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政治‘神’學)을 넘어 정치신학(政治‘身’學)으로
자, 이제 본격적으로 ‘몸과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그럼 그동안 뭐한거냐?ㅡㅡ;) 일단 코너 제목인 ‘몸과 정치’에 대해서 ‘그게 뭐냐?’는 말 많이 들었다. ‘몸’과 ‘정치’ 서로 잘 안 어울리는 단어들이긴 하다. 몸이라고 하면 흔히 의학에서 다루는 분야만으로, 정치는 사회과학에서나 다루는 용어로 생각하기 쉽다. 좀 더 넓게 잡더라도 몸은 의학사나 문화사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를 정치와 연관시켜 사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권력이 어떻게 개인의 신체를 규율화하는가, 신체의 욕망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코드화하는가의 문제는 있지만 이는 정치에서‘의’ 몸, 혹은 몸‘의’ 정치라 할 수는 있을지언정 이것만으로 몸‘과’ 정치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정치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치는 공동의 ‘신체’를 만드는 것!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정치란 다름 아니라 어떻게 자기를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타자와의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라고 한다면, 여기서 공동‘체’는 공동의 ‘신체’를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정치를 신체라는 모델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 정치학 용어에서 등장하는 국가체, 정치체, 공동체라는 단어에서 그것은 어떤 형태의 국가의 몸, 정치적인 몸, 공동의 몸을 만들 것인가라는 점에서 정확히 신체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국가의 수장(머리), 국가의 심장(원동력)등에서의 표현과 같이 국가를 이야기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신체의 문제를 상정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암적인 존재라거나, 사회의 병든 부분을 외과수술적으로 잘라 도려내어야 한다는 식으로 병과 치료의 발상으로 사회를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은유의 차원으로만 볼 수 있을까? 흔히 은유란 차이가 있는 두 대상 사이세 비교를 통해 공유하는 유사성을 추출하여 그 유사성에 근거하여 두 대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언어 작용이다. 원래 은유(metaphor)의 어원이 ‘가로질러서(meta) 옮긴다(phor)’는 의미에서 나온 것처럼, 원관념을 보조관념의 특성에 가로질러 옮기는 것이다. 가령 ‘장미꽃 같은 내 애인’(맞다, 난 애인이 없군..ㅡㅡ;)이라는 은유적 진술에서 아름답다는 장미꽃의 식물적 속성이 인간의 세계로 가로질러 진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나 사회를 신체로 유비하는 것이 신체의 특성을 국가나 사회에 가져다 쓰는 은유적 차원으로만 그치는 것일까?
그러나 집합적 신체로서의 사회와 우리의 신체는 다만 유비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적 ‘상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집합적 신체를 구성한다고 할 때, 이것은 우리가 어떤 몸을 좋은 몸으로 사유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의식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더 나아가 우리가 신체를 구성하는 방식과 공동체라는 집합적 신체가 구성되는 방식은 동일한 구조화의 차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둘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몸으로 환원시켜 사유하자는 것이라거나, 정치학을 의학으로 환원시켜 보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집합적 신체를 사유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몸을 사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의학과 정치학의 앙상블
따라서 이때 어떤 집합적 신체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몸의 문제, 의학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20세기 초 인체의 항상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던 의사인 월터 캐넌의 논의를 살펴보자. 그는 『육체의 지혜』이라는 자신의 저서 마지막 장 <생물학적 항상성과 사회적 항상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정성의 일반적인 원리는 없는 것일까? 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동물의 신체에 발달한 기구는 그밖에 사용되고 있는 혹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의 예가 되지는 않는 것일까? 안정작용의 비교 연구는 의미 깊은 것이 아닌 것일까? 다른 조직체-공업조직, 가정 혹은 사회-를 신체의 구조라는 입장에서 조사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 아닐까? ... 이제까지 우리가 조사한 인간의 신체를 안정하게 하는 기구의 새로운, 본질적인 이해는 사회조직의 결함이나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차리는 데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것들이 사회조건의 연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신체의 항상성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한 착상에 자극을 주는 것으로서 외견상 유사한 특징을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월터 캐넌, 『육체의 지혜』
캐넌은 신체의 특성을 통해 사회조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의 이러한 입장이 사회는 항상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보수적 입장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그가 개인의 신체와 사회라는 신체를 하나의 틀 속에서 사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
원래 고대에서 의학과 정치학은 다른 학문이 아니었다. 의학에서 사용되던 어휘들이 정치학에까지 사용되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과 몸을 다스리는 치신(治身)이 일치하는 동양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배려의 양생술과 타자에 대한 배려의 통치술이 같은 지평 안에 놓여있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이란 용어와 개념을 처음으로 만든 사회학의 아버지 콩트 역시 사회학을 개념화할 때 의학 전통에서 용어들을 가지고 온다. 『실증철학 강의』에서 그가 사회를 상승 작용(synergie)과 교감(sympathie)이라는 두 가지 관계에 따라 조절되는 부분들의 통일체라고 정의한 것은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용어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야수의 육체에, 천재의 두뇌, 그리고 신기의 메스를 지닌 사나이 닥터 K!! 그라면 어떻게 집합적 신체, 사회적 신체를 구성해야 할지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의학과 정치학은 단순한 유비관계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체’라는 신체, 몸을 구성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서, 새롭게 구성함으로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창안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세포가 이루어져 하나의 몸을 이루듯이, 공동체 역시도 하나의 정치적 신체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의학에서 정치학이 파생되었다면, 정치학을 제대로 보기 위해 다시 의학을 소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주권 혹은 권력, 그리고 공동체라는 신체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몸’을 봐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이클 하트가 들뢰즈의 철학을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이것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인간, 세포, 바위, 새, 나무)은 똑같은 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따라서 똑같은 홈패임, 배치들, 조직 대안들 등등을 통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식물의 생장이나 새의 교미 혹은 지질 형성에서 다양체들에 대해 분석을 할 때,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체와 은유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바로 그 동일한 ‘다양체’들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들은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속의 어느 곳에서든 그러한 다양체들이 작동하는 방식, 이중 분절이 작동하는 방식, 배치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런 방식들 사이에 어떠한 대안들이 존재하는가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치적 조직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싶다면, 세포 생물학이나 식물 재생산을 연구해도 무방하다.
