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묵을수록 좋은 귤 껍데기 진피(陳皮)
지난 겨울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던 귤!
내가 버린 껍데기, 아니 약재
4월, 시인은 외쳤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라고. 한데 4월을 여는 오늘의 본초는 껍데기다. 그것도 말라비틀어진 묵은 껍데기. 대체 무슨 껍데기기에, 초목에 흠씬 물오르는 이 화사한 봄날에 감히 껍데기 따위를 들이미느냐고? 후후. 알면 후회할 텐데... 그래도 궁금하다면 따라와 보시라.
지난 겨우내 감이당 학인들의 갈증과 허기(밥과 그닥 상관없는)를 달래주었던 귤.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귤이 가득 들었던 박스 안에는 귤 껍데기만 수북이 남겨져 있었다. “진피감온순기공~ 화비유백담취홍(陳皮甘溫順氣功 和脾留白痰取紅)~ 진피는 미감성온하다. 순기하는 데 효력이 있으며, 비를 조화시킴에는 유백하고, 담에는 취홍한다.” 이는 일요일마다 주구장창 읊어댔던 약성가의 한 대목이다. 약성가(藥性歌)란 한의학에 쓰이는 본초의 기미와 효능을 운율에 맞춰 정리해놓은 노래이다. 수많은 본초들을 외우느라 고생하던 선학들의 암기용 요약본이라고나 할까. 뜻을 새기자면 ‘진피는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하여 기운을 순조롭게 하며, 껍질 안쪽의 흰 부분이 붙은 채 쓰면 비(脾)를 조화롭게 하고, 붉은 부분만 취하여 쓰면 담(痰)을 없앤다.’는 내용이다.
귤 껍데기가 이렇게 유용한 존재였단 말인가!
그렇다. 오늘의 주인공은 귤 껍데기, 진피다. 진피의 한자의 뜻을 새겨보자면 ‘묵을 진(陳)’, ‘껍데기 피(皮)’이다.(다른 진피도 있으니 유의하시길. 진피(秦皮)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말린 것) 귤 껍데기는 오래 묵은 것일수록 좋은 약이 된다하여 아예 진피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는데 귤피(橘皮), 홍피(紅皮)라고도 한다. 아뿔싸, 그 겨울 돈 주고 버렸던 귤 껍데기의 정체는 돈 주고 사쟁여야 마땅할 귀한 약재였던 것. 하긴 눈앞에 지천으로 널렸을 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뒤늦게 가슴 치는 경우가 어디 이뿐인가.
너무 편해서 기막힐 때
묵을수록 좋다는 귤 껍데기는 실은 잘 말리기만 해도 훌륭한 약이 된다. 심지어 귤 껍데기 한 가지만 맹물에 달여 먹는 처방도 있으니. 이름하여 귤피일물탕(橘皮一物湯)!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귤피 한 냥(37.5그램)을 신급수(新汲水), 즉 이른 새벽에 맨 처음 길어 아직 동이에 붓지 않은 우물물에 달이라는데, 아마도 이 물은 환자 본인이 직접 떠와야 탕약의 효과를 제대로 볼 듯하다. “편안하면 기가 막히고 또 맺히게 되는데, 가벼운 것은 움직이면 낫지만 심한 것은 귤피일물탕을 써야한다”니 말이다. 엥, 편안하여 생기는 병이라? 방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겨울을 나는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다. 동의보감을 좀 더 읽어보자.
