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할 때의 마음
질문자1: 명상할 때의 마음 상태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세요.
정화스님: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하고, 마음이 자기가 경험하는 경험의 종자들을 가지고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심상을 만들어 내요. 그러면 내부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마치 꿈처럼 보이는 겁니다. 꿈은 의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보이는 상이고 명상은 의식된 상황이지만 의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에 있는 심상을 만들어 내는 초점들, TV의 점들 같은 것이 모여서 내부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점들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에서는 점들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한 통 속입니다. 그러다가 의식이 되면 점들은 이미지가 되고, 알아차리는 마음은 의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미지와 의식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같이 있어요. 무의식 층에서는 이 두 개가 구분이 안 됩니다. 점이면서 동시에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동시에 점입니다. 화면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점인데, 알아차리는 마음이면서 알아차릴 대상으로 아직은 대상이 안 나타난 상황입니다. 여기서 감각이 수용되면 이 점들이 움직여서 어떤 영상을 만들면 그 순간 쭈-욱 나가서 의식과 대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다 보면, 이것이 의식인지 심상이 전혀 관여 없이 이렇게 하고 있다면 이것이 전체 과정으로 아는 것처럼, 마치 의식이 두 개로 갈라진 것처럼 메타 인식이라고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을 잘 지켜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의지를 갖지 않으면 영상이 사라집니다. 계속 사라지다가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의식이 갑자기 뚝뚝 끊깁니다. 그럼 이 전체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한 번 일어나서 쑥 가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작용을 하고 있다,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니까 마음이 그 자체로 상속된 것입니다. 영상도 만들어지는 것이죠.
자기가 만든 심상에 쓸데없이 불편함을 집어넣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불편을 집어넣는 순간, 이 사건은 번뇌가 되는 거고 불편을 집어넣지 않으면 번뇌가 안 돼요.
많은 사건들을 그렇게, ‘이 사건은 이런 식으로 존재해야 된다.’라고 내가 선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거죠. 이 선 규정이 틀린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근데 그 틀린 것에다가 초점을 맞춰 놓고 ‘나는 이래야 된다.’라고 하니까 괴로워 하는 거지. 영상을 보고 있으면서 거기다가 불필요한 개념들을 집어넣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야.
앉아서 명상할 때는 이 픽셀의 어떤 부분들을 어떻게 빨리 영상에 집어넣을 것인가, (감정도 픽셀 중에 하나에요) 그것을 훈련하는 거예요. 아까 회사에서 벌어진 영상에다가 불편한 픽셀을 막 집어넣고 있는 거예요. 나가도 그만이고 안 나가도 그만인데 나갈 때까지는 안 집어넣었으면 그 사건이 편해. 그렇다고 소장님이 와서 ‘아 안 되겠네. 이제 그만하세요.’ 하면 이제 그 불편한 픽셀을 안 집어넣을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픽셀에다가 불편함을 만든 픽셀을 막 집어넣고 있는 거지. 이 회사의 사건은 그냥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 자기 인생한테 어떤 사건을 집어넣는 거지. 명상수행이라고 하는 거는 그 픽셀을 집어넣을 수도 있고 안 집어넣을 수도 있는 거예요. 안 집어넣는 순간 그냥 하나의 픽셀이 만들어 낸 하나의 화면이지 괴롭고 즐거움이라고 하는 일은 진짜로는 없는 거지. 가서 픽셀 안 집어넣는 훈련을 쭉 하시다가 소장님과 면담을 해서 ‘이제 때가 되었어요.’ 하면 ‘아 고맙습니다.’ 하고 나오면 돼. 그렇게 하는 것이 앞으로의 자기 인생을 편안하게 사는 지름길인 거죠.
질문자2: 습관을 고치는게 의미가 없나요?
제가 예를 들면은 저녁형 인간인데 사회생활을 잘하려고 아침형 인간이 되는 노력을 하잖아요. 그런 상황이 있다고 했을 때, 제가 이해한 것으로는 ‘어느 부분은 내 성격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렇게 지내는 게 좋은 거다.’라고 이해를 했는데, 만약에 어느 사회생활이나 상황에서 좀 더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라던지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 습관이나 이런 거를 고치는 거는 그러면 의미가 없다는 그런 뜻인지요?
정화스님: 아까 말한 대로 저녁형 인간이 아침형 인간이 되려면, 피곤을 달고 사는 걸 자기가 받아들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두 번째는 피드백을 기대하지 말라 했잖아요. 부모도 자식에게 해준 게 많으니까, 생각해보면 돌아가시고 나서야 ‘내가 잘할 걸.’ 말하지만, 살아계실 때 가면 나에게 요구하는 게 많아요. 나는 부모에게 마음속으로 죄인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 부모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내가 부모한테 이렇게 하기가 하면서. 근데 그럴 거 없어요.