-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그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동일한 다양체들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정치적 조직화를 세포생물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계체론과 유기체론의 대립을 넘어
그리고 이처럼 신체를 통해 사유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계론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국가 혹은 사회는
단순히 기계와 같은 것일까? 우리는 집합적 신체를 생각할 때도 아직 이러한 기계론적 사유에 머물러 있다. 집합적 신체라 할 때도
그것은 ‘나’라는 개체와 ‘너’라는 개체가 상호계약을 맺어 하나의 신체를 맺는 것이라는 식의 환원주의에 머무르고 만다. 그러나 칼
슈미트가 지적하듯 합리적 주체들간의 계약에 따른 기계론적 모델로서의 국가 모델은 허구적이거나 잘해야 신화적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개체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아직도 주체라는 논의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너가 선재하고 이것들 간에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은 관계를 사유하는 듯 하지만, 아직도 관계가 아니라 존재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나와 너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나와 너는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조와 주체의 문제 마찬가지 아닐까? 억압하는 구조가 먼저
있고, 이를 바꾸려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와 주체는 동시에 생겨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도를 깨지 않고는 늘
주변만을 맴돌뿐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언제나 기계론적 해방, 기계론적 자유, 기계론적 평등에 머무르고 말 뿐이다.
물론 개체주의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개체를 무시한 전체,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논리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흔히 국가나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한다고 할 때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머리로서의 주권을 상정하고, 그것을 따르는 손발을 사유하는 전체주의의
이미지이다. 그렇게 하나의 단일한 중심으로서의 신체를 국가에 적용했을 때의 논리는 무언가 일사분란하고 질서잡힌 신체의 이미지
속에서 도출된다. 그렇지만 이는 실제의 신체라기 보다 이미지 속에서의 신체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신체를 제대로 사유할 때,
이러한 도식적인 공동체적 질서를 넘어설 수 있다.
여러 신체가 모인다고 했을 때 이는 단순히 개체들의 합으로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체주의적 기계론과 전체주의적 유기체론을 넘어서 사유하기!!
그렇다면 개체들의 단순한 연합 정도로 코뮨을 이해하는 방식의 개체주의와, 개체들의 차이를 잡다로 이해해 버리는 것으로서의 전체주의 이
둘 사이의 길은 없는 것일까? 즉 다자가 일자가 되는 방식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자가 무관심하게 다자로 남아있게 되는 것도
아닌 방식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방식이 사유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다자를 긍정한다고 할 때 조차도 이것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임을 강변하는 방식이라거나 혹은 각각이 평등한 주체임을
주장하는 방식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우리는 각각의 개별적 존재들이 아니라 일의적 존재인지, 그 안에서 어떤
자유와 평등을 담보하는지 밝히는 것, 그때만이 우리는 몸의 존재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 속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신학을 새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 칼 슈미트가 계약론적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神學)과 정치를
연계시켜 주권을 사유하는 정치신학을 구성했다면, 우리는 의학의 모델을 통해 정치를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슈미트의
정치신학(神學)이 아닌 새로운 정치신학(身學)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이 때의 몸은 단순히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몸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사회, 생명이라는 대우주를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일자들의 합으로서가 아니라
그렇다고 다자도 아닌, 이 둘 사이의 길. 이를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체들의 합일로서의 신체’이고,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관없는 신체로서의 ‘다양체’,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일즉다, 다즉일’의 신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몸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공동체와 생명이라는 대우주를 사유하기. 이것이 몸과 정치에서 하고자 하는 바이다.
합일, 다양체, 일즉다 다즉일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농담이고 궁금하면 앞으로 올라올 글들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아요.
_ 담담(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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