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이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처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면 영화의 제목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왜 ‘디 아워스(hours)’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흐름을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시간 순서대로 흐르는 ‘버지니아 – 로라 – 클라리사 – 버지니아’의 구조에서, 앞부분을 연결되는 맨 뒤로 배치하면 ‘로라 – 클라리사 – 버지니아’의 흐름이 된다.
01 로라 × 리처드
신해철의 노래가사처럼 로라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나에게 쓰는 편지, 1991)’을 모두 갖춘 미국 중산층 집안의 아내이다. ‘남편들은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나, 그녀는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혼자 속으로 삭인다.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착하다’는 것이 꼭 ‘좋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몸이 안 좋은 로라 대신 아들의 아침을 챙기는 ‘착한’ 남편 댄은 그런 의미에서 ‘악하진’ 않지만, 로라에게는 ‘나쁜’ 사람인지도 모른다. 댄은 로라가 읽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거나 못한다. 화목한 가정이 목표인 댄은 ‘악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 로라의 숨통을 조이는지, 그래서 자살이나 가출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착함’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나쁨’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로라 역시 남편의 생일파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구색을 갖추려고 그저 생일 케이크를 굽는 것뿐이다. 눈치가 빤한 아들 리처드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엄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계획도 없다는 걸. 그리고 둘째를 임신 중이지만, 엄마는 이웃집에 사는 부인 ‘키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리처드는 알고 있다. 남편이 출근 후, 키티가 로라를 찾아온다. 로라, 우리집 개 밥 좀 줘. 그 말 하려고 왔어? 음....사실 자궁에서 뭔가 자라고 있대. 로라는 걱정마라며, 괜찮다고 키티를 안아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키티가 병원으로 떠나고, 리처드는 거실에서 불안한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뭐, 왜? 어쩌라고?? 로라는 리처드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쏘아붙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누워 있던 로라는 불현듯 일어나 수면제를 모두 챙기고는 리처드에게 말한다. 우리 다시 케이크 만들자.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빠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생겼어. 리처드는 엄마의 변덕을 이해할 순 없지만, 로라가 하고 싶은 걸 같이 하기 위해 식탁으로 온다.
케이크를 다 만들고 나서, 잠깐 있다 올 것처럼 옆집 아줌마에게 리처드를 맡기고 떠나는 로라. 그런데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에 리처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엄마!!!! 엄마!!!! 뒤늦게 리처드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지만 로라의 차는 그대로 멀어진다. 리처드는 엄마에게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영화는 로라의 모습을 버지니아 혹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으로 이어지도록 여러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오버랩’시키면서 보여준다. 버지니아가 자신의 세계 혹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로라 역시 버지니아와 댈러웨이 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그들과 ‘공명’한다.
로라는 급하게 차를 몰고 어느 호텔방으로 들어간다. 약을 꺼내놓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로라는 침대에 눕는다. 영화의 첫 장면, 버지니아의 몸이 강물에 잠겨 흘러가듯, 로라가 누운 침대 주변으로 순식간에 (강)물이 차오르며 로라를 집어 삼킨다.
바로 다음 장면, 버지니아는 소설을 구상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그녀가 죽을 필요는 없겠어.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로라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다. “안 돼, 도저히 못 하겠어!!” 결국 로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둘째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02 클라리사 × 리처드
리처드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차로 떠났던 그 시간에 갇혀 살고있다. 게다가 리처드의 동성애적 성향 역시 엄마로부터 영향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의 남자친구는 떠난 지 오래다. 뉴욕의 허름한 건물 꼭대기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리처드를 방문하는 유일한 사람은 옛 연인 클라리사다. 허나 클라리사도 이제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오늘은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처럼 “직접 꽃을 사와야겠어”라고 클라리사는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이름이 같은 클라리사 본의 별명은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이다.
오래 전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낸 해변의 어느 아침, 리처드가 클라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인사한다. “안녕,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리처드에게 갇혀 있었다고. 리처드는 엄마가 떠났던 시간에 붙잡혀 있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함께 했던 어느 아침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나에게 커다란 고통(리처드) 또는 행복의 전부인 시간(클라리사) 속에 그들은 멈춰 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이지만, 실상 우리의 시간은 째깍째깍 초침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리처드가 자살하기 전 흘리는 눈물은 엄마 로라에게 갇혀 지낸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떠나야만 했던 엄마를 뒤늦게 이해하게 된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였을까? 클라리사가 자신에게 묶여있지 않기를 바라는 리처드는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한다. “당신은 늘 자부심과 용기를 가장하며, 침묵을 덮으려고 항상 파티를 열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행복해 할까?" 리처드는 클라리사에게 묻는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꼴 좀 봐요. 그동안 내 삶과 행복을 지켜주느라 그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며 모두가 날 떠나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준 당신.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잖아요.” 이건 극 중 버지니아가 남편 레너드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그러나 리처드가 클라리사에게 남기는 글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03 버지니아 × 리처드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버지니아와 함께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나도 알아요. 내가 당신 삶을 망치고 있다는 걸. 내 인생의 행복은 당신 덕분이지만, 살아가며 더 이상 당신 삶을 망칠 수 없어요.”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가지만, 나의 존재로 당신이 계속 불행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와 리처드를 보면 결국 삶의 부조리는 외부적 조건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까?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가 어느 날 묻는다. 왜 당신의 소설에서는 누군가 꼭 죽어야 하냐고. 그러자 버지니아는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그래서 시인이 먼저 죽는다고 말한다. 1941년 남편과 언니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버지니아는 우즈 강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유서에서 버지니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의 부조리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간(hours)은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때문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조리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살은 단 하나의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리처드는 말한다. “클라리사, 당신 삶의 의미를 나한테서 찾진 말아요.” 버지니아의 죽음이 로라에게 흐르듯,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종의 ‘의식의 시간(hours)’을 갖게 된다. 그것은 버지니아가 말하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알게 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죽은 시인의 ‘해방일지’는 지금도 계속 써지고 있다.
글_청량리(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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