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몸과 정치
의술과 통치술
푸코가 지적하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신체를 다스리는 의술과 타자를 다스리는 통치와 자기를 다스리는 자기배려는 동일한 은유의 지평에서 쓰여져 왔다.
이 세 유형의 활동(치료하기, 타자를 통솔하기, 자기 자신을 통치하기)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문학에서 아주 규칙적으로 항해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항해의 이미지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그 안에서 분명한 유연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일정 유형의 이미지와 실천을 구체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해 테크네를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요컨대 군주는 타자들을 지배해야 하는 한에서 자신을 지배해야 하고, 도시국가의 병, 시민의 병, 자신의 병을 치유해야 합니다. 군주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면서 도시국가를 통치하듯이 자기 자신을 지배합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유형의 지식, 동일한 유형의 행위, 동일한 유형의 추론적 인식에 속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에 있는 일련의 관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치료하기), 통치(타자의 통치), 자기배려(자기의 통치)라는 세 유형의 활동이 동일한 유형의 지식과 동일한 유형의 행위, 동일한 유형의 추론적 인식 속에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민의 병을 고치는 것(의학)과 도시국가의 병을 고치는 것(통치), 자신의 병(자기배려)을 고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사유방식은 이후 국가 이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치 기술이 발명되면서 의학/타자의 통치/자기의 통치가 철저하게 구분되지만, 위와 같은 은유는 16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이후에도 꾸준히 재발견된다. 그만큼 의학과 통치술의 문제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살펴볼 수 있다.
노예 의사들은 자유민 의사들이 스스로 배우고 제자들에게 물려줬던 그런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이 노예의사들은 절대로 노예 개인의 질병에 대해 어떤 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며, 경험에 비추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처방을 내리지요. 그런 다음 다른 노예 환자의 자리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지식은 환자를 돌보던 스승의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랍니다. 이러한 노예 의사들과 달리 자유민으로서 의사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민들의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들은 환자나 그 보호자들에게 질문을 해서 병의 발단과 경과 등 과거의 경험을 종합하고 판단하여, 그가 내릴 수 있는 모든 처방을 환자마다 적절하게 내리지요. 그는 환자의 동의가 없다면 절대 처방을 내리지 않습니다.
─플라톤, 『법률』
이 구절은 훌륭한 의사(자유민으로서의 의사)와 나쁜 의사(노예의사)의 차이를 말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이를 통해 정치에서 훌륭한 입법자와 나쁜 입법자의 차이를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당시에 의술은 타자의 통치와 자기의 통치를 포함해 통치술과 관련되어 사유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술과 통치술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의사란 누구인가? 질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의술에 관련된 질문은 동일하게 정치의 영역에도 고스란히 던져진다.
머리, 가슴, 손발이라는 유비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주석이다.
앞서 신화에서도 보았듯이 신체를 통한 정치체에 비유는 플라톤에게도 발견된다. 머리와 가슴과 손발이라는 유명한 신체의 비유가 그것이다. 플라톤은 정치공동체는 본질적으로 3개의 기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 구성원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고, 그 다음 공동체를 방위할 필요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통치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응해 3개의 계급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바로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 계급, 방위의 임무를 담당하는 수호자 계급, 그리고 지배에 적합한 통치자 계급이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은 세 개의 혼을 이야기하는데 이성, 격정, 욕망이다. 이러한 혼은 커다란 신체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을 담당하는 계급이 위에서 말한 통치자, 수호자, 노동계급이다. 이들 각각은 금, 은, 동으로 만들어진 계급이며, 이것이 하나의 신체로 비유하자면 머리, 가슴, 손발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 맡은 바,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이상적인 국가라고 여겨진다. 모든 계급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분야에 속하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국가의 형태였다.
이 나라에 있는 여러분은 실은 모두가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신은 여러분을 만들면서 여러분 중에서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이들에겐 탄생 시에 황금을 섞었는데, 이들이 가장 존경받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보조자들에겐 은을 섞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이나 다른 장인들에게는 쇠와 청동을 섞었습니다.
