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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훈련하기

by 북드라망 2024. 7. 24.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훈련하기


질문자1: 저보다 좀 어린 친구에게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전보다도 훨씬 더 민감하고 불편하고 서운하게 느껴져요.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때 바로 알아차렸는데, 제가 감정을 계속 붙잡고 있는 거예요. 서운하다 서운하다. 그런 감정들이 좀 몇 달 지속이 되어서 여쭤보고 싶었어요.

 

 


정화스님: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 아주 잘 만드셨어요. (하하하) 그것이 만들어지면 절대 만족스러운, 서운하지 않은 상황이 올 수가 없어요. 서운한 것은 서운한 일만 하는 거예요. 그 서운한 감정은 서운한 감정만 가지고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표면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 온갖 게 다 서운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서운함을 풀어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서운한 게 일을 하는 거예요. 이전까지는 이것이 서운하지 않았는데, 딱 서운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건을 서운하게 해석하는 심리적 코드가 하나 심어져 버린 거예요. 이 일이 서운한 게 아니고. 그래서 서운하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잘 성찰하고, 살피지 않는다면 이 사건을 서운하게 보는 훈련을 계속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제 아까 말한 것, 어린애니 아니니 이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면은 서운하게 해석할 준비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한번 서운하면 다음 찰나는 이제 한번 서운했으니까, 서운할 수 있는 기억의 패턴이 생기는 거예요. 이 패턴이 두 번 오면은 강해지고, 지금 벌써 몇 달 되었으면 서운한 패턴이 강해진 거예요. 사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스스로 ‘아, 내가 내재적으로 이런 패턴을 만들어 놓고, 나 스스로를 괴롭히려고 지금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이렇게 빨리 알아차리시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 외에는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오는가 하고 상관없어요. 이것이 안 서운하면 이것이 서운하게 돼요. 그래서 인제 서운한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를 잘 아셨을 테니까 일어날 때마다 다른 것으로 패턴 전환을 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패턴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야만 거기서 작용하는 기억의 조각들이 다른 식으로 작동해야만 그것이 조금 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지금은 그전까지 없었던 괴로울 준비가 하나 더 된 거지요. 힘드시겠어요.


질문자1: 그런데 궁금한데 왜 갑자기 이런 감정들이, 그런 생각이 한동안 드냐는 거에요. 그전에는 뭐 그러거나 말거나 했는데.

정화스님: 왜냐하면 서운한 것은 드러난 감정이죠, 서운함을 만드는 과정은 무의식인데, 이 무의식은 거의 다 아무도 몰라요. 왜 그것이 그렇게 발생했는지 본인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몰라요. 드러난 것만 우리는 인지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무의식은 그냥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예요. 스스로 알아서 서운한 감정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안 만들어집시다’라고 말해봤자 말을 안 들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패턴들도 자기가 살려고 끊임없이 일을 해요. 즉 무의식도 살려고 일을 하는 거예요. 의식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순간에 내가 무엇에, 어떤 것으로 주의가 기울어졌나 하는 차이일 뿐이죠. 그전에는 서운한 감정을 만드는 패턴의 힘도 약했고, 다른 심리적이나 신체적 조건에 의해서 의식의 주의를 끌어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 의식 무의식의 조건들이, 또 신체적 조건들이 조금만 서운해도 의식을 끌어오는 힘이 세 진거죠. 그전에도 그런 걸(서운함) 다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전에는 주의를 끌어 오는 다른 것이 강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냥 흘러갔는데, 지금 갑자기 어느 순간에 서운한 감정으로 주의를 끌어오는, 의식하여 여기를 보라고 하는 것이 커질 뿐이에요. 그래서 ‘아~ 서운한 감정을 알아달라고 지가 그러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가야지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없어요.

 


질문자2: 저는 생각하는 거랑 감정이랑 어떤 식이냐면요, 누가 저한테 나쁘게 했어요. 그러면 생각으로는 ‘뭐 그럴 수도 있지’가 되는데 감정에서 기분 나쁜 게 오래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자려고 누웠을 때나 혼자 샤워할 때 갑자기 화가 나는? 머리로는 ‘그럴 수도 있지’가 되는데 감정하고는 따로 노니까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질문드립니다.

