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것으로 즐거운 사람
질문자1: (일요대중지성 4학기) 이번 학기 과제가 묘비명 쓰는 거예요. 고미숙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 예수의 완벽한 용서나 어떤 원망이나 회한도 없이, 불교로 말하면 무아로 돌아가는 그러한 죽음을 사유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구요.
정화스님: 일단은, 어떻게 쓰고 싶은가는 대충 쓰시고, (하하하) 지금을 잘 살면, 죽음의 순간도 지금으로 맞이할 테니까, 쓰고 싶은 거는 그냥 아무렇게나 쓰시고, 너무 고민할 거 없습니다. 그 사이 수만 번 수십만 번 계속 생각이 바뀌어 갈 것이니까, 지금 생각하는 죽음이 진짜 죽음의 순간에는 그 생각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에만 뜻이 있는 것이지 그 순간에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거 한 번 정도 생각해 보는 거에 그칠 것이지, 그것 같고 큰 미련이나 의미를 갖고 그럴 건 없어요. 지금을 잘 사시면 됩니다.
질문자2: 정신과 물질은 어떻게 같은 속성인가요?
위빠사나 지혜에서요,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르고 그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을 훈련하는데요, 스님께서는 정신과 물질은 나눌 수 없으며 정신과 물질은 같은 속성이라고 말씀하셔서, 이 두 가지 가르침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정화스님: 그것이 기본적으로는 무의식 장 전체는 완벽하게 정신의 장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무의식적 장에 여기는 물질과 정신이 아예 구별이 안 돼요. 그런데 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마치 두 가지가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처럼 뇌에 그런 기관이 생겼어. 그래서 마치 알아차리는 놈이 따로 있고, 알아차리는 물건이 따로 있는 것처럼 두 개가 쭉 나뉘어진 거에요. 그래서 이것만 보면 마치 정신적으로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요쪽만 보면 물질인 것처럼 보일 뿐이에요. 이 두 개에서 일어난, 두 사건 중에서 일어난 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인식의 내용일 뿐이에요. 그렇게 하기위해서 사람한테는 ‘위해서’가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세상을 보는 사건이 생긴 거예요. 실재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동시에 이 세계는 물질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는 정신이에요. 이 두 개가 작용을 나누면 정신과 물질인 것처럼 보이는데 나눌 수가 없어요. 그래요. 나눌 수가 없어요. 동시에 물질이면서 동시에 정신이에요.
질문자3: 미얀마에서 수행을 하는 게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정신과 물질의 그 구분을 알아차리는 것을 첫 단계로 보는 것이잖아요.
정화스님: 예, 첫 단계에요. 첫 단계. 이것이 깊어지면 그런 구분이 사라져 가는 거지. 우리가 의식은 반드시 알려진 것하고 아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작용해요. 이 두 개를 떼어놓고, 아까 말한 것처럼 감정도 감정에 섞인 의식이 있지만 그것을 떼어내는 거예요. 아픔과 싫어함과 보는 것을 분리시킬 수 있다니까요. 분리시킬 수 있는 이유가 뇌에 기관들이 따로 있어요. 그러고 이게 통합이 되면 하나처럼 보이고 훈련을 시켜서 분리시키면, 예를 들면 감정을 개입하지 않게 해요. 그러면 감정 통로가 작동을 안 해요.
질문자3: 그런데 부처님께서 경전상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라는 그런 가르침을..
정화스님: 예예, 그런데 거기에 보면, 연기법이라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연기법은 그럼 정신이 만일 ‘연기법하고 상관없이 존재한다’라고 하면 연기법이라고 하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정신은 연기법이 아니어야 하잖아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는 부분이 하나가 있어야 하잖아요. 물질도 마찬가지로 연기법이 아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일어날 때는 그렇게 일어나지만, 숙련이 되어 가면 이제 안에서 조율할 수 있게 되는 상태가 되면 그런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요즘은, 스위치가 따로 있어요. 그래서 뇌의 각 부분마다 앉아서 명상 상태가 되면 특정 부위의 스위치가 꺼져요. 실제로 꺼집니다. 요즘은 FMRI로 비춰보면 거기에 혈류의 작용이 없어요. 거기에 작용이 안 일어나요. 작용이 안 일어나면, 신체가 사라진 감각만 경험했죠. ‘체성감각영역’이라고 여기 스위치가 딱 꺼지면 작용만 안 하면, 몸이 사라져요. 그다음에 안에서 시상에서 연결하는 어떤 부위가 끊어지면 지각이 안 일어나요. 아는 것이 있는데 지각의 대상이 사라져요. 더 훨씬 더 오래전에 생긴 총 지각 스위치가 있어요. 그것이 딱 끊어지면 갑자기 빈 마음이 돼요. 그런데 그런 상태가 되어놓고 이런 분들은 이제 선정의 기술이 있으니까 앉아서 쉽게 그것이 돼요.