─플라톤, 『국가』
이처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는 금, 은, 동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황금의 자손에서 은의 자손이, 그리고 은의 자손에서 황금의 자손이,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자손이 이처럼 서로의 자손에서 탄생될 수도 있다. 그래서 황금의 자손이라도 청동 성분이나 쇠 성분이 혼합된 상태로 태어나면, 그 성향에 적합한 지위를 주어서 장인들이나 농부들 사이로 밀어 넣어야 하며, 반대로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황금이나 은의 성분이 혼합된 상태로 태어난다면, 그런 사람을 예우하여, 수호의 지위나 보조의 지위로 상승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각각의 계급이 각각의 역할에 맞게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듯이 조화롭게 하나를 이룬다는 비유는 흔히 보수적인 방식으로 읽혀왔다. 따라서 칼 포퍼 같은 이들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을 나치즘,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근대 전체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평가한 것도 일면 이해할 수 있다. 지혜를 고유한 덕으로 갖고 태어난 소수 철인에게 통치를 전담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의 전체성과 단일성을 통치의 중요한 목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읽힐 여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가운데 두 사람 중 오른손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 플라톤이고, 오른손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플라톤이 정신 세계인 이데아를 강조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 세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포퍼가 2차 대전 후 비극적으로 표출된 전체주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플라톤을 끌고 들어와 분석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기의 사상적 맥락을 보지 않아 적지 않은 오해를 남길 여지가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유의 틀 자체를 보지 않고서는 단순히 지금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살고 있던 당시의 신체는 어떤 방식이 이상적이었던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여기서 당시의 의학 개념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의학사를 통해 정치사상사를 보기!
조화와 균형의 강조-플라톤과 히포크라테스
앞에서 본 머리-가슴-손발의 신체와 통치자-수호자-생산자의 관계에서 이들은 이성-격정-욕망이라는 혼으로 연결되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지혜-용기-절제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란 덕목이다. 플라톤이 절제란 화성음과 같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자.
앞의 것들(올바름)보다 절제가 더 협화음 및 화성과 유사하다네. … 절제란 어쩌면 일종의 질서(kosmos)요,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일 걸세. 사람들이 ‘저 자신을 이긴다’라는 표현을 써서 말하듯이 말일세. 용기나 지혜는 그 각각이 그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있어도 뒤엣것은 그 나라를 곧 지혜로운 나라로, 반면에 앞엣것은 그걸 용기있는 나라로 되게 하지만, 절제는 그러질 못하기 때문일세. 절제는 정말로 나라 전역에 걸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협화음처럼 가장 약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가장 강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같은 노래를 합창함으로서 전 음정을 통하여 마련되는 것일세.
─플라톤, 『국가』
플라톤에게 절제란 모든 계급에 해당하는 덕목으로 이를 통해 신체는 협화음처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는 건강은 “신체에 있어서의 여러 부분이 서로 지배하며 지배받는 관계를 ‘성향에 따라’ 확립”하는 것이고, 질병은 이와 반대로 “서로 다스리며 다스림을 받는 관계를 ‘성향에 어긋나게’ 확립”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플라톤에게 ‘훌륭함’, ‘탁월성’을 의미하는 아레테(arete)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즉 자연의 이치에 따라 지배하며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어떤 타고난 성향에 따라 기능(ergon)상 개개인이 배치되어야만 될 때, “각자가 자신의 한 가지 일에 종사함으로써 각자가 여럿 아닌 한 사람으로 되도록 하고, 또한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서 나라 전체가 자연적으로 여럿 아닌 ‘한 나라’로” 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단순히 중앙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당시의 의술에서 조화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을까?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살펴보자.
