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다
준비
작년에 이어 올해는 9월 23일에 기후정의행진이 있다는 소식이 공동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올해 행진에는 소창조각보로 플랭카드를 만들자는 제안도 함께였다. 토요일 오전에 세미나를 하고 시청역까지 가면 본집회는 참여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행진 2주전, 파지사유 벽면이 하얗게 칠해졌고, 푸른 빛깔로 물들인 커다란 천이 걸렸다. 그 위에 에코실험실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소창조각보에 메시지를 담아 한 장씩 붙여나갔다. 이번 행진의 슬로건인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라던가 문어, 고래, 녹아내리는 빙하도 보였다. 세미나를 하러 온 친구들을 불러다 소창조각을 내밀면 대부분 진지하게 뭔가를 그리거나 썼다. 내가 속해 있는 ‘양생프로젝트세미나’팀은 요즘 한창 읽고 있는 도나 해러웨이의 책에서 따온 문장들로 조각보를 채웠다. ‘우리는 모두 크리터(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때로는 기계까지 포함하는 잡다한 것들)다’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우리는 모두 퇴비다’ 등이었다.
행진 전날, 에코실험실팀이 친구들이 그려준 소창조각보를 떼어내 일일이 이어 시침질을 해서 커다란 플랭카드를 만들었다. 망토로 쓸 수 있는 크기와 몇 사람이 펼쳐서 잡을 수 있는 크기로 두 개로 완성되었다. 작년 행진 때 종이박스를 재활용해서 각자 만들었던 피켓에 비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플랭카드였다. 그만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관심도 높아지는 실천이었다.
집회
오전 세미나를 마치고 서울 시청역 7번 출구에 도착하니 이미 본집회가 반 정도 진행된 시간이었다. 8차선의 반을 점거하고 도로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최측 집계로는 3만여 명이 참석하여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본집회 무대에 오른 발언자들의 목소리와 참가 단체들의 깃발들이 공중에서 뒤엉기고, 나머지 차선에서는 차량들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무대에서 뒤로 거의 끄트머리쯤에 앉아있던 친구들과 합류했다. 발언들이 끝날 때마다 진행자의 선창에 맞춰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땅/태양/바람은 상품이 아니다!” “물/전기/가스는 상품이 아니다!” 인간 비인간 할 것 없이 수많은 생명들을 위협하는 상품의 논리를 깨부수자는 의지가 담긴 구호였다.
본집회 후반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는 합창의 순서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가사를 찾아서 따라 부르는데 목청이 트이지 않아 몇 소절도 못 부르고 켁켁거렸다. 탁 트인 집회에서 목청껏 부르는 노래야말로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순간이거늘, 집회를 즐길 몸이 못 되어서 아쉬웠다. 이럴 때를 대비해 코인 노래방이 필요한 거였다. “기후위기 한복판에서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새로운 길, 기후위기를 넘어 다른 세상을 여는 새로운 길, 그 길로 우리 함께 행진합시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끝으로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
우리 일행은 용산방면으로 행진하는 무리에 합류했다. 숭례문에서 출발 서울역을 거쳐 전쟁기념관북문까지 2.6키로 정도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차량이 통제된 도로 위에는 기후정의행진에 나선 사람들이, 통제되지 않는 차선에서는 시내버스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피켓과 플랭카드, 단체 깃발을 나부끼며 행진하는 우리의 활기와 버스 안에서 무심히 쳐다보는 승객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창조각보를 앞세우고 걷던 친구들은 버스의 승객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세로로 버스 방향과 맞춰 전열을 바꾸어 행진했다. 기후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을 행동으로 함께 보여주자는 소창조각보 퍼포먼스였다.
행진을 진두지휘하는 트럭에는 진행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구호 제창을 이끌었다. 그리고 행진의 흥을 돋우는 노래들도 연이어 틀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라며 온몸을 흔들며 열창하는 십대들이 행진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각자의 다름을 가진 개인들이 이 행진 속에서 하나로 뭉쳤다. 그 순간 거리는 어떤 저항을 만끽하는 장소가 되었다. “난 정말이지 무력하기 싫어 난 노래하며 춤추고 싶어 우리 모두의 삶을 지켜내고 싶어.”(923 기후정의송 중에서)
행진이라는 걷기
2018년 그레타 툰베리와 ‘미래를 위한 금요일’의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시위, 그리고 이듬해 2019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맞춰 일주일 동안 진행된 기후파업시위를 계기로 9월 기후행동의 달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기후정의를 외치는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고, 코로나로 주춤했던 행진도 재개되어 2022년에 이어 올해도 세계 곳곳에서 기후정의행진이 있었다. 나도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다. 일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자연에 스미는 감각을 회복하는 걷기나, 몸의 속도에 맞춰 마음도 거닐게 했던 걷기에서 나아가, 사회적 의제로서 기후 정의를 위한 행진이라는 걷기까지 이르렀다. 행진으로, 시위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느냐는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올해 집회에서도 시위와 행진이 이어지는 내내 경찰들이 따라다녔다. 행진이 마무리되었다는 알림이 전해지자 경찰의 지휘아래 통제되었던 차도로 차량들이 진입했다. 속도를 높이는 차량에 인도로 밀려난 우리도 같이 온 일행들을 찾아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자연스러워 이곳이 정말 시위와 행진이 있었던 곳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행진은 있었고 친구들과 그리고 낯선 이들과 함께 걸었던 것 또한 분명했다. 매연을 마시며 구호를 외치느라 칼칼해진 목구멍과 먼지를 베고 도로 바닥에 누웠던 몸으로 기억되었다. 그렇게 한번 두 번 거듭되는 경험으로 지금의 기후위기 체제를 전환시킬 힘을 키워야 한다.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 행진으로 북돋우자.
글_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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