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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혈자리서당

오행의 스텝, 오수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1. 1.

오수혈(五輸穴), 미로와 치유의 길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스물한 살, 허리디스크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숱한 병원을 들락거리며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허나, 병원문이 닳도록 들락거려도 디스크는 좀처럼 내 몸을 떠날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혀를 찼다. “젊은 나이에...” 그럴수록 나는 더 의사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나요?” 최첨단의 장비들과 최신 시술들을 이용해 병을 고치겠노라고 호언장담하던 의사는 한 마디 내뱉었다. “아이 돈 노!” 젠장!

 

나는 곧 한의원을 찾았다. 기적이 일어났느냐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젠장, 젠장!) 그리하여 지금도 이 고질병을 몸에 달고 산다. 비가 오면 허리가 쑤신다는 할머니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의사는 좀 달랐다. 그는 허리가 아프다는 나에게 팔과 다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윽고 팔과 다리에 수북이 침 세례가 쏟아졌다. “선생님, 전 허리가 아프거든요?” “알아! 기다려봐!” (지금까지도 기다리고 있다. 쩝!) 팔과 다리에 침을 꽂고 치료는 끝이 났다. 그러기를 수차례. 그도 말을 잃었다. 불치의 병인 것인가! 나의 조급증은 이 지극히도 느린 의학에 금방 싫증을 가져다주었다. 그냥 살자.

 

그러나 한의사는 내게 병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는 종종 말했다. “병의 뿌리를 뽑아야 허리도 낫는다.” 나는 되물었다. “어디가 좋지 않은 건가요?” “신장이 좋지 않아. 그래서 허리가 아픈 거야. 신장이랑 허리랑 연결되어 있거든.” “그럼 신장에 침을 맞아야 하나요?” 한의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침묵을 이해한다. ‘천하의 무식한 놈!’ 한의학은 병이 오장육부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한다. 오장육부의 병이 몸의 병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이 회로를 알아야 병도 낫는다. 그럼 오장육부의 병은 어떻게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배우는 침구학(針灸學)에서는 팔과 다리로 고친다. 엥? 팔과 다리로? 팔과 다리에 뭐가 있길래? 답은 경락과 혈(穴)이다. 누차 강조했듯이 경락은 오장육부와 동급이다. 몸 중앙에 있는 오장육부가 온몸에 뿌리를 내리듯이 퍼져있는 것이 경락이다. 혈(穴)은 그 뿌리의 마디다. 뿌리(經絡)에 있는 마디들(穴)을 자극시켜서 오장육부라는 열매의 병을 고치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니 나의 질문은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가. 

 

병엔 길이 있다. 병이 몸으로 들어오는 길도, 몸 밖으로 나가는데도 길이 있다. 생각해보시라. 병이 무작정 들이닥친 것인가. 병을 만든 생활의 길이 있고 병은 그 길을 타고 왔을 뿐이다. 병의 길, 나는 이 길을 알고 싶었다. 모든 환자들도 마찬가지의 심정일 것이다. 길을 알아야 출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몰랐기에 나는 오랫동안 길을 헤맸다. 어느 병원으로 갈 것인가. 나의 병은 어디서 치유될 것인가. 오수혈(五輸穴)은 병의 길에 대한 사유다. 우리는 오늘 이 길을 탐사할 예정이다.

 

길 찾으러 고고씽!

어떤 길이 맞는지 고민하기 전에, 한 번 직접 길을 떠나보자!

 

불친절한 오수혈씨

 

오수혈은 복잡하다. 흡사 매트릭스 같다. 왜 그런가. 그것이 병과 치료, 길과 흐름, 오행과 계절 등 수많은 변수들과 맞물려 있기에 그렇다. 병의 진단으로부터 치료까지, 시공간과 흐름까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오수혈은 생리(生理)와 병리(病理)가 만나는 자리다. 그렇기에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기도 길이 있다. 차근차근 따라가면 된다.

