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새롭게 되풀이될 것이다
<성춘향成春香>(1961) | 감독 : 신상옥 / 주연 : 최은희, 김진규 | 107분
1960년에 개봉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처럼 전후 당시 메마르고 어려운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이 있었고, 한편으로 힘든 삶에 약간의 판타지와 대리만족을 채워주는 영화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은 <오발탄>과는 정반대에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한국영화가 양적으로 폭발했던 60년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1961)이 같은 해 동시 개봉되면서 ‘핫이슈’가 됐었다. 상업영화에 관객평점이 중요한 건 변함이 없다. 두 감독 모두 ‘춘향전’으로 승부를 걸고, 고가의 ‘총천연색’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한다. 당시 흥행감독 ‘홍성기 프로덕션’과 ‘신예감독 신상옥’의 대결이 볼만했는데, 결과는 신상옥 감독의 압승이었다. 영화 <성춘향>이 ‘대박’나자, 신상옥 감독은 이를 토대로 ‘헐리우드 스튜디오시스템’을 표방한 ‘신필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 실패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다 아는 이야기일수록 공을 들여야 한다는 거다. 홍성기 감독은 연극무대를 보여주듯이 방 전체를 ‘풀샷’으로 잡고 구도의 변화도 없다보니, 몽룡과 춘향 사이에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스토리는 다 알고 있다고. 그에 비해 신상옥 감독은 어떻게든 ‘예쁘게’ 만들어 보려는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는 카메라가 어느 위치에 있어야 그 장면이 더 좋아 보이는 지를 감각적으로 아는 감독이다. 카메라의 다양한 앵글은 화면을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고 몰입하게 한다.
다만, 당시 30세가 넘은 ‘최은희’와 ‘김진규’가 이팔청춘 16세의 춘향과 몽룡 역을 맡다보니 초반에는 집중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런 점이 아쉽다면 같은 해(!)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을 추천한다.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옷을 입은 듯, 두 사람은 ‘옥희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으로 등장한다. 같은 해, 같은 감독, 같은 배우의 영화 두 편이라니!!
성참판댁 딸 춘향은 방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절름발이’양반이다. 어머니 월매가 ‘기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뼈대 있는 가문인 사또의 아들 몽룡과 사랑에 빠진다. 아, 비극적인 사랑의 시작. 우여곡절 끝에 춘향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 몽룡이 간신히 ‘출또’하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단순한 ‘춘향전’의 줄거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가난하거나 혹은 불우하지만, 미모가 뛰어난 여주인공에 반한 건 다름 아닌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거나 손자다. 그들 주변에는 늘 ‘방자’와 ‘향단’과 같은 조력자는 물론 ‘변학도’와 같은 악의 무리들도 있다. 꼰대 회장이나 악의 무리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을 이룬다.
주변의 반대와 신분차이를 극복한 많은 로맨틱코미디의 러브스토리는, 조선 말 서민문학의 대표로 손꼽히는 ‘춘향전’을 그 원전이라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신상옥 감독은 ‘춘향전’의 그러한 상업적 흥행요소를 잘 파악해 낸 감독이다.
구설로 전해지던 이야기가 노래(판소리)가 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 그 ‘원형(原形)’적인 사랑이야기는 다른 버전, 다른 장르로 끊임없이 재탄생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미지의 ‘복제’가 아니라 ‘주제’의 변주다. 여기서 우리는 두 편의 또 다른 ‘춘향전’을 만나 볼 필요가 있다.
먼저 2010년에 개봉한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다. 제목부터 불순하다. 여주인공 ‘춘향’이 아니라 ‘방자’를 전면에 내세우다니. 도련님을 따라간 청풍각에서 방자는 춘향에게 첫 눈에 반한다. 방자는 머슴이지만, 어차피 춘향도 반쪽짜리 양반인지라 피차 가릴 것도 없다. 만일 <성춘향>(1961)의 방자가 ‘허장강’이 아니라 ‘최무룡’이었다면 춘향의 선택은 어땠을까? <방자전>은 그러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방자(김주혁)와 몽룡(류승범) 사이에서 춘향(조여정)은 고민한다. 신분은 미천하나 순박한 방자는 신뢰 가는 캐릭터인 반면, 혼인빙자에 출세욕에 찌든 이가 몽룡이다. 춘향은 사랑과 신분상승의 야망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고 둘 사이에 덫을 놓는 인물로 나온다. 캐릭터가 일단 ‘센세이션’하다.
혼인서약을 했으나 몽룡이 서울로 공부하러 간 사이, 춘향은 방자와 사랑을 나눈다. 물론 몽룡은 이미 둘 사이를 알고 떠난 거다. 다시 돌아온 그는 둘의 사랑(불륜)을 빌미로 자신의 출세길에 욕심을 낼 뿐이다. 결국 셋은 작당모의를 하고 춘향과 몽룡의 미담으로 변사또를 응징하고 몽룡은 두 계급 특진한다. 결국 몽룡은 결국 춘향을 배신하고 절벽에서 그녀를 떠밀어 버린다. 그러나 방자는 춘향의 행복을 위해 몽룡과 아름다운 사랑으로 마무리해 달라고 이야기꾼에게 부탁한다. 입으로 전해지던 춘향전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방자전>은 ‘춘향전’의 ‘프리퀼(Prequel)’인 셈이다.
주연 및 조연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에 조여정 배우의 노출씬까지 화제가 되어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 <방자전>. 어쩔 수 없는 상업영화의 노출전략이나 독특한 캐릭터 창조에 비해 다소 바삭해진 이야기 흐름은 잠시 접어두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춘향전이 나왔으니, 이제는 ‘변학도의 러브스토리’만 남았을까?