 

 


정화스님: 예, 우선, 감정의 힘이 훨씬 세요, 본인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왜냐면 감정을 만들어 내는 편도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감정이 해석되는데, 이것이 한 2억 몇천 년 전에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신피질이 만들어져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 한 건 몇천 년 밖에 안 되었어요. 그러니까 같은 피질인데도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최소한 2억 몇천 년 전에 만들어 졌고, 우리 신피질 하는 것은 수천만 년 정도 전에 정리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힘 자체가 세요, 감정이. 그렇게 올라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이 감정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면 안 돼요. ‘내가 이런 감정이 올라와서 힘들어하고 있구나’ 여기까지는 내 잘못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까 말한 대로 서운한 감정이 하듯이, 편도체에서 주로 ‘이렇게 들어온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시오’하고 감정에 대한 신호를 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안에서 전전두엽이 발생해서 ‘야 니 말이 맞긴 한데, 그렇게 하면 곤란해져.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게 훨씬 힘이 약해요. 감정이 올라오는 것하고 그것을 이런저런 하고? 해 보려고 하는 것은 그것하고 다투고 있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요. 나의 잘못이 전혀 아니에요. 거기에 대해서 잘했다 할 것도 없고. ‘아 이런 정도구나’라고 자꾸 이야기를 해 주면, 이제 감정이 그것을 해석할 때 아까처럼 해석을 안 할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겨갈 뿐이에요.

다음에 두 번째는 이제, 사람한테는 그것만 생기는 게 아니고, 예를 들면 아픈 것하고 싫은 것하고 미운 것하고 이런 감정이 있잖아요. 근데 아픈 것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분리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아픈 것만 있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안 올 수도 있는 거예요. 늦게 생긴 것 들은 훈련을 하면 내가 그 감정으로부터 그냥 ‘아 아픈 것이 생겼네’하고 미워하는 감정이나 아까 말한 서운한 감정으로 안 가도록 자기를 분리시킬 수 있는 뇌가 굉장히 늦게 생겼어요. 그 훈련을 하면 감정을 통해서 감정과 해석과 하나하나 껍질을 분리하듯이 분리할 수가 있어요. 굉장히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오랜 훈련을 통해서 되는 사람도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안된다고 해서 ‘나는 왜 안돼’ 이렇게 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될 수는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이 아까 말한 대로 내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신체가 전혀 아니기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다만, 아까 분리된 것처럼 했잖아요. 거기서 조금만 더 분리시키면 이 두 가지 자체를 또다시 자기가 그냥 밖에서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어요. 거기다가 좋고 나쁘다는 이미지를 절대 개입하지 말고.

 


질문자3: 장애인 활동 보조 일이 너무 힘든데,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스님, 제가 알바로 장애인 활동 보조라는 걸 하고 있는데, 이 일이 일주일에 몇 번만 가면 되는 일이고,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을 돕고 바깥에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에요. 시작한 지 한 달 조금 되었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이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좋다. 그랬는데 이 친구가 좀 많이 아프거든요. 거의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친구인데, 일을 하다가 요즘에 제가 멘탈이 나갔어요.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게 또 뭐냐면 장애인 같은 친구들을 제가 받아들이기를 되게 어려워하는가 보다. 그 용변처리, 그 친구 설사하면 제가 완전히 멘탈이 나가거든요. 그거 한번 치우고 나면. 그런 걸 하면서, ‘내가 그런 거를, 그런 사람들을 되게 싫어하나? 나는 그런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는 없나?’ 이런 마음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런 타자들과 잘 만날 수 있을까요?

 



정화스님: 공감은 적당히 해야 해요. 그것이 많아지면, 요즘에 어떤 연예인이 악플로 돌아가셨죠. 여러분이 직접 악플을 보는 순간, 뇌에서 몽둥이로 욕을 얻어먹고 몽둥이로 맞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똑같이 활성화돼요. 그러니까 악플이 이해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신체에다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데 그런 걸 계속 맞으면, 젊은 애들이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점점점점 하다가 그 힘이 커지면, 생각만 해도 두들겨 맞는 것하고 똑같은 부위가 켜져 버려요.

장애인을 돌볼 때 이 선을 안 넘도록 조심해야 해요. 그걸 넘고 그걸 내가 아픔으로 받아들여서 넘어가 버리면 내가 장애인 게 아닌데 신체가 실제로 아픈 상황처럼 만들어버려요. 그냥 대변을 치우는 일이 아니고, 대변을 치우는 일에다가 아까처럼 다른 상태를 받아서 마치 내가 그와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오버가 되도록 신체가 그렇게 돼 버리는 거예요. 이것을 잘 조율하지 못하면 시간을 줄이거나 날짜를 줄여야 해요. 그거 안 하면 다신 절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장애인을 돌볼 때 국가가 예산을 왕창 써서 방금처럼 시간을 훨씬 더 조율해야 해요. 이것은 그냥 사람은 알게 모르게 거기에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단순히 이해하는 정도를 넘어서 특정 부위에 아픔이 딱 온 순간 자기 몸도 아퍼져 버린다니까. 똑같아요 그냥. 그러니까 이것을 조율할 수 있는 힘을 자꾸 길러야 해요. 거긴 오버하면 안돼요.