아마 많이 궁금했을 것이라 믿는다. 몸에 365개의 혈이 있다고 하면서 왜 한 경맥의 5개 혈만 짚고 넘어가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선택된 것인가. 그걸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정혈이다, 형혈이다’ 하는 것이 이상하셨으리라. 지금까지 <혈자리서당>에서 다뤄온 혈들은 모두 오수혈이다. 오수혈은 간단히 말하자면 12경맥 안에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성질을 가진 혈들의 묶음이다. 오행혈(五行穴)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행에 의해 분류된 12경맥 안에 또 오행의 매트릭스를 펼쳐놓았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한 것인가. 일단 표 하나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경락

  合(水, 土)

經(金, 火)

  腧(土, 木)

 滎(火, 水)

 井(木, 金)

 수태음폐경

 척택(尺澤)

 경거(經渠)

 태연(太淵)

 어제(魚際)

 소상(少商)

 수양명대장경

 곡지(曲池)

 양계(陽谿)

 삼간(三間)

 이간(二間)

 상양(商陽)

족양명위경

족삼리(足三里)

해계(解谿)

함곡(陷谷)

 내정(內庭)

 여태(厲兌)

 족태음비경

 음릉천(陰陵泉)

상구(商丘)

 태백(太白)

 대도(大都)

은백(隱白)

수소음심경

 소해(少海)

 영도(靈道)

신문(神門)

소부(少府) 

소충(少衝)

 수태양소장경

 소해(小海)

양곡(暘谷)

 후계(後谿)

전곡(前谷)

 소택(少澤)

족태양방광경

 위중(委中)

곤륜(崑崙)

 속골(束骨)

통곡(通谷)

 지음(至陰)

 족소음신경

 음곡(陰谷)

부류(復溜)

태계(太谿)

연곡(然谷)

 용천(涌泉)

수궐음심포경

 곡택(曲澤)

간사(間使)

대릉(大陵)

노궁(勞宮)

 중충(中衝)

 수소양삼초경

 천정(天井)

지구(支溝)

중저(中渚)

액문(液門)

관충(關衝)

 족소양담경

양릉천(陽陵泉)

 양보(陽輔)

 임읍(臨泣)

 협계(俠谿)

규음(竅陰)

 족궐음간경

곡천(曲泉) 

 중봉(中封)

 태충(太衝)

 행간(行間)

 대돈(大敦)

 

그림으로 본다면? (클릭해서 자세히 보세요^^)

 

 

여기에 나와 있는 혈이 오수혈의 전부다. 도합 60개. 현기증이 나실 거다. 대체 이건 뭔가. 분노(?)를 가라앉히시고 그냥 눈 질끈 감고 한번 보시라. 뭘 탐구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 그런데 이 황당한 표는 누가 만든 것인가. 일설에는 편작(扁鵲)이 표의 기준점이 되는 오수혈을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신비의 투시능력을 가지고 몸 안의 오수혈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라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오수혈은 어디든 음양오행의 리듬이 있다는 중국사유의 현현(顯現)에 가깝다. 경락이라는 큰 줄기를 음양과 오행으로 나누고 그 안에 또 오행의 리듬이 있다는 사유는 거시에서 미시를 관통하는 다섯 리듬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수혈에 대한 자료는 극히 드물다. 너무 당연한 체계에서 산출된 것이기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셈이다. 하지만 초보자들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수천 년간 동양의학의 핵심을 이루던 침술의 초식, 오수혈은 매우 불친절하다. 원리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거나 그냥 외우는 것이 낫다는 조언이 들려올 뿐이다. 재밌다. 원리를 알아야 탐구가 시작될 수 있다는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득이 된다. 좀더 가보면 이해가 되실 게다.

 

 

 

오수혈 혹은 매트릭스            

 

오수혈에 대한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황제내경』이다. 이 책은 보면 볼수록 신비주의다. 동양의학에서 최고로 오래된 책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 쓰이는 것들 대부분이 여기에 그대로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첫 출발부터 완전성을 가진 이상한 책.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 책엔 오수혈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은 아예 없다. 대신 이런 문장만 등장한다. “오장(五臟)에는 각각 오수혈(五輸穴)이 있어 모두 25개의 수혈이 있고, 육부(六腑)에는 오수혈과 따로 원혈(原穴)이 있으므로 모두 36수혈이 있다.” 뭔 말인지 알 수 없다. 대신 원혈을 뺀 나머지 55개의 혈자리가 오수혈의 초기 형태였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원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태연혈을 참조하시라.) 그런데 왜 이게 필요했던 것일까. 

 

단서는 이름에 있다. 오수혈(五輸穴)은 직역하면 ‘무언가를 나르는(輸) 다섯 개(五)의 혈자리(穴)’라는 뜻이다. 간혹 오유혈(五兪穴)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뜻은 얼추 비슷하다. 유(兪) 또한 나아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나르고 나아가게 하는 마디가 오수혈인 셈이다. 핵심은 여기다. 오수혈은 병이 밟는 다섯 가지 코스를 표현한다. 병이 겉에 있느냐 오장육부로 들어갔느냐도 오수혈로 진단한다. 가령 감기에 걸렸다고 해보자. 감기는 보통 폐(肺)로 들어가서 기침과 콧물 등을 유발한다. 이럴 때는 폐경(肺經)의 오수혈 중 합혈(合穴)에 통증이 생긴다. 반면 으슬으슬하고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을 때는 폐경의 정혈(井穴)에서 통증을 느낀다. 결국 오수혈이 일종의 진단체계이자 병의 진행을 파악하는 체계로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표현하는 오수혈. 병의 진행 역시 자연의 일부다!


