던 것이다. 넓은 바가지 하나 가득, 은하수의 강물을 퍼다가 세상에 비를 뿌려주기를!

동양의 점성학에서 두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두수의 다른 이름은 천기(天機), ‘하늘의 기틀’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심장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수의 여섯 별 사이로 해와 달과 오성이 지나기 때문이었다. 두수의 자리는 천체가 지나는 바른 길목이므로, 이 별은 정치의 안정, 특히 재상의 어짊을 점치는 데 소요되었다.


천자의 일에 있어서 남두로써 점을 칠 때에 크게 밝으면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이 되고, 천하가 화평해지며, 벼슬과 녹봉이 제대로 행해지나, 별빛에 까끄라기가 일면서 뿔처럼 솟고 움직이며 흔들리면, 천자에게 근심이 생기며, 또한 병란이 일어난다. 또 자리를 옮기면 신하를 쫒아내게 되고, 일월과 오성이 거꾸로 들어오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 패성이 범하면 병란이 일어나고, 작고 어두우면 재상을 폐하고 결국 죽이게 된다.


─ [이순지, 천문류초, 111쪽]


위의 글은 천문류초에 실린 두수의 해석이다. 임금과 신하, 정치의 안정과 병란까지! 두수는 그야말로 국운(國運)을 총체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점성학의 대박 아이콘이었다.



죽음의 됫박, 생명의 됫박

그밖에도, 두수는 탄생을 주관하는 별로 유명하다. 일전에 우리는 북두칠성의 점성학적 의미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오행으로 북쪽은 수에 해당하여 만물이 죽어가는 겨울에 상응한다. 북쪽 하늘에 붙박힌 영원의 별, 북두칠성은 하늘을 순행하면서 세상의 소멸과 죽음을 관장한다. 민간에서 북두칠성은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별이라 믿어져 왔다. 그렇기에 망자를 매장하는 칠성판에 북두칠성 무늬를 그려 넣었더랬다. (이에 대해서는 「북두칠성, 영원의 시계바늘」 편 참조)

이번엔 반대로 북두칠성의 자루 끝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따라가 보자. 그러면 또 다른 됫박이 나온다. 그것이 남두육성. 남쪽은 화요, 만물이 성장하는 여름에 상응한다. 여름 중에서도 양기가 극에 이른 하지 무렵에 떠오르는 별답게, 두성은 생명의 기운을 주재한다. 민간에서도 두성은 탄생과 건강을 주재하는 별로 알려져 왔다.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칠성과 탄생을 관장하는 남두육성은, 북극성이라는 하늘의 축을 가운데 두고 빙그르 밤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밤하늘에 두 개의 됫박(斗)이 있는데, 북쪽의 것(북두)은 죽음을 퍼 올리고, 남쪽의 것(남두)은 삶을 퍼 올리는 셈이다.


마치 남두육성이라는 국자가 생명수인 은하수의 물을 푸면 북두칠성이라는 국자가 이 물을 다시 쏟아 붓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 [강진원, 역으로 보는 동양천문 이야기, 212쪽]


풍차의 두 날개가 엇갈리듯이 남두와 북두의 됫박이 서로 엇갈려 돈다. 이렇듯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도 동시에 굴러간다. 엇갈려 반대로 정향된 채로, 이들은 하나다. 옛 사람들은 일찍이 알았으리라.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생이 있음으로 사가 있으며, 사는 다시금 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삶이란 곧 생과 사가 동시에 함께 하는 총체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우리라면 탄생의 별을 기리고 죽음의 별을 배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달랐다. 남쪽을 향해 빌고, 북쪽을 향해 빌었다. 탄생을 기리고, 죽음을 축원했다. 생과 사가 곧, 하나의 다른 두 얼굴임을 이해했다. 이때 우주의 운행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죽음이란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되는 순환의 흐름 가운데 다시,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자연엔 죽음이란 없다!
 
오히려 진정한 죽음이란 인간이 자아내는 분별의 산물이다. 생과 사의 상호 연결된 흐름을 하나로 고정시키는 순간, 생을 추구하고 사를 멀리하는 순간, 생과 사는 모두 우리에게 죽음으로 찾아온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무엇에 애착을 두며, 또한 무엇을 미워하고 있는가. 하늘을 보고 삶을 알며, 별을 보고 인간을 이해했던 옛 사람들의 지혜에 귀 기울여 보자.



달군(남산강학원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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