그런데 위 같은 상황에서는 단순히 대변을 치우는 게 아니고, 거기에 대해 다른 어떤 감정 통로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면 자신이, 스스로가 스스로한테 비난할만한 일이 전혀 아닌데도 마치 비난받은 상처가 올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안 아파하는데 본인만 그렇게 아파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해서 잘못 공감된 것은 자신을 완벽하게 똑같이 아프게 만듭니다. 그 선을 안 넘도록 연습을 빨리해야 하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싫고,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시간과 횟수를 빨리 줄여야 합니다. 내가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줄여야 해요.

대체로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어해요. 그래서 정부는 다른 것보다 그런 분들을 감당하는 사람의 숫자를 훨씬 많이 늘려야 되고, 그다음엔 적은 일을 해도 상당히 살 수 있게 월급을 줘야 해요. 왜냐하면, 그건 단순히 대변을 치워주는 정도를 넘어서 다른 일까지 막 나한테 온 거예요. 그러니까 평범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정 상태가 아닐 확률이 엄청 높아요. 정신이(멘탈이) 나가고 지금 그런 것들은 내가 사건 자체를 받아들이는데, 안에서 통합된 인지가 안 일어나요.

통합된 인지가 안 일어나면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있느냐면, 히말라야에서 너무 힘들어서 터벅터벅 걸어오잖아요. 그럼 자기 가는 과정하고 발밑에서 오는 신호가 뇌에 가서 통합돼서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다고 느껴야 하는데, 이 두 개가 통합을 못 해요. 그래서 보는 것은 내가 보고 발밑에서 오는 감각은 뒤에 귀신이 따라온다고 해서, 실제 뒤에서 귀신이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요. 아까처럼 멘탈이 그런 상태가 되면 그런 상황으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스스로 조율해요. 안에서 통합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너무 지쳐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야, 1시간을 가서 일하는데 그렇게 힘드냐’가 아니에요. 그 과정에서 이미 히말라야 한번 갔다 온 것처럼 뇌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뇌가 평범하게 통합시켜서 일상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그냥 몽둥이로 맞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이건 누구라도 일어나는데 감성이 좀 센 사람은 그게 잘 일어나고, 저처럼 적은 사람은 잘 안 일어나고 하기도 해요. 그래서 특히 이런 건 여성분들이 좀 더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좀 더 많이 해요. 그래서 10대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을 모아 두 그룹을 만들어서 어른들이 그 애들이 살아온, 예를 들면 아까 말한 서양에서 보면, 기독교적 배열이 있는 어린애들인데, 전혀 다른 불교적 이미지를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그다음에 이쪽에 인제 불교적 배경을 살아오는데 아주 감수성이 한 15살 정도 되는 예민한, 뭘 잘 만드는 여성분들을 한 수십명 모아가지고 기독교의 이미지를 한 시간동안 말해주는 거예요. 둘이 앉아서 머릿속으로 그려보라고 그러면은 금방, 자기 살아온 환경하고 아무 상관 없이도 금방 그려버려. 불교에서 선한 천사가 바로 막 나오고 기독교에서 관세음보살이 막 나와. 머리가 그렇게 만들어버려. 그러듯이 그 상황에서 안에서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말한대로 이것은 좋은 의미로 오니까 힘이 안 들지만 방금처럼 그렇게 힘이 들게 오면, 금방 힘이 돼서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미지가 바로 만들어져버려요. 그것이 임계점을 딱 넘으면 멍하게 돼요.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냥 머리가 멍해져요. 그러니까 이건 빨리 시간을 조율해야 하고 횟수를 조율해야 해요. 아니면 지금 상태에선 감당 못 합니다.

질문자3: 그럼 스님처럼 감수성을 좀 덜, 감정이입이 덜 되는 훈련은 없나요?

정화스님: 저 같은 경우는 이걸 해석하는 부위의 힘이 약간 약한 모양이고, 그쪽은 좀 강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일어나면 ‘아, 내가 좀 오버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오버하고 있구나’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정리_감이당 일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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