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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혈자리서당

중심을 잡는 탁월함, 소해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1. 15.

대통령과 소해의 불편한 진실

 

이영(감이당 대중지성)

 

대선정국이 싸늘하다. 대통령을 뽑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게 허랑한 때가 있었나 싶다. 내가 처음 대통령을 뽑았을 때의 기억이 난다. 1987년, 거역할 수 없는 불길 속에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6.29선언이라는 의미있는 열매를 얻었다. 스무 살의 나는 우리가 바라던 대통령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며 투표했었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그 이후로 군중을 믿지 않는, 아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급기야 투표 거부증으로 나타났다. 한 번의 극복사례가 있긴 했지만 오히려 참혹한 결과만 가져왔다. 더 이상 대통령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시대에 대통령이란 참 허접한 이름이라는 것.


하여 오늘 나는 이 대통령이란 이름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수천 년 내려온 동양의 지혜에서 대통령이란 이름은 어떤 것인지, 그 이름과 나의 몸은 어떻게 작용하는지, 혈자리 소해는 그 이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탐사해 보자.

 

     나의 몸에 표를 하나 꾸욱 찍는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심(心), 몸의 대통령

 

그렇다면 우리 몸에서 대통령이란 이름에 걸맞는 곳은 어디일까? 국가를 수호하고 헌법을 지키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시키는 임무를 띤 곳. 이 막중한 임무를 띤 곳을 콕 찝어 말할 수 있기나 한 건가. 그런데 동양의학의 바이블 『황제내경』에는 이를 서슴없이 말한다.

 

(心)은 군주의 소임이니 신명이 나온다. 폐는 상부의 소임이니 치절이 나온다. 간은 장군의 소임이니 모려가 나온다. (…) 무릇 이 십이관은 서로 각기 맡은 바의 소임을 잃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군주가 밝으면 아래가 편안하니 이로써 양생하면 장수할 것이다. 군주가 밝지 않으면 십이관이 위태로워지고 도가 막혀서 통하지 않게 하여 형이 크게 상한다.

『황제내경·소문』「영란비전론」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군주의 기능은 실로 대단하다!

 

『황제내경』에는 열 두가지 장기들의 역할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몸의 작동 메커니즘과 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이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몸은 곧 사회와 연동된다는 것이다. 몸의 작동원리는 사회의 작동원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용한다는 것. 이것은 나아가 우주와 연결된다. 이 유기적 작용은 대소의 차이만 있을 뿐 시스템 자체는 완벽하게 조응한다. 그래서 땅의 것은 하늘의 것이며 하늘의 원리는 땅의 원리다. 이 조응체계 안에 뭇 생명이 있다.  

 

이러한 생명체계 속에서 당당히 맨 앞자리를 장식한 것이 심이다. 심이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 일게다. 게다가 심을 군주라 이르지 않는가. 몸과 사회가 동시에 작동되는 체계 속에서 군주의 밝음과 내 몸의 편안함은 일맥상통한다. 이 연동체계 속에서 보면 군주는 대통령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차원에서 군주란 무엇일까? 그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 시대의 대통령이란 이름도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드러나지 않을까. 
   
내 몸의 트라이앵글

 

인용문을 찬찬히 살펴보자. “심은 군주의 소임이니 신명이 나온다.” 심과 군주와 신명의 트라이앵글이 그려진다. 이 삼각구도에서 우선 심을 보자. 동양의학에서 오장육부는 유형의 물질이기도 하고 작용력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래서 심은 유형의 물질인 심장을 나타내면서 심의 작용력을 말한다. 이럴 땐 설명하기 쉬운 것부터 하는 법이다. 일단 심장부터 보자. 심장은 어떤 일을 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피를 온 몸에 뿌려주는 일을 한다. 심장이 박동하면서 온 몸에 퍼져 있는 혈맥(혈관)을 통해 피라는 영양물질이 공급된다. 이러한 심장의 작용을 동양의학에서는 기혈작용이라 한다. 기란 심장을 포함한 오장육부를 순환하는 무형의 흐름이다. 심장의 박동은 이 무형의 흐름을 추동한다. 그 흐름에 탑재되는 것이 혈이다. 결국 심장은 기혈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근거지인 셈이다.