질문자3: 이렇게 뇌하고 과학적인 이런 용어로서 설명을 듣는 걸 지금까지는 한 번도 공부해본 적이 없어요.
정화스님: 예, 명상수행자들을 모셔다가 뇌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이런 상태입니다’하면 그 상태를 말하는 사람이 다 일반적으로 특수 부위의 스위치가 작동을 안 해요. 그다음에 가장 처음에 작동하는 것이 분별하고 판단을 작동하는 전두엽 부분인데 이 전두엽 부분이 작동을 잘 안 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이쪽으로 가면 시간과 공간을 구분 짓는 영역이 따로 있어요. 이 두 영역이 딱 작동을 안 하면 자기가 우주가 돼요. 우주와 합일된 자기가 딱 돼요. 그러니까 ‘우주가 합일된 상태에 있습니다’하고 신호를 보낼 수가 있어요. 의식이 있으니까. 선정을 딱 찍어보면 그 두 군데가 작동을 안 하고 있어요. 쉬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감정도 통로를 내가 조율할 수가 있으면, 이제 거기에 대해서 더이상 내가 아파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돼요. 그런데 그것이 그냥 정신이 그냥 아파하지 않는 게 아니고 아예 실체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율을 딱 해 놨어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냥. 더군다나 이런 것들을 그전에는 이제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수술해서 그 부분을 이렇게 도려내면 그냥 감정이 없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감정해석의 중간에서 (아주 거의 최초 단계는 아니지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건에서 그것을 통과해야 해요. 이 통과를 조율할 수 있는 의식상태를 만들면 내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만일 이런 상태를 의식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면,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태를 절대로 경험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그냥 물질이면서 그런 것을 만들어 내요. 감정이라고 하는 심리상태를 만들어 내요. 물론 하나만 하는 건 아니에요. 굉장히 연합해서 하긴 하는데 거기가 딱 빠져버리면 안 생겨요. 예를 들면 여러분이 제가 이렇게 하면 다 제가 움직이는 손이 보이죠? 움직임을 해석하는 부위의 스위치만 딱 내리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요. 안 보여 내 손이. 어떻게 보이느냐면, 갑자기 손이 하나 있다가 사라져요. (이것이 딱 나타났다가 또 사라져) 연속적으로 볼 수가 없어요. 아마 하면 의식이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경험이 있죠? 똑같아요. 연속적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부위의 스위치가 작동만 하지 않으면 이렇게 보여요. 마음조차도. 마음이 연속적으로 지금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연속으로 상영하는 상영기에 다른 게 개입하면 의식이 들락날락 들락날락하는 것이지요. 둘을 전혀 구별할 수가 없어요.
질문자4: 선업, 불선업으로 나누던데, 현대사회를 살면 내가 의도를 해서 좋게 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아닐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결과를 제가 5년 10년 지나 받는단 건가요?
정화스님: 결과가 남는 게 아니고 의도가 남는 거예요. 남는 것은 의도만 남는 거예요. 의도하지 않는 것은 남질 않아요. 의도가 되어야 안에서 시스템이 작동하려고 훈련하는 거예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지나가고 있잖아요.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경험 내용이 제가 지금 받아들이는 것보다 10배 20배 많아요. 그런데 저녁에 자고 나면 그중에 한두 개 남고 다 사라져버려요. 의도하지 않는 것들은 거의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물론 무의식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심어요. 그래서 의도하지 않는 것이 100%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의도한 것이 훨씬 더 먼저예요. 결과가 먼저가 아니고.
질문자4: 그러면 결과보다 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이것을 했나가 더 중요한가요?
