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맛; 영화 「후궁-제왕의 첩」
이번에는 좀 가볍게 가보자. 앞의 글들이 너무 무거워서 재미가 없다는 반응들이 있어서. ㅜㅜ 원래 그렇게 딱딱하게 무게 잡는 사람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지적했듯이 내 자신이 무척이나 많이 알아서 남들에게 뭘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한다거나, 행여나 위험한 주장 내세우며 “나를 따르라” 선동하는 그런 위인도 못된다. 그저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된다고, 꼭 남들과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백수일 뿐. 여튼 새해 첫날부터 딱딱한 이야기 읽기 싫으실텐데 오늘은 쉬어가는 셈치고 영화평으로 가볍게 읽을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 한 편 보신다고 생각하시고 편안히 즐기시길〜
오늘 이야기 할 영화는 바로 「후궁-제왕의 첩」이다. 안 보신 분들이 더 많을 것 같기도 한데. 뭐, 보신 분들 중에도 대충 스킵해 가면서 중요 부분만(?) 빨리감기 해가며 본 사람들이 대부분일거다. 어쨌든 보셨든 안 보셨든 상관없다. 어찌보면 뻔하디 뻔한 영화다. 구중궁궐의 암투, 그리고 배신, 거기에 얽힌 치정.
여기에 에로틱 사극이라는 선정성까지 더해 영화는 자극적인 멘트들로 홍보 포인트를 잡았다. 포스터에서도 ‘지독한 궁, 광기의 정사’라는 카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미디어에서도 여배우의 파격적 노출과 강도 높은 베드신 장면을 강조했다.^^ (그래서 잔뜩 기대에 차서 본 남자들이 기대치에 못 미친다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 여튼 인터넷에서 후궁을 치면 자동검색어로 후궁 노출, 후궁 엑기스(?) 이런 말들이 붙으니 뭐 노이즈 마케팅으로서는 일단 성공한 셈..ㅡㅡ;
그럼 왜 많고 많은 영화중에 이 영화를 골랐냐고? 개봉한지도 꽤 됐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다루는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음…본인이 조여정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런 거 절, 절대 아니다…ㅡㅡ)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란 단지 ‘정치’를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더 정치적일지 모른다. 삶을 정치화하기, 정치적인 것을 정치에 한정시키지 않기, 그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단지 궁궐 내 권력싸움이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의미말고도 더 정치적인 것처럼 보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후궁
영화는 이 세 사람, 화연, 성원대군, 권유의 삼각관계를 기본으로 얽히고설킨 욕망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왕의 계비로 들어간 화연(조여정)과 왕의 이복동생 성원대군(김동욱), 그리고 내시 권유(김민준)의 삼각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는 삼각관계 아니면 이야기거리가 없는걸까라는 의구심이 잠깐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권유와 화연은 한 집안에서 자라 둘이 좋아하던 사이였으나 조여정이 계비로 간택되면서 헤어질 상황에 처한다. 둘은 야반도주를 결심하지만, 화연의 아비에 붙잡혀 권유는 남성성(ㅡㅡ;)을 잃게 되고 화연은 궁궐에 들어간다. 또다른 주인공인 성원대군은 우연히 만난 화연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화연이 이복형인 선왕의 계비가 된 이후 화연에 대한 마음을 접고 궁궐 밖에서 권력과는 멀리 떨어져 생활을 한다. 하지만 권력욕에 눈이 먼 성원대군의 친모인 대비가 자신의 친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선왕을 독살하게 되면서 성원대군은 왕위에 오르고, 화연의 아비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시로 궁에 들어온 권유까지 한 자리에 모이게 됨으로서 사건이 시작된다.
선왕이 죽고나서 성원대군을 앞세워 수렴청정을 하던 대비는 기존의 선왕의 세력들, 화연과 그의 가족들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대비로서는 화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선왕의 아들과 부인을 살려놓을 수 없었다. “지금 싹을 자르지 않으면 다시 당할 수밖에 없는” 궁궐의 이치상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 했다. “궁에서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화연에게 연정을 품었던 성원대군은 그녀에 대한 동정과 욕망을 동시에 느끼며 대비의 뜻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여기에 화연의 아이가 선왕의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권유까지 가세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욕망의 끝을 향해 치닫는다. 결말은 스포일러이니 안 보신 분들을 위해 패스.
성원대군은 점점 자신의 무력함에서 벗어나고자 이복형의 아내를 탐하게 된다.