오수혈이 계절과 맞물려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병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오수혈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봄에 새싹이 돋듯이 병이 시작되고 여름처럼 맹렬하게 몸을 뒤흔들어놓았다가 가을에 열매를 맺듯이 뚜렷한 증상으로 드러나고 겨울에 몸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다른 병으로 전이될 씨앗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병 또한 계절의 변화처럼 수시로 변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러한 변화를 몸에 구체적으로 표현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병도 변한다. 거기엔 흐름과 마디가 있다. 이 변화의 변곡점 혹은 마디들이 바로 오수혈이다. 헌데 이 마디들이 또 치료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병리(病理)와 생리(生理)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수혈은 병과 치료의 차서(次序)이자 마디다. 이 마디에 개입하기 위해 오수혈이라는 체계가 발명됐다. 이는 동양의학의 오래된 사유, 생리와 병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를 살게 하는 생리적 리듬이 곧 병리적 고통과 함께 간다. 생리이자 병리인 삶. 이 삶의 리듬과 순서, 흐름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동양의학이 다룬 앎의 대상이다. 오수혈은 그 앎의 의지로부터 탄생했다.

 

계절이 병과 오수혈의 시간적 리듬을 표현한다면 오수혈 각각의 이름들은 공간적 지표로 사용된다. 주지하듯이 오수혈은 길이다. 병의 길이자 치료의 길인 동시에 우리 몸을 순환하는 경락(經絡)의 마디들이다. 오수혈 각각의 이름은 그 경락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경락은 손끝과 발끝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손끝과 발끝으로 갈수록 경락의 길은 좁아진다. 반대로 몸통으로 갈수록, 해당 오장육부로 갈수록 경락의 길은 오장육부만큼이나 커진다. 정형수경합(井滎輸經合)이라는 이름들은 이 길의 편폭을 보여준다. 손끝과 발끝에서 시작되는 우물(井), 물이 넘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滎),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냇물(輸) , 냇물이 모여서 이루는 강(經) , 강이 모여서(合) 바다(五臟六腑)로 흘러들어가는 것. 정형수경합은 수로(水路)를 우리 몸에 옮겨놓은 형태인 셈이다. 

 

핵심은 정형수경합이라는 공간적 지형도가 몸 안의 기(氣)의 강밀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기의 응집과 분산을 조절한다. 이 응집과 분산을 포착하는 것. 여기에 치료의 맥점이 있다고 봤던 것. 그렇기에 이 길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복잡하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가 펼쳐진다. 여기에 오행(五行)까지 겹쳐지면 그야말로 매트릭스가 따로 없다. 앞의 표는 바로 이 매트릭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럼 이것이 끝이냐고? 택도 없다. 이건 그냥 오수혈의 구조만 간략하게 스케치한 정도다. 여기에 오수혈이라는 마디를 흘러 다니는 기의 흐름, 양경(陽經)과 음경(陰經)의 오행배열이 왜 다른 것인지까지 더해지면 아주 까무라칠 지경이다. 그래서 이런 말은 정당하다. “원리는 됐고요, 그냥 외울게요.”

 

오수혈에는 병리와 생리가 밟아나가는 다섯 개의 스텝, 시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혈 중의 혈인 셈이다. 멋지지 아니한가^^

 

오수혈은 매트릭스다. 그만큼 복잡하고 그만큼 다채롭다. 한번 빠져 들어가면 좀처럼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접속은 누구나 용이하다. 저 표만 외우면 된다.^^ 아니 읽어낼 줄 알면 된다. 저 표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바로 실전이다. 이 세계엔 아는 것과 실전 사이에 간극이 없다. 실전을 거듭하다보면 원리를 차츰 깨닫게 된다. 장담한다. 매트릭스엔 접속 말고 그 세계를 파악할 방법이란 없는 것이니까. 오수혈도 그렇다. 쓸 수 있어야, 쓰여야, 유용해야 지속가능하다. 병리와 생리가 맞물리고 시간과 공간이 겹치고 길과 흐름으로 이루어진 혈(穴), 오수혈이다.

 

 

* 2편에서는 오수혈을 보다 깊이 파헤친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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