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걷다
나는 남산 밑에 자리했던(지금은 안산으로 옮긴)예술대학을 다녔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퍼시픽호텔이 있는 방향으로 나와서 경사진 골목을 올라가면 강의를 듣던 건물이 있었다. 그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남산자락으로 통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를 다닐 때 한 번도 골목 끝까지 올라 남산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주말에는 2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교 집만 오가며 보냈던 것 같다. 10월에 날씨 좋을 때 남산 둘레길을 걷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학교를 졸업한지 25년이 흘러갔는데 그 골목은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10월 15일 일요일, 서울 시청까지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뭔지 모르게 설레었다.
약속장소인 덕수궁 앞에서 먼저 와있던 두 친구를 만났다. 공동체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활동하다 보니 따로 보면 각각 다르지만, 뭉쳐 있으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닮아 보이는 사이가 된 친구들이다. 안으로 들어가 국립현대 미술관 덕수궁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을 관람했다. 이름은 처음 듣는 화가였는데, 그림은 달력에서 본 기억이 나는 그림도 있었다. 한 친구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대하는 폼이 참으로 진지해서 전시회의 제목에 걸맞은 관람객이었다. 반면, 다른 친구와 나는 설렁설렁 돌아보고 나와서 휴게실 의자에서 노닥거렸다. 단순하게 그려진 화풍이 따라 그려볼만 하다던가, 노년기 작품에서 보이는 밝은 색조가 인상적이라는 둥. 그림 자체에서 달관한 기풍이 느껴져서 60여년 그림을 그리며 산 화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전시회였다.
덕수궁을 나서서 도심가 인도를 따라 건널목을 몇 번이나 건너 명동 한복판을 통과해서 명동역 지하도를 건넜더니 예전에 학교로 통했던 골목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보다 2년 앞서 역시 이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학교를 다닌 친구는 골목에 즐비했던 가게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어떤 이름은 기억이 났고 또 어떤 이름은 생경했다. 그 중에서 나란히 붙어있던 두 서점의 상호를 듣자, 빽빽이 책이 꽂혀있던 좁은 서가가 떠올랐다. 전공서적이 주로 꽂혀 있던 그 서가 한 쪽에 꽂힌 시집을 사곤 했다.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 같은 시집 말이다. 알 수 없는 내용들을 꾸역꾸역 읽으며 글 쓰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 믿었다. 그렇게 사 모은 시집이 책꽂이 한 칸을 꽉 채웠다. 그러는 동안 글은 한 줄도 안 늘었지만, 예술 대학 다닌다며 부린 유일한 사치였던 것 같다. 지금은 학교도 이전했고 내가 자주 갔던 가게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강의동 건물 맞은편에 있던 편의점 정도만 남아있었다.
경사진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서 점심을 먹고 남산 둘레길로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걸었다. 나보다 먼저 학교를 다녔던 친구는 둘레길을 들어서면서 여기저기 그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학교 강의동 위로는 올라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추억담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때 올라 다녔던 남산과는 너무나 달라졌다고도 했다. 같이 걸은 다른 친구는 한남동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을 훤하게 꿰뚫고 있어서 걷기 좋은 코스로 안내해 주었다. 사계절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어서 굳이 다른 데 갈 필요가 없다는 그 길에는 가을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쪽으로 인공으로 조성된 실개천이라지만 울창한 나무숲과도 잘 어울렸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남산 둘레길은 총 7.3키로로 두 시간 삼십분 정도 걸리는 길로 완만하게 조성되어 있어서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두 친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혼자 앞서나갔던 모양이다. 나를 불러 세운 친구들은 얘기 좀 하면서 걸으란다. 워낙 혼자 싸돌아 다니다보니 이정표만 좇아서 하염없이 걷는 습관이 같이 걷는데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속도를 늦추고 어제 본 드라마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설이 길고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나의 스타일을 아는 친구들은 어디서 치고 들어올지 가늠하는 게 느껴진다. 나는 말하는 속도를 높여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공동체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던 친구들이라 작정하고 수다 떠는 나를 받아주는데 능숙하다. 그런 분위기가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혼자서 걷는 고요함과는 다른 떠들썩하게 걷는 재미도 좋았다.
오랜 만에 친구들과 함께 걸은 길이었다. 다 잊고 있었던 20대 후반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서점은 사라졌지만, 그 때 산 시집들은 내 책꽂이에 여전히 꽂혀있다. 그 시절에 이루고 싶었던 꿈에서는 한참 멀어졌지만, 또 다른 꿈을 찾으며 나는 여전하게 지낸다. 이 시절에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로 한 칸 한 칸 채워가면서.
글_기린(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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