정화스님: ‘했나’가 자기 인생길을 정해 가는 거죠. 그러니까 하는 것으로 즐거운 사람은 결과가 별로 그렇게 자기를 옥죄지 않는데, 회사에서 결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잖아요. 그런 것을 계속 훈련받는 거죠. 실제로는 과정밖에 없어요. 그런데 결과가 과정을 말해주는 것처럼 전도되었어요. 전도. 그런데 이 결과를 만들어 낼 때, 나의 의도만 있다면 결과를 누구나 다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원하는 결과를. 그런데 내가 가는 그 길에 너무나 많은 우연이 개입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예측대로 안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권력 갖은 사람들은 무슨 말이냐면 우연을 배격할 수 있고, 자기 의도대로 사건이 가는 통로를 더 많이 만들려고 해요. 자기 생각대로 되도록. 이것이 권력자들이에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것들이 작은 상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뭐 북경의 나비짓이 뉴욕의 폭풍으로 온다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엄청나게 개입돼서 우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삶의 흐름 자체로 보면 잘못된 것이죠. 회사에서는 결과로 책임지게 하긴 하지만.
그래서 선한 것이 선한 결과가 안 나오는 측면은 그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내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게 본래 아니에요. 그래서 내 의지만 갖고 되지 않는 부분들을 옛날에 신이 개입했다고 말했지요. 그럼 불교에는 그것은 ‘여러 인연들이 개입되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신이 개입되었다는 게 아니고.
불교나 다윈은 ‘절대적인 권력자의 개입이 없이 인생이 이루어집니다’라는 말이고, 신을 섬기는데는 그 우연이 ‘전부 다 신이 개입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인지체계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을 욕할 수가 없어요. 일본이 2차대전 일으키고 한국을 35년 동안 식민지로 만들었잖아요.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총리 될 사람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대형 교회에서 강의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과 한국을 거의 이런 식으로 다 이야기 합니다. “일본에 아무 죄가 없어.” 그럼 그때 왜 한국 사람이 일본한테 그런 걸 당했느냐, “한국 사람이 그때 문제가 너무 많아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 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했다”라고 그렇게 말을 해요. 35년 식민지를. 한국의 모든 대형 교회에서 다 그렇게 말을 해요.
불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냥 그 당시 일본사람이 나쁜 거예요. 일본 사회의 나쁜 의식의 흐름이 나쁜 일을 한 거예요. 신하고 아무 상관 없이. 우리는 뭐 잘못한 것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사람한테 그렇게 핍박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요.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거예요.
질문자5: 저는 카톨릭 신자인데, 여기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고,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발생시킨 것이고 절대 신이 개입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해요.
정화스님: 지금 신이 인간 세상에서 개입하느냐 안 하느냐 가지고 크게 한 3파가 있어요. 만들어 놓고 방관하는 ‘방관파’가 있어요. 다음에 적당히 개입하는 ‘적당파’가 있어요. 그다음에 아까처럼 모든 게 개입하는 ‘개입파’가 있는데 개신교의 대형교회는 개입파가 많아요. 그리고 아까처럼 되는 것은 개신교에서도 방관파가 많아요. 이 방관파에 대한 이야기를 정립할 때 자유의지가 나오는데,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요즘 굉장히 아직도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뇌 과학을 통해서 만들어진 인지 흐름으로 봤을 때 자유의지라고 하는 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아직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많아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방금 말한 대로 방관파들이 하는, 신의 방관파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질문자5: 그래서 저는 항상 시작할 때, ‘제 탓이오’를 하고 시작하거든요.
정화스님: 예, 그런 탓이 없어요.(하하) 그러니까 굉장히 제가 몇 번은 얘기했지만 ‘누구도 죄를 타고나고 자기 탓으로 사건이 이뤄지도록 조건되어진 일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이야기에요. 절에도 가보면 사람들 볼 때 다 교회랑 똑같아요. “죄 많은 나를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하고 다 입으로 말을 해요. 절에도 말하고 교회에도 말을 해요. 불교 교리상에는 맞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온갖 인연이 만들어져서 그런 사건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주체적으로 그것에 책임을 몽땅 짊어지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탓이라고 할 내가 없다는 거죠. 주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를 만드는 것이, 그 우리 몸에 나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DNA잖아요. 인간 DNA의 60%가 바이러스에서 왔어요. 고유한 인간의 DNA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다음에 그것보다도 훨씬 이전에는 박테리아가 우리 선조인데, 박테리아들끼리는 유전자를 그냥 마음대로 주고받아요. 의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필요 없는 것을 내뱉으면 다음 박테리아가 그걸 받아들여서 자기를 위해 그냥 썼어요. 그래서 유전자 교환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어요. 그다음에 우리 눈은 한 6억년 가까이 전에 생겼는데 그 이전에는 동물에 눈이 없었어요. 그런데 식물에는 빛을 수용하는 감수 수용체가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식물을 먹다 보니까 어느 날 식물에 있는 빛을 수용하는 수용체가 인간의 눈의 수용체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다 내 탓이오? 그러니까 적당한 내 탓도 있긴 있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얼마 있고, 아들 탓도 얼마 있고, 문재인 탓도 얼마 있고, 부시 탓도 있고 다 있는 것이지 같이 어울려져가지고. 그것을 내 탓이라고 하면은 굉장히 좀 종교적으로는 자기성찰을 잘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질문자5: 우리는 자유의지로 행동하나요?