내리사랑이 치사랑도 되면 좋지만, 내리사랑이 자신의 아들, 딸을 잘 키우라는 생물의 일반적인 사랑의 방식이에요. 부모의 유전자를 손자한테 물려주는 거예요. 이것이 가장 무의식적인 생물의 삶의 이유에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 손녀를 볼 때 별로 바람 없이 그냥 좋아해. 그때쯤 살아보니까 바라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이, 어리니까 바랄 것이 없잖아요. 그냥 좋아. 그냥 좋아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 어린이한테 가장 편안한 삶의 자리를 제공해 주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상대한테도 자기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내가 지치고 힘들지 않을 만큼이에요. 보증 서달라고 하면, 서주면 안 됩니다. 해 줄 만큼만 해주고 나머지 것은 내가 안 해줬다고 해서 ‘내가 그때 좀 잘해줄걸.’하고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 해주고 그냥 잊어버리는 거. 오든 안 오든 아무 상관 없어요.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바보가 돼요. 상대가 해주라 할 때마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거의 그 사람한테 바보랑 똑같아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힘들지 않을 정도만 해주고 그 사람이 지나치면 절대 친구로 대하지 말아요.
그 사람이 좋아하면 그만이고 우주가 다르니까 좋아하지 않으면 또 그만인 거에요. 근데 보통 우리가 “내가 너한테 이만큼 해줬는데 너가 그럴 수 있어?”라고 하잖아요. 그 애도 할 말이 많아 “내가 언제 너한테 해달라 했냐. 너가 그냥 안 한다고 하지, 왜 그 말을 못 했냐.” 막 할 말이 많아.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습관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좋아하는, 아침형으로 하든 안 하든 그것이 아니고, 그 상황에 대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내는 훈련, 그런 관계에 대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내는 훈련이 가장 중요해요. 습관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부부관계에서도 상대한테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해요. 만약 자기 뜻대로 해주는 사람을 좋아해, 이건 뭣하고 똑같습니까? 기계를 데려다 사는 거랑 똑같지요.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거지요. 서로 해주는 게 많은 부부 사이도 그렇게 해요. 친구들은 두말할 것 없지요. 친구들은 내가 해준 게 좀 적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받는 피드백에 상처가 좀 더 적고 아주 먼 사람한테는 별로 상처를 안 받죠.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필요할 만큼 열심히 하지 말고 해주고 난 다음에는 오든 말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먼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고. 그럼 잘 사는 거예요.
질문자3: 명상도 제대로 배워서 바른 방법으로 명상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각자 수행을 통해서 해야 할까요?
정화스님: 명상은 크게 보면 일어나고 있는 대상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전 모든 명상의 조건이에요. 집에서 있건, 명상소에서 있건.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보는 안목이 무엇인가가 중요해요. 안목은 예를 들면, 과학과 인문학 등을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일어나는 이상한 것 가지고 안목을 관점을 잘못 설정해 이상한 일을 하게 되지요.
관점을 잘못 세우면 경험한 사람도 삿되게 빠져요. 관점 설정의 중요성은 공히 과학책을 봐야해요. “분명하게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어긋날 때는 불교 교리를 바꿔야 합니다.”라고 달라이라마가 말씀하셨어요. 2000년의 세월이 지나도 맞는 것이 있지만, 틀린 것이 많은 것이지요. 달라이라마 스님의 굉장한 점은 “불교 교리를 바꾸세요.”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시대와 직접보고 이야기하는 시대가 관점이 바뀌는 것이지요. 경험 내용이 달라진 건 아니고 관점이 변화된 것이지요. 관점이 잘못 설정되면 본인도 속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일이 많이 발생하니까요. 지금은 진화론과 양자역학과 뇌과학을 중심으로 최소한 자기 독서의 몇십 프로를 할애해야 합니다.
질문자4: 벌레만 보면 너무 놀라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몇 달 전에 이사를 갔는데 그 집이 산 밑쪽이어서 벌레가 많이 나와요. 특히 돈벌레가 많이 나오는데, 징그럽기만 한 게 아니라 제가 문을 열면 확 빠르게 지나가니까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든요. 그래서 옆에 같이 사시는 선생님이 그러면 영혼이 놀랜다고 걱정을 하셔서요. 너무 놀라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요.
정화스님: 전 거의 모든 벌레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요. 왜 없습니까? 어렸을 때 출가하기 전까지 그런 벌레들하고 20년 가까이 살았어요. 우리 어렸을 때 먹는 음식 중에 다른 데 가면 사람들이 막 깜짝깜짝 놀래는 음식이 있잖아요? 근데 어렸을 때 그 음식을 먹는 애들에겐 그냥 맛있는 음식이에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고 그와 같이 벌레들과 같이 살아온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놀랄 수가 있죠.
지금은 벌레들과 새로운 사회 관계성을 형성해야 해요. 옛날에는 이렇게 말을 했어요. 놀래지 마시라고. 어른들이 그렇게 말한 거지,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앞으로 그것들하고 친해지기 전까지는 계속 그런 일이 있어요. 근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우리는 벌레를 맨날 잡고 놀고 죽이고 날마다 하는 일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죠. 그래서 저분은 벌레하고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벌레가 특별한 게 아니고 대부분 다 우리한테 해 끼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놀랄 필요는 없는데 지금은 놀라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해요. 그래서 한 육개월이나 일 년 같이 살아서 친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정리 _ 감이당 토요대중지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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