인간의 신체는 그 안에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요소들이 인체의 본질을 형성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건강을 누리기도 한다. 이제 몸 안에 이 요소들이 힘이나 크기 면에서 서로 적절한 비율로 혼합된 채 완벽하게 섞여 있으면 인간은 최적의 건강을 누린다. 고통은 이 가운데 한 요소가 결핍되거나 초과될 때, 또는 체내에서 모든 다른 요소들과 혼합되지 않고 따로 고립되어 있을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한 요소가 고립되거나 혼자 떨어져 있을 때, 고립된 그 부위에 질병이 생길 뿐 아니라, 그것이 지나쳐서 넘쳐나는 부위에도 질병이 생기게 된다. 그 이유는 지나침이 고통과 질병의 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인간의 본질』
갈레노스가 정리한 4체액설에 대한 그림.
여기서 건강은 인간의 체내에 있는 모든 구성 요소들의 혼합으로 정의되며, 질병은 그 반대 개념으로서 다른 요소들과 관련하여 한 요소가 분리되거나 고립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인간에게는 네 종류의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본질적 구성 요소가 있어 혈액은 심장에서, 점액은 머리에서, 담즙은 담낭에서, 물(초기에는 물이었으나 후일 흑담즙으로 바뀜)은 지라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엠페도클레스의 흙, 공기, 물, 불의 4원소설에서 나온 것으로 이 원소들에서 냉, 건, 습, 열이라는 성질이 나온다. 그리고 4체액은 이 성질들 중 두 가지가 섞여 피는 열하고 습하며, 점액은 차고 습하며, 황담즙은 열하고 건조하며, 흑담즙은 차고 건조한 성질을 갖는다.
이러한 4체액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데 점액은 차갑고 습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겨울에 우세하며, 혈액은 따뜻하고 습한 성질이 있어서 봄에 우세하다. 아울러 황담즙은 따뜻하고 건조한 성질이 있어서 여름에 우세하며, 흑담즙은 차갑고 건조한 성질이 있어서 가을에 우세하다. 이는 지역에 따라서도,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습한 바람을 쐬는 도시의 주민들은 체질이 대체로 점액질인 반면,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을 쐬는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대체로 담즙질이다. 동쪽으로 향한 도시에 사는 주민들이 가장 건강하며, 서쪽으로 향한 도시들에 사는 주민들이 가장 건강 상태가 나쁘다고 말한다. 따라서 치료방식 역시 이 균형을 맞추는 데 초점을 두었다. 당시 치료의 3요소로서 약물, 절개, 소작이 이야기되는데, 이는 약물로 배출시키기, 절개로 사혈시키기. 불로 지져서 담액이나 점액이 혈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였다.
이 네 가지 체액의 조화를 잃으면 다음과 같은 병증이 나타난다. 왼쪽 위부터 점액질(Phlegmatic), 담즙질(Choleric), 우울질(Melancholic), 다혈질(Sanguine). 자신은 어떤 얼굴형인지 살펴보자.^^
즉,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건강은 습하고 건조한 것, 덥고 추운 것, 쓰고 단 것과 같은 신체 구성 요소의 균형과 혼합의 결과이며, 반대로 질병은 이 가운데 한 요소가 우세해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화가 핵심이었다. 플라톤이 세 개의 혼, 세 개의 계급이 조화를 이룬 것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상정했을 때 이러한 신체의 조화에 대한 사유가 바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야기를 의술에서부터 시작할 것인데, 그건 우리가 그 기술에 특별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네. … 우리 조상 아스클레피오스께서 우리 기술을 확립하셨던 것이네. 그는 하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 “그것 자체가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화합한다. 마치 활과 뤼라의 조화가 그렇듯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조화가 불화한다거나 계속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조화가 있다고 말하는 건 대단히 불합리하지. 하지만 그는 아마도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려 했던 것 같네. 고음과 저음이 이전에는 불화했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일치하게 되어 그것들로부터 조화가 시가 기술에 의해 생겨났다고 말이야. 확실히 고음과 저음이 적어도 아직 불화하고 있을 때는 그것들로부터 조화가 있게 될 수는 없거든. 조화는 화음이요, 화음은 일종의 일치이기 때문이지. 바로 리듬의 경우도 꼭 그렇듯이 말이네.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가 이전에는 불화했는데 나중에 일치되어 그것들로부터 리듬이 생겨나 있는 거지. 그런데 이것들 모두에 일치를 집어넣어 주는 것이 앞의 경우에서는 의술이었던 것처럼 이 경우에는 시가 기술이네. 서로 간의 사랑과 한 마음을 만들어 넣어 줌으로써 그렇게 한다네.