그런데 저는 ‘아 그러니까 모든 결정권은 나한테 있구나. 모든 행위의 시작과 끝은 나니까, 나를 잘 만들어야겠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정화스님: 자유의지 부분도 DNA가, 의지는 의지할 수 있는 생각의 지도가 우리한테 하나씩 있어요. 그런데 DNA 중에서 1/3을 공란으로 만들어 놨어요. DNA가 ‘여기는 네가 살아오면서 네 경험을 가지고 채워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보통 한 25살 되어야 완성이 돼 그 지도가. 그런데 그 지도를 만들 때 내가 주체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환경과 더불어서 만들어요. 그리고 나머지 1/3은 신경세포가 맘대로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조차도 실제로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환경과 관계 속에서 자기가 선택적으로 그 색깔을 선택해요. 그렇게 한번 만들어 지면 그것이 세상을 보는 필터가 돼요. 이 지도를 자유의지처럼 생각하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지는데 유전자가 1/3을 개입 했어요. 환경이 1/3을 개입하는 것 같고, 나머지 1/3은 랜덤으로 이뤄져버려요.
자 거기서 한 7만 년 전에 처음으로 ‘자유’라는 말을 사유할 수 있게 돼요. 물론 7만년 전에 바로 생긴 것은 아닌데, 7만 년 전에 뇌의 인지 시스템에 변화가 옵니다. 즉 사변적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돼요. 즉 자유라는 의미를 처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본 배경이 지금부터 7만년 밖에 안돼요. 다른 책에는 6만년, 5만8천 년 전이라고 된 것도 있습니다. 대략 6~7만년 전에 만들어져요. 사변적 지적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요. 그런데 생물의 역사는 40억년인데, 그 40억년의 역사가 훨씬 더 세지. 7만년 전에 나온 사변적 역사가 본질적으로 더 세질 않아요. 그렇지만 이것은 거의 의식된 사건이에요. 의식된 사건은 현재 상에서 무의식 사건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리고 다음 사건에 영향을 주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밥을 잘 드시고 속이 편하신 분은 제 말을 들을 때 ‘아 그 말 좋다~’ 이렇게 될 확률이 높아요.(하하하) 그런데 아침부터 지금 뭔가 기분이 안 좋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속이 부글부글한 사람은 ‘야 그거 말이 이상하드만’ 이렇게 할 확률이 높아요. 그러니까 아침을 뭘 먹었느냐가 다음 의식을 정해요. 이렇게. 그것이 불과 10분 만에도 그 행동 양상을 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도 몰라.
자유의지라고 말하는데,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이제 임시로 무슨 경찰서나 법원에 가둬놓고 이 사람을 가석방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를 심사하는 사람들, 배심원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11시쯤에서 12시 사이에 찾아온 사람은 가석방을 25%밖에 안 해요. 배고파서. 그런데, 예를 들면 점심을 잘 먹고 와서도 25%면 사건이 해산이 안 되잖아요. 점심 먹고 느슨하니 커피 한 잔 딱 먹고 오면 75%를 가석방해요. 세 배를 많이 해요. 조건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배가 고프면 같은 일도 나쁜 일이 더 크게 보여요. 실제 유의미한 (통계가) 수백 명을 수천 명을 그렇게 조사했어요. 그랬더니 3배에요. 밥 먹기 전하고 밥 먹은 후.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현재 자기가 일어나는 의식적 사건에 개입하는 자유도가 전혀 없는 건 아닌데, 배고픈 게 훨씬 더 강력한 것이지요. 3배나 많아요. 3배.
정리_감이당 일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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