권력의 수레바퀴, 후궁
감독의 전작 「혈의 누」 역시 욕망의 피비린내 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김대승 감독의 전작 「혈의누」가 1800년대 초반 제지공장이라는 자본주의적 공장체제가 한 외딴섬의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과정 속에서 그 안의 여러 인물들 사이의 적나라한 욕망의 교차점을 잘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 역시 궁궐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각각의 인물군상이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어떻게 파멸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아들을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대비의 욕망, 가질 수 없는 형수를 갖고 싶어하는 왕의 욕망, 궁녀에서 후궁이 되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금옥의 욕망, 마지막으로 권력의 맛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는 화연의 욕망까지.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들은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누구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유달리 권력이나 돈의 맛에 탐닉하는 이들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주인공 화연이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서서히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게 되었듯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독살까지도 서슴지 않은 대비 역시도 처음에는 후궁이었던 자신과 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권력의 맛을 터득했던 것 뿐이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누구나 권력의 맛을 보게 된 이라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우연하게 왕의 성은을 입어 첩이 된 화연의 몸종 금옥의 대사“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요. 밑에 있을 때는 못 올라가지 싶더니, 위에 오르고 보니 내려가기가 싫네요” 처럼. 권력의 맛은 그처럼 한 번 맛들이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달콤함이다.
이 공간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도 권력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어두운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색은 임금이 입고 있는 곤포의 붉은 색 뿐임은 의미심장하다. 이 붉은색은 영화속 대사에도 나오듯이 “수백번을 담가 색을 내야 이렇듯 피처럼 붉고 고운 빛깔”이며 “주위의 모든 색을 빨아들여 더욱 그 존재감을 발하는 임금의 색”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두운 공간에서 모든 빛은 하나의 절대권력으로 회수되며, 모든 욕망은 하나로 모아진다.
그런 점에서 제목인 후궁의 의미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후궁은 화연 한 사람만이 아니다.(엄밀히 말하자면 화연은 실제로 후궁은 아니다. 정실부인이 죽고 나서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인 계비다) 선왕의 계모인 대비마마도, 화연의 몸종으로 궁에 들어와 성은을 입어 첩이 되는 금옥 역시 후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리고 욕망을 쫓아 파멸하게 되는 영화속 등장인물 모두 후궁이기도 하다. 또한 후-궁(後-宮)이라는 것이 원래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궁궐의 뒤편이라는 의미라면 우리네 삶 자체가 이처럼 모두 후궁에서 벌어지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욕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요. 밑에 있을 때는 못 올라가지 싶더니, 위에 오르고 보니 내려가기가 싫네요”
권력이라는 문앞에서
그러나 권력이 누군가에 대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강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국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이들이 욕망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의 생을 그대로 그 흐름 속에 내맡겨 버리는 자들이다. 자신은 자유롭게 권력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들이 욕망하는 바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욕망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욕망하는 것이고, 항상 욕망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대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순간 그것은 자기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욕망 자체를 욕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욕망 없이 살게 한다.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 말고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권유가 영화의 마지막에 “이런꼴로 사느니 다 정리하고 함께 떠나자”는 말에 화연은 “궐밖으로 나가면 모두 죽어”라는 말로 대답한다. 궁궐은 오로지 죽어서야만 나갈 수 있는 공간이며, 그들이 궁궐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은 실제 죽어서 수레에 실려나갈 때 뿐이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가 문을 지키고 밖을 못나가게 해서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문은 누가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일까? 결국 스스로가 만든 문 앞에서 그 문을 스스로 나가기 포기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아니 그 문 역시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닐까?
모두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과연 나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문지기는 누구인가?
선거가 끝나고 주변에 결과 때문에 멘붕인 사람들이 많다. 각자 이번 대선의 패배 요인을 분석하기에 바쁘다. 인구의 노령화, 50대들의 자산가치 하락에 대한 두려움, 이정희 토론의 역효과, 친노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 등등. 그리고는 결국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어쩔 수 없다는 한탄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선거가 우리의 삶을 구원해 줄 수 없듯이, 선거가 우리의 삶을 절망으로 빠뜨리게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항상 권력을 타인에 대한 지배욕으로, 정치를 자기의 삶과 무관한 권력투쟁으로 사유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처럼 사유될 때 언제나 우리는 자신에 대해 권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때만이 우리는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에서 벗어날 수도, 헛된 희망에 목매달지 않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 짓기로 하자.
대다수의 타인들은 자기애나 자기에 대한 혐오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환멸이나 과도한 자기애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상 배려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들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 자기 자신과 홀로 있을 수 없는 결과를 야기시키는 이 결여 속에서 자기 자신에 환멸을 느끼거나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바로 이 홀로 있을 수 없는 능력의 부재 상태에서 아첨꾼과 아첨의 위험이 달려듭니다. 이러한 비고독 상태에서, 요컨대 자기 자신과 충만하고 적합하며 충분한 관계를 설정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에서 타자가 끼어들며, 말하자면 그가 이 결여를 채우게 되고 또 이 부적합을 말로 대체하고 채우게 됩니다. 그래서 아첨을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내에 존재하는 결함으로 인해 아첨하는 자에게 의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405쪽
_담담(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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