─플라톤, 『향연』
여기서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신화 속의 의술의 신으로, 온갖 질병의 치료를 주재하는 신이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타인을 치료하는 것과 통치하는 것이 같은 지평 속에서 사유되었다고 할 때 이러한 조화에 대한 강조는 어쩌면 당연하게 보인다. 의술이란 이처럼 신체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고, 국가라는 신체 역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통치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조화가 단순히 차이를 봉합한다거나, 억지로 같게 만드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민주주의자로서 플라톤?
플라톤은 흔히 소수의 지혜를 가진 철인에 의한 통치를 높게 평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반대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지혜, 즉 기술을 갖지 못한 이들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가령 여러 선박에서든 또는 한 선박에서든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게나. 선주가 덩치나 힘에 있어서는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지만 약간 귀가 멀고 눈도 마찬가지로 근시인데다 항해와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해 아는 것도 그만하이. 한데, 선원들은 키의 조종과 관련해서 서로 다투고 있네. 저마다 자기가 키를 조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지. 아무도 일찍이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을 내세우지도 못하며, 자신이 그걸 습득한 시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말일세. 게다가 이들은 그 기술이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누군가가 그걸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그를 박살낼 태세가 되어 있다네. 그러면서도 이들은 언제나 이 선주를 에워싸고서는 자신들에게 키를 맡겨 주도록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네. 그리고 때로 자신들은 설득에 실패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설득에 성공하게라도 되면, 그들을 죽여 버리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리거나 하네. 그리고선 점잖은 선주를 최면제나 술 취함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써 옴짝달싹 못하게 한 다음,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배를 지휘하네. … 이런 일들이 배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정작 조타술에 능한 사람은 이런 상태에 있는 배를 탄 선원들한테서 영락없는 천체 관측자나 수다쟁이로,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불릴 것이라 자네는 생각지 않는가?
─플라톤, 『국가』
여기에서 말하는 조타술은 항해의 문제만은 아니다. 앞에서 푸코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이 항해의 유비는 통치술, 의술 속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통치술과 의술 역시 마찬가지로 실천적 기술이라 할 때, 조타 기술 없이 인기 투표로 배를 몰 수 없는 것처럼 통치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당시 그리스 아테네에는 공의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국회의원을 선출하듯 의사를 선출했다는 것이다. 즉 평민들이 집회에서 공의를 선출했다. 따라서 공의 지원자들은 청중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연설해야만 했다. 이는 선박 기술자나 다른 기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플라톤은 이처럼 비전문가의 판단에 의지하여 전문가를 선발하는 제도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걱정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정치가가 되기로 했다고 말하는 젊은 에우티데무스를 비아냥거리며 의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같은 이야기는 공의가 되겠다고 응시한 지원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이런 식으로 연설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나는 한 번도 의술을 공부해 본적이 없으며,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스승을 찾으려고 애써 본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의사에게서 배우기를 끊임없이 피해 왔으며, 의술을 공부한 것 같은 모습조차 보이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만약 여러분이 나를 공의로 뽑아 준다면, 나는 여러분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면서 배울 생각이랍니다.