구선이 말하기를, “사람이 노곤해지는 증상이 까닭 없이 발생하는 수가 있으니, 반드시 무거운 것을 들거나 가벼운 일을 붙들고 종일토록 힘써 움직이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한가한 사람에게 이 병이 많이 생긴다. 대개 한가하고 편안한 사람은 흔히 운동을 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앉아 있거나 잠이나 자기 때문에 경락이 잘 통하지 않고, 혈맥이 응체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인의 얼굴은 즐거운듯하나 마음은 괴롭고, 천한 사람은 마음은 한가하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인다. 귀인은 때를 가리지 않고 기욕(嗜慾 : 즐기고 싶어함)을 구하여, 범하지 말아야 할 것에 미혹되거나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먹고 곧 잠자리에 든다. 그러므로 항상 힘을 쓰되 지나치게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하여 영위기(榮衛氣)가 잘 돌아가고 혈맥이 잘 조화되게 해야 한다. 비유하면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에는 좀이 슬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 <동의보감>, [내경편], 법인문화사 251쪽
오오, 옛날에도 요즘 사람들처럼 시체놀이의 달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운동도 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앉아 있거나 잠이나 자’다 기가 막히는 사람이라니, 훗, 어쩐지 친근한 이 느낌. 그런데 좀 뜯어 읽어 보자. ‘때를 가리지 않고 기욕을 구하여 범하지 말아야 할 것에 미혹’되는 ‘귀인(貴人)’이라. 아니, 이런 사람이 왜 귀인이지?? 때를 가리지 않고 ‘기욕(嗜慾)’한다는 건 아무 때나 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일 테다. 하나 이 귀인에게 욕망에 끄달리지 않기를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이이는 때도 못 가리는 수준(저.. 목욕탕의 때는 아니에용^^)이니까. 때를 가리지 않는 자는 천지와 시절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는 자, 한마디로 철모르는 자이다. 고로 자신이 놓인 시공간과 끝없이 불화할 수밖에 없다. 어디서 치고 빠질지, 언제 어떻게 관계할지 알 재주도 없고 알려 들지도 않는 사람. 예나 지금이나 이런 철부지를 쳐준 사회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귀인’은 절대 존재의 귀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지칭하는 표현일 따름이다. 이런 처지(라서 더 무디어졌겠지?)에 타고난 성정마저 게으르다면 기운이 막힌다. 기도 너무 편안하면 막히는 것이다. 마치 흐르지 않는 물처럼 말이다.
아유 귀찮아... 장판이 나인지, 내가 장판인지 모르겄다~
진피는 이런 몸에 들어가 막힌 기운을 돌려주는 약재이다. 몸 가운데 뱃속을 편케 함은 물론이고 위로는 얼굴 피부에서 아래로는 항문까지 두루두루 안 통하는 데가 없다. 응? 항문에도? 맞다. 치질 중에서도 성내거나 근심하는 일이 있어 항문이 붓고 아픈 기치(氣痔)에는 귤피탕을 쓴다.^^. 하긴 생명의 근원인 기를 다스리는 이기약(理氣藥)인 진피가 두루 안 쓰일 수가 있나(참고로 동의보감 언급 횟수는 849회). 이렇게 훌륭한 본초를 냅다 버리다니, 여기저기서 가슴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 일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라도 우리 본초서당을 꼬박꼬박 읽도록 해보자. 알면 보인다, 아니 알면 안 버린다!^^
불기운을 스르륵~ 내리는 진피
이제 그럼 진피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실어 다시 한 번 읊어보자. 진피감온순기공, 화비유백담취홍. 단 맛과 따뜻한 기운이 진피의 기미(氣味)다. 근데 실제로는 여기에 뭔가 살짝 매운 향과 맛이 난다. 우리 집엔 족히 칠팔 년은 넘게 묵은 진피가 있다. 한 번씩 잘 끓여 마시다 언제인지부터는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쯧, 말린 첫 해에는 노란 귤빛에 향긋하고 은은한 단 맛이 감돌아 먹기가 좋았는데 이것이 몇 년 지나니 색깔부터 점점 짙은 갈색으로 변하더니 급기야 향도 맛도 매워지는 게 아닌가? 그땐 본초 공부를 안했던 때라 이게 약되는 것인지 모르고 한 주전자를 쏟아버렸다. 아깝..다.
앞에도 썼듯 진피는 오래 묵을수록 약성이 강해진다. 감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울 신(辛)’, 신미와 신향이 더해진다. <도표본초문답>을 보면 진피는 신고온(辛苦溫)한 기미를 지닌다고 쓰여 있다. 아마도 약성가의 진피는 얼마 안 묵힌 진피인 듯하다^^. 농도를 엷게 하면 매운 맛은 별로 안 느껴지니 차로 마실 때는 진피의 양을 조절하시길.
상초로 역행하는 화기를 내려주는 진피!