역경극복 로맨틱코미디의 원조에서 또다른 변주로의 현대판 춘향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들은 여러 설화들이 모인 ‘판소리 춘향가’가 발전하여 각색된 것이다.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와 더불어 ‘춘향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다. 수많은 ‘춘향전’의 원전은 ‘판소리’인 셈이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을 보면 알 수 있다.
각본가 출신의 김대우 감독답게 <방자전>이 새로운 캐릭터들의 창조로 나아갔다면, <춘향뎐>에서 백전노장 임권택 감독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원래 춘향전이 ‘판소리’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세기말이 지난 2000년, 더 이상 마당에 앉아서 판소리를 듣지 않는 시대에 임권택은 극장으로 판소리를 갖고 오는 방법을 택한다. “이팔청춘 열여섯 어화둥둥 내 사랑, 거장이 우리 소리에 녹여낸 이 시대의 고전”
영화는 걸쭉한 ‘조상현 명창’의 소리로 시작한다. 화면은 명창의 소리를 따라 남원으로 내려가고 또 그 소리에 맞춰 몽룡이 등장하고 춘향과 마주한다. 이 영화에서 판소리는 영화의 보조역할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 간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대사 없이 조상현 명창의 소리만 듣고 있는 게 더 잘 이해가 된다. 임권택 감독이 어떻게 연출했기에 배우들과 그 소리의 싱크율이 이리도 절묘할 수 있을까. 역시 100편 이상 영화를 연출한 노장 감독의 솜씨다.
소리를 배경삼아 리즈시절의 조승우(몽룡)에게 몰입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화면 바뀌면 조상현 명창의 공연 마당이다. 화면에는 다큐처럼 그의 소리에 빠져든 스크린 너머의 관객 모습도 보인다. 순간 영화 <춘향뎐>을 보던 관객들은 극장에서 나와 장소를 조상현 명창의 공연장으로 온 기분이다. 화면의 내용과 스크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걸 경험한다. 임권택 감독은 ‘우디 알렌’보다 훨씬 공감각(共感覺)적으로 관객과 배우 사이의 벽을 허무는 능력이 있구나.
조상현 명창이 전하는 ‘춘향가’는 모든 춘향전의 원전이므로 <춘향뎐> 역시 춘향과 몽룡의 배우만 바뀌었을 뿐 줄거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걸맞게 판소리의 형식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 생각된다. <방자전>이 새로운 인물들의 캐릭터로, <춘향뎐>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판소리 형식으로 ‘춘향전’을 각자 변주한다.
다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으로 돌아가 보자. 변학도가 부임하고 얼마 후 지방 관리의 업무수행 차 기생점고(妓生點考), 즉 관청에 소속된 기생들을 점검한다. 그러나 춘향은 관기도 아닐뿐더러 몽룡을 기다리는 몸이라 부름을 거부한다. 이때 포졸 두 명이 명을 받고 춘향의 집으로 찾아간다. 다름 아닌 헐렁쇠 ‘김희갑’과 물렁쇠 ‘구봉서’가 그들이다. 뜬금없이 반가운 얼굴들의 등장.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춘향을 아끼는 삼촌 같은 마음에 그저 월매가 주는 술만 먹고 관아로 되돌아온다.
결국 다른 포졸들에 의해 춘향은 잡혀 오지만, 완강하게 하게 계속 거부하자 변학도는 윽박지르고 살살 달래고 갖은 애를 쓴다. 그러자 춘향은 나라에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하물며 유부녀 강간하는 죄는 어찌 하라 하였소?” 되묻는다. 변학도가 권력으로 신분으로 아무리 포장을 해도 춘향이 보기엔 그저 ‘강간’과 다르지 않았다. 춘향, 최은희가 양반들의 껍데기를 조롱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암행어사의 출또 장면과 함께 관객들이 몰입하여 박수칠 법한 유쾌한 사이다 장면이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아무리 주도적인 춘향이라도 결국 몽룡의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인물인가? 결국 여성의 삶은 남성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가? 또한 양반과 기생이라는 ‘신분계급’의 한계가 현재에 와서 ‘자본계급’으로 더욱 견고해 진다. “근로소득세 내는 니가 모르는 종합소득세 내는 세계가 있단다.”
조선 말,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판소리 춘향가’에 이미 들어있는 내용이다. 누군가에겐 러브스토리가, 누군가에겐 각자의 캐릭터가, 누군가에겐 계급사회의 모순이 눈에 들어온다.
1990대 초에 데뷔한 ‘봉준호’와 ‘박찬욱’은 20대 학생들에겐 이미 거장이자, 원로감독 반열에 오르내린다. 그렇다. 이제는 <터미테이터>(1984)가 고전영화가 되는 시대다. 철학이나 음악에 비해 태생이 늦은, 그리고 복제기술로 발달한 ‘영화’는 변화가 빨라진 만큼 고전으로 인정받고 혹은 사라지는 시기도 빨라졌다. “영화언어의 기틀을 다진” 혹은 “영화의 진화를 이룬” 영화들을 고전영화라 부른다.
그러나 무엇을 고전으로 볼 것이냐는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 <성춘향>은 1961년에 제작됐으나, ‘판소리 춘향가’를 원전으로 하는 모방의 한계가 존재한다. 오래된 필름이 주는 ‘아우라’가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니다. 사람들의 입에 흘러 다니고, 아직도 전해지는 판소리, 다른 영화들로 재탄생되는 원전으로서 ‘춘향가’는 고전이겠지만, <성춘향>은 그렇지 못한 이유다.
문득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의 막둥이(한석규)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도시빈민, 가족의 해체, 경제위기, 폭력적인 도시개발, 조직의 보스, 그의 정부,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 어떤 예술이든 시간이 흘러 다른 무엇으로 재탄생되고 새롭게 되풀이 된다면, 또 다른 ‘새로운 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_청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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