─크세네폰, 『추상록』
여기서 알 수 있듯 플라톤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시 의사와 정치가가 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지혜를 갖지 못한 이들에 의해 생기는 혼란에 대해 경고한다. 이는 민주주의 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인인 통치자와 무지의 피통치자간의 분리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강조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다수에 의한 지배를 반대하고 소수만이 지배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통치술 역시 하나의 실천적 기술로서 어떻게 이를 통해 ‘항해’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통치자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가가 중요했다. 의술의 어떤 방법이 신체에 이로운지를 판단하고, 이를 행하는 기술이라면, 통치는 어떤 방법이 국가라는 신체에 이로운지를 판단하고, 이를 행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각각에 유익한 것들을 찾아주는 것이 통치의 핵심으로 보았다.
의사가 의학서를 들여다보며 지시를 하자 약제사가 약을 준비하는 동안, 그리스·로마신화의 ‘건강의 여신’인 히게이아가 환자에게 약을 먹이고 있는 것을 히포크라테스 흉상 앞에서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와 니체의 귀족정치
하지만 어쩌면 민주정에 대한 반대냐 철인정에 대한 옹호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서 우리는 니체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떠올릴 수 있다. 거리의 파토스! 니체는 지금까지 모든 문화적 고양은 ‘거리의 파토스’에 근거한 귀족적 정치 질서하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유형의 고양은 지금까지 귀족적 사회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간의 긴 위계의 사다리와 가치 차이를 믿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를 필요로 하는 그런 사회이다.”
니체에게 민주주의 운동은 단지 정치조직의 타락형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인간의 왜소화, 평균화, 가치의 하락을 의미한다. 정치적 현실에서 지배와 피지배는 필연적 현상이라고 니체는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말하는 평등은 약자로서 다수인 대중이 소수인 귀족에 대한 투쟁에서 사용하는 교활한 원한일 뿐이었다.
뭉크가 그린 니체
그런 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란 흔히 이해하는 대로 권력을 쥐어서 남들을 지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 ‘거리’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이는 평등을 부르짖는 노예 도덕 개념과 정반대다. 노예들은 지속적인 무능력에 시달린다. 그리고 정신적인 복수를 통해 이를 완화하려고 한다. 계급이 부정적으로 읽히는 것은 이처럼 노예들이 계급을 원한의 감정으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정의관은 사회적 기능(ergon)의 역할분담론에 입각한 플라톤의 정의관과 유사하다.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은 자 모두에게 복수하기를 원하고, 모함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타란툴라의 마음은 자신에게 맹세한다. … 평등을 설교하는 자와 내가 뒤섞이거나 혼동되기를 나는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는 인간은 동등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평등해서는 안 된다. 내가 다르게 말한다면 위버멘쉬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때 니체의 귀족주의, 플라톤의 철인주의를 보수주의와는 분명히 구분할 필요 있다. 오히려 이는 자기 스스로 귀족이 되는, 강자가 되는 때만이 평등이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를 갖는 자만이 통치를 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법칙을 부여하고 자신의 법칙에만 순종하는 자만이 통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타자의 통치이자 자기의 통치다. 반면 노예의 특징은 자기규율과 자기입법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부정적 자유와 순종 없는 반항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니체에게 귀족이란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날마다 자기를 초극하는 존재다. 자기극복을 통해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고대 정치철학에서 이러한 위대한 인간을 발견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이란 어떤 타고난 계급이나 고정불변하는 세습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자기극복과 자기지배를 통해 타인을 통치할 수 있는 자이며, 그것은 위버멘쉬의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신체에 대한 비유는 단순히 어떤 위계질서를 설정하고, 다수의 정치참여를 막기 위한 것만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마그리트, <기억>
_"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로 꿰어진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0쪽, 민음사
팔다리, 가슴, 머리는 그런 점에서 하나의 신체를 이루지만, 그것이 어떤 위계적 질서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서로 차이를 생산해내는 속에서만 평등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전체주의로 오해할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을 뒤집어 엎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젝이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라는 책에서 말하듯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자유, 평등 개념을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누가 챙겨주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달려들어 그것을 쟁취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_담담(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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