갈색으로 말라비틀어진 진피의 과거는? 이래 뵈도 한 때는 탱글탱글 동그랗던 과일(의 일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진피의 약성 중 이 대목에서 설명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과일은 익으면 아래로 떨어진다. 진피가 역상하는 기운을 끌어내릴 수 있는 건 이 하강하는 과일의 숙명과 관계있다. 동그란 모양은 인체의 동그란 배와 통하고(이 대목에서 사람의 복부는 원래 둥글다는 진리를 재발견해본다!), 껍질은 사람에게 피부로 얼굴의 부종을 내린다. 진피의 따뜻한 성질과 단 맛은 중초의 비위를 보한다. 동시에 매운 향이 있어 격막을 뚫고 상초로 올라가 위로 치성한 화기(火氣)를 끌어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화(火)는 불기운이므로 위로 오르기가 쉬운데 머리 쪽으로 기운이 너무 오르면 머리가 어지럽고 아프다. 탈모의 원인이 됨은 물론이다. 얼굴이 울긋불긋한 여드름쟁이들이라면 진피 물로 세수를 하는 게 더 낫겠다. 붉게 성이 난 여드름의 화기가 쏘옥 빠져서 뽀오얀 피부로 돌아온다.
‘음, 귤 껍질에 이런 놀라운 효능이?’하며 놀라실 독자를 위해 보너스 하나 더 나간다. 귤 먹을 때 저도 모르게 떼서 버리는 귤껍질 안쪽과 과육 겉에 붙은 흰 실 같은 그것도(한방에서는 이것을 힘줄과 유사하다고 보아 근락筋絡이라고 부른다) 실은 “귤락(橘絡)”이라는 약재이다. 하긴 세상에 약 아닌 것이 없다. 이 귤락은 술을 마신 뒤 토하는 것을 치료한다. 이제 귤에 붙은 흰 실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질 듯. 그러지 마시라. 고이 모아서 말려 두었다가 달여 드실 것을 권한다. 진피를 주로 담을 삭이고 체기를 푸는 용도로 쓰려면 말리기 전 귤락은 따로 떼어 내어 술꾼들에게 넘기자^^.
껍데기라 행복해요!
컴퓨터 앞에 앉아 네모 창에 ‘진피’라고 입력하는 즉시 우리는 현대과학의 연구 결과를 공유할 수 있다. 감귤류에 고농도 함유되어 있는 히스페리딘은 장내에서 지방의 흡수에 관여하는 효소인 '리파제(lipase)'를 억제해 지방흡수억제제 역할을 한다. 또 주로 껍질에 들어있는 ‘폴리메톡실레이테드 플레이본스(polymethoxylated flavones(PMFs))'이라는 물질은 비타민 E와 결합하면 콜레스테롤을 분해시킨다. 등등... 문장의 반은 낯선 단어들이지만 이런 논리 구조는 매우 익숙하다.
한의학에서 정의하는 진피의 효능(소화를 돕고 담을 삭인다)과도 일치하는 결과이다. 그런데 과학의 체계 하에서 중요하게 호명되는 대상은 한때 귤이라는 과일의 껍질이었던 무엇이 아니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히스페리딘’이나 ‘폴리메톡실레이테드 플레이본스’라는 물질이다. 그러나 한의학은 그 속의 물질단위로 껍데기를 환원하지 않는다. 한의학의 관점에서는 형색기미(형태와 빛깔과 성질과 맛)에 근거하여 기운을 판단하므로 전체성이 매우 중요하다. 요컨대 껍데기는 껍데기라서, 껍데기로서 약이 되는 것이다.
어디 껍데기뿐인가. 오줌도 돌도 우물물도 꽃도 바람도 저마다의 기운으로 존재한다. 이 존재가 품고 있는 기운의 배치를 읽어낼 수 있는 자가 바로 우주를 다스.. 아니 이건 너무 나갔구나. 아무튼 그러니 좋은 한의사가 되려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본초를 공부하는 일에 게으를 수가 없나 보다. 요컨대 본초 안에 우주가 있다는 말씀! 우리 같은 초보 학인들도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약재감을 쓰레기 취급하는 수준을 벗어나 쓰레기에서 약재를 발견하는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어 본다.
요 아까운 것을 그냥 버릴 뻔 했잖아.. 잘 묵혀둬야지..
김주란(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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