 

이러한 심장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작용력은 무엇일까? 우리 몸의 정신과 의식, 사유 활동에 미친다. 내 몸의 형상·안색·눈빛·언어·반응·팔다리의 활동과 같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모두 심의 작용력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심의 작용력이 신(神)이다. 말하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이 행위의 바탕에 신이 있다. 신은 기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혈이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수액이 제공하는 충분한 양분을 받으면 신은 자양된다. 그렇다면 트라이앵글의 두 번째, 신명(神明)은 무엇일까? 중국 명나라 때의 저명한 의학자, 장경악의 말을 들어보자.

 

심은 일신의 군주로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조화(창조)하는 능력을 갖추어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기능에 응하니, 장부(腸腑) · 백해(百骸)가 오직 심의 명령을 받으며, 총명함과 지혜가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신명이 이곳에서 나온다고 한다.

 

장경악 『유경

 

앞서 설명한 심의 유형적·무형적 작용을 모두 아울러 신명이라고 장경악은 말한다. 그래서 심의 유형적 작용(심장)은 장부와 연결되어 심의 명령을 받고, 무형적 작용(神)은 백해와 연결되어 심의 명령을 받는다. 심의 음양작용, 이것이 신명이다. 신명은 생명차원에서 하늘과 조응한다. 그래서 하늘의 이치는 그대로 내 몸에 새겨져 몸의 조화와 정신의 총명함과 지혜로 드러난다. 이러한 신명의 작용을 사회적 인격체로 명명한 것이 군주다. 생명차원에서 보면 군주는 그대로 몸의 생리와 같다.

 

심은 형체의 왕이다. 그리고 신명의 주인이다. 스스로 명령을 내고 스스로 명령을 받는다. 스스로 금하고 스스로 부린다. 스스로 빼앗고 스스로 취한다. 스스로 가고 스스로 멈춘다.

 

『순자』「해폐편」

 

심은 몸의 군주로서 모든 기관을 통솔하지만 군림하지 않는다. 이것은 군주가 있음으로, 배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외부의 구속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몸이 스스로 제어하는 자율성을 만들어내는 배치. 이 자율성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는 자리가 군주의 자리다. 하여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 명령을 받는 ‘스스로 시스템’을 운용하는 군주. 그것은 곧 생명이다. 우리는 심을 심히 오해했다. 심은 결코 우두머리로서의 군주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자율성을 심히 오해했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다. 하지만 몸은 유기적인 관계의 망에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 자율성이 깨지기도 한다. 이 생명의 자율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만성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소해를 떠올려야 한다.

 

심경의 바다, 소해

 

소해는 심경의 오수혈 중 합혈이다. 정경수경합의 경혈이 바다로 모여드는 합혈은 만성병을 치료할 때 꼭 사용하는 혈이다. 소해는 팔꿈치 안쪽 가로금 끝의 오목한 가운데 있다. 팔을 구부려 손이 머리에 닿게 한 다음, 침혈을 잡는다. 또한 팔을 굽혀 그 마디에 있는 혈이라서 곡절(曲節)이라고도 한다.

 

소해의 소(少)는 수소음심경을 가리킨다. 해(海)는 백 갈래로 난 물길이 모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해는 수소음경맥과 기가 모인 곳이어서, 기맥의 강성함이 마치 백 갈래 물길이 모두 모인 바다와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소해는 오행 중 수(水)에 해당한다. 그래서 심화(心火)로 인한 심통(心痛), 심약(心弱), 협심증, 두통, 이명(耳鳴)에 사용한다. 수가 심장의 열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혈이 뭉쳐서 생기는 마비나 경련에도 혈 주위 기혈을 원활히 소통시킨다. 이것이 심의 유형적 작용에 속하는 병리를 완화시킨다면, 신경쇠약이나 히스테리, 정신분열증, 전광(정신에 이상이 생긴 병증)과 같은 심의 무형적 작용(神)에 속하는 병리도 안정시킨다.

 

2012년 12월 19일, 우리는 어떤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까? 소해를 쓰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자율성에 근거한 결과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생생불식의 우주적 순환을 만들어 낼 능동적 개입을 행사해야 한다. 여기서 능동적 개입이란 물론 투표다. 아마 이번 투표가 나에겐 몸과 사회와 우주가 연동되는 생명차원의 첫 투표가 될 것이다.

 

   중심이 필요한 것은 생명의 이치에서나 사회의 이치에서나 똑같다. 어떻게 해야 전체를 자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중심을 잡

   을 